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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다
삼구가 제 혼자 눈물겨운 사제 간의 이별을 그리며 떠난 뒤, 나는 기루 1층의 상황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휴."
다행히 추소광은 홍련을 안으려고 하지 않았다.
고수인 삼구가 이미 홍련을 안았다는 시점에서 그는 홍련을 안기보다 자신의 여자가 멋대로 남에게 안겼다는 것에 분노했고, 팽유월의 등장으로 팽유월의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했다.
- 고개를 들어보시오.
팽유월은 살기를 풀풀 날리며 홍련을 압박했다. 홍련이 입고 있는 옷은 마치 준비라도 한 듯, 팽유월의 복장과 몹시 비슷했다.
- 그....
- 이런 미친.
홍련이 일어난 모습을 본 팽유월은 곧장 검을 뽑아 들었다. 나는 추소광을 향해 검을 겨눈 팽유월을 응원했다.
"암, 당연히 칼을 들어야지!"
자신과 비슷한 모습의 여인에게 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혀 취한다? 불쾌감을 넘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짓이다. 엄히 다스리지 않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런 걸 그냥 멀리서 지켜볼 수는 없지.'
직접 사람들의 표정을 생생히 눈으로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나는 한걸음에 기루로 뛰어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바닥에 나자빠진 추소광은 기겁을 하며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가자.'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뛰어올랐다.
"지, 진정하시오! 나는 그대의 부군이 될 남자요!"
"이 개...!"
"잊지 마시오! 오직 우리 가문만이, 나만이 하북팽가의 멸문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제법 흥미진진한 내용이 오간다. 나는 나찰 같던 팽유월이 들어 올린 칼을 다시 회수하는 것에 호기심이 생겼다.
어렸을 때라고 해도 불같은 성정이 어디 가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칼을 회수한 걸까.
"우리 가문에서 가지고 있는 천환단! 가주를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칼을 내려놓는 게 좋을 것이오!"
'천환단을 걸고 협박해? 생긴 대로 노는군.'
그 팽유월을 상대로 가문을 걸고 협박을 하다니 아주 대담하기 짝이 없는 놈이다
. 그러니까 팽유월이 동침을 안 해준다고 그녀를 닮은 기녀에다가 팽유월처럼 꾸며 하룻밤을 자려고 한 것이다.
덕분에 내가 은자 3 냥으로 잘 먹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딱히 홍련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인 팽유월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다. 그냥 팽유월 닮은 기녀를 취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추소광이 내 흥을 깬 이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런데 천환단이라.'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이 시점이면 하북 팽가의 가주가 사술의 영향으로 병환을 얻게 되어 수년을 누워 지니게 되고, 그걸 해결해 준 영약이 바로 전설의 의원 <신의>가 지었다고 하는 천환단이었다.
'근데 팽가 가주 죽잖아.'
하지만 천환단은 가주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정확히는 약효는 발휘했으나, 이미 몸에 죽음의 기운이 퍼질 대로 퍼진 가주는 병은 치료했으나 기력이 다해 죽었다.
만약 내 기억대로라면 결과적으로 팽유월의 '혼약거래'는 무의미한 짓이 되고 만다.
"...이, 잊지 마시오! 내게 해코지를 한다면 천환단은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이, 이...!"
"참으십시오, 아가씨!"
팽가의 무사들은 팽유월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팽유월이 일을 그르친다면 결국 팽가의 무사들이 추소광의 아래에서 겪는 굴욕은 전부 무의미한 짓이 되고 만다.
"아아악!!"
팽유월은 검을 바닥에 내던지며 몸을 돌려 기루를 떠났다.
팽가의 무사들은 반씩 나뉘어 팽유월의 뒤를 따라가거나 추소광을 일으켜 세웠다. 바지가 누렇게 젖은 추소광은 시뻘게진 얼굴로 꽥꽥 소리를 질렀다.
"내 오늘의 굴욕은 잊지 않을 것이다!"
누구보고 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추소광은 끝까지 행패를 부리며 기루를 떠났다. 결국 난동의 장이 되어버린 기루에는 기녀들의 울음소리만이 가득 울려 퍼졌다.
"......."
원흉이나 마찬가지인 홍련은 주먹을 움켜쥐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여인의 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내가 숨어있는 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올라와라.]
나는 홍련에게 전음을 날렸다. 홍련이 계단을 올라오는 사이, 나는 미리 그녀가 나가기 전에 내가 앉았던 곳으로 돌아와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홍련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상공."
"전표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이냐?"
"...저 자가 일방적으로 주고 간 것입니다. 돌려주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홍련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끝이 살짝 떨리고, 눈동자가 계속 다른 곳을 향하며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이군. 입적은 사실이고, 그놈 몰래 한 몫 크게 챙기려고 한 것이렷다?"
