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5화 (5/568)

--------------------

돌아오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키운 게 제자지."

나는 내 방에서 아래의 상황을 내기로 훑으며 술잔을 마저 비웠다. 내 근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구는 마음껏 내기를 발산하며 소란을 일거에 잠재웠다.

- 누, 누구십니까?

호위 무사 중 제법 힘깨나 쓰는 것으로 보이는 무사가 예를 갖추며 삼구에게 물었다.

- 팽가냐?

팽가 특유의 거대한 도는 없지만, 걸음걸이에서 그들의 기운이 느껴진다. 자세히 보니 무사들 모두가 팽가의 제자인 듯 보였다.

'하북에 있어야 할 놈들이 왜? 아니면 최소한 팽유월 호위로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그냥 팽가의 무공을 배운 낭인?'

왜 이런 곳에서 추소광 같은 놈의 호위를 하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 실력 덕분에 삼구의 경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상황을 정리하기에는 편했다.

'그렇군. 팽유월을 따라 온 호위무사구나. 표국도 호위무사도 결국 힘의 논리에 따르기 마련.'

하지만 돈으로 여자와 호위무사를 살 수 있어도, 천하제일의 미녀와 천하제일인은 살 수 없는 법이다.

금전으로 구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 법.

팽가의 무공을 배웠다고 내가 키운 삼구를 이겨낼 수는 없다.

"새끼. 그러니까 남이 먹던 여자는 건드리지 말아야지."

추소광은 제자리에 굳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삼구가 내뿜는 살기에 술기운은 진즉에 달아난 듯했고, 슬슬 삼구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호, 혹시 이 아이를 안으시던 분이....

- 날세.

추소광은 급히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강약약강의 전형으로 보이는 남자답게,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대라는 걸 깨달은 추소광은 삼구의 눈치를 보며 맹렬히 입을 놀렸다.

- 그, 그게 실은 저년은 제가 사들인 기녀입니다! 제가 입적시키기 위해 거금을 주고....

- 입적?

"뭔 개소리야?"

나는 전혀 듣지 못했다. 홍련이 교태를 부리던 비음 때문에 아래에서 추소광이 난동을 부리는 것도 전혀 듣지 못했다. 애초에 어련히 있는 주정뱅이의 주사 정도로 생각하고 홍련의 젖에 정신을 팔았다.

"설명해보아라."

"그, 그게...."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삼구에게 열심히 입술 세례를 퍼부은 기녀는 내 앞에 엎드렸다.

"추, 추소광이 홍련 언니를 샀습니다. 그, 은자 100냥에 자신의 첩으로 입적시키겠다고 돈을 던지고 가셨...."

"오호. 제대로 꼬였군."

그림이 그려진다. 기루에 투신한 여인이 자유의 몸이 되는 일