"다, 다릅니다. 저는-"
"그놈 취향도 참 특이하지만, 너도 참 난 년이로구나. 그놈은 그렇다 쳐도, 나를 상대로 이런 개수작을 벌이다니."
쿵! 홍련은 바닥에 이마까지 찧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상공!"
"내가 너와 혼인을 한 것도 아닌데 상공은 무슨 얼어 죽을 상공. 너나 나나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살을 섞은 것이 아니더냐."
나는 홍련의 몸 자체를 원했고, 홍련은 내게서 은자를 원했다. 정확히는 은자에서 나아가 더 큰 무언가를 원했다.
"상승의 무공이 그리도 탐이 나더냐?"
"......."
홍련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삼구가 마치 홍련을 안았던 사람인 척 꾸민 걸 그녀가 적당히 받아줬던 것처럼, 홍련은 고수인 삼구가 실질적으로 내 하인인 걸 분명히 알고 있었다.
즉, 나의 무위를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녀도 기녀가 되기 전에는 '무림인'이었으니까.
"나를 꿰어 마음을 홀린다면 어디 내가 네게 비급이라도 하나 내어줄 줄 알았느냐? 아니면 영약이라도 하나 줄 줄 알았느냐?"
"...그 자를 고수로 키워주셨지 않습니까. 한낱 약초꾼이었던 자를!"
"그래. 내가 키웠지. 그래서 이제 너도 키워달라고 하는 것이냐? 내가 왜?"
"뭐든지 하겠습니다, 상공!"
홍련은 다시 머리를 찧으며 내게 강한 의지를 보이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이마에서 피가 나든 딱히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무인의 길과 표국 소국주의 첩실살이를 동시에 계획한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내가 다음 날 찾아왔다면, 혹은 그놈이 다음 날 찾아왔다면 분명 너는 네 뜻을 이룰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유감이구나. 나나 그놈이나 너를 하필 같은 날 취하려 했다는 것이."
"사, 상공! 하지만 저는 그놈에게 안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어찌 믿겠느냐? 기녀에게 순결을 묻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은자 3냥이 든 전낭을 발로 밀었다. 눈앞에서 뿌려진 은자에 홍련의 눈에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시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어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제게 그렇게 사랑을 속삭여놓고!"
"흥을 돋우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그리고 어디 마음이 맞아서 몸을 섞었나? 하룻밤마다 은자 다섯 냥씩 꼬박꼬박 주지 않았더냐."
"상공!!"
"추하구나. 들켰으면 조용히 사라져도 유분수이거늘, 어딜 추하게 뭉그적거리느냐. 내게서 떡정이라도 바라는 것이냐?"
"몸종이 되겠습니다! 원하실 때 저를 얼마든지 안으셔도 좋습니다! 제발, 제발 저를 도와주셔요! 추소광, 그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씁...."
질척거리면서 달라붙는 건 딱 질색이지만, 저렇게 간절하게 애원하는 걸 보니 양심이 쿡쿡 쑤셨다.
"좋다. 도와주지. 대신, 내 방식대로 해결할 것이다."
"네...?"
속닥속닥. 나는 홍련의 귀에 대고 나의 계획을 속삭였다. 내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홍련은 놀라자빠졌다.
"그, 그런!"
"어이쿠, 점혈."
나는 홍련의 혈도를 찔러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제압된 홍련은 경악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간절함과 배신감은 사라지고, 두 눈에는 혐오와 공포만이 가득했다.
"아아, 익숙한 눈빛이야.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들게 하는군. 그런 의미에서 그대로 잠들 거라."
나는 홍련의 정수리를 눌러 강제로 그녀를 재웠다. 마침 이마에 흐르는 피 때문에 빈혈로 쓰러지기 딱 좋은 형상이었고, 나는 홍련을 옆으로 눕히고 손을 털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나있을 것이다."
근심걱정의 원흉이 사라졌을 테니까.
"추소광을 죽여주마. 어때? 깔끔하지?"
* * *
쾅!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분노가 물건에 행해진다. 추소광은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목함을 바닥에 마구 내던지며 분을 풀었다.
"으아아악! 씨바아알!"
오갈 데 없는 분노는 부서진 목함의 잔해로 향했다. 거나하게 취해있던 술기운인 이미 온데간데없이 말끔히 날아갔고, 남은 건 굴욕에 대한 수치심과 울분뿐이었다.
"감히, 이 나를, 지아비가 될 사람을 향해 칼을 겨눠!"
추소광은 목함 속에 있는 종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고급스러운 한지에는 한 여인의 초상화가 먹으로 그려져 있었다. 후대에 남게 되면 미인도라 칭송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팽유월의 얼굴을 담고 있었다.
부우욱.
"이 썩을 년!"
추소광은 작은 금송아지 하나 값을 치르고 받은 그림을 찢어버렸다. 팽유월에게 향하는 복수는 아흐레만 지나면 평생 갚을 수 있으나, 그 아흐레를 참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혼인만 하고 나면 내 아래에 깔려 평생을 지리게 만들어주마. 으으으...!"
혼인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로 취한 다음 아이를 낳게 하면 고분고분해질 것이다.
아무리 무가의 여식이라고 한들 여자는 여자.
특히 세간의 평판을 신경 쓰는 팔대세가의 여식이라면 더더욱. 언제까지 그 잘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나 지켜보자는 생각과 함께, 추소광은 찢어버린 초상화를 촛불에 태워버렸다.
"그보다 그 고수 새끼, 설마 나한테 원수지는 건 아니겠지?"
추소광은 손을 물어뜯으며 전전긍긍했다.
팽유월이야 천환단과 빚을 탕감할 금전을 핑계로 찍어누를 수 있지만, 은원이라고는 전혀 없는 관계의 일류 고수는 추소광에게도 설설 기어야 할 대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고수에게는 죄가 없었다.
그는 그저 여자를 품으러 기루에 들어왔을 뿐이며, 마침 그 기루에서 내어준 여자가 팽유월을 닮은 홍련이었을 뿐이다.
팽유월에게 품은 음심을 잠시나마 풀어내고자 기루에 갔을 뿐인데, 음심을 풀기는커녕 수치와 굴욕만 당했다.
"젠장. 무림인 출신 기녀만큼 속살이 야들야들한 게 또 없는데...."
아직 안아본 적은 없지만 소문이 그렇더라. 무공을 단련한 여인은 일반 아낙네보다 훨씬 더 남자를 즐겁게 한다는 소문은 제법 신빙성을 가지고 있었다.
"씁, 아쉽군. 아쉬워. 모처럼 재미 좀 볼 수 있었는데."
추소광은 금방 생각을 접어버렸다.
장사를 하면서 선친이 가르쳐준 것은 이미 잃어버린 이득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어차피 남이 먹어버린 기녀, 자신이 취해봐야 의미는 없다.
"그래도 전표는 회수해야...누구냐."
추소광은 종에 달린 줄을 붙잡았다. 혹시나 위험한 존재라면 경종을 울려 호위를 부를 준비를 마쳤고, 추소광은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예의주시했다.
"뭐야, 쥐새끼였-커억!"
빠--악!
무언가가 추소광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머리가 으깨지는 듯한 충격에 추소광은 머리를 탁자에 박았다. 충격에 빙빙 도는 세상 속에서, 추소광은 의지를 다잡고 줄을 잡아당겼다.
스륵.
금줄만 딸려왔다. 끝부분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잘린 듯했고, 탁자에 머리를 박았음에도 경종은 울리지 않았다.
"한 마디라도 지껄이면 네 놈의 목에 칼이 들어갈 것이다."
뒤에서 울려 퍼지는 중후한 목소리에 추소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밖이 조용한데도 추소광의 침실까지 침입했다는 것은 그가 엄청난 고수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원하는 게 뭐, 큽?!"
푹. 날카로운 칼이 추소광의 목을 살짝 찌르고 들어왔다. 단검 아래로 흘러내린 선혈이 추소광의 허벅지에 뚝뚝 흘러내렸다.
'미친 새끼! 진짜 찔렀어!'
"난 두 번 말 하는 걸 싫어한다. 네가 대답해야 하는 건 내가 다음에 물을 것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뿐이다."
"......."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추소광은 자신의 전음이 침입자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랐다. 전음조차 쓸 수 없지만, 팽유월을 먹어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는 없었다.
"천환단."
"흐끕!"
"천환단을 내놓아라. 지금 어디에 있지?"
"......."
추소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턱에 맺혀 떨어질 때까지, 추소광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천환단의 위치를 찾는 건 천환단을 가져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그리고 천환단이 없는 게 밝혀진다? 혼약은 파기다. 팽유월은 언젠가 자신을 죽이려고 들 게 분명했다.
"처, 천환단은 그게...."
푹!
추소광의 어깨에 칼이 박혔다. 짜릿한 격통이 전신에 퍼져나갔고, 추소광은 온몸으로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윽!!"
하지만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침입자는 어깨에 박은 단검을 지긋이 누르며 물었다.
"말하면 살고,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
추소광의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아아악! 이 미친 새끼, 종들고 튀었어! 여봐라! 거기, 거기 아무도 없느냐!!!"
추소광은 어깨에 단검이 박힌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청했다.
"빨리, 빨리...커허헉...!"
추소광의 비명은 마치 목에 뭔가가 걸린 듯, 방 안에서 조용히 감돌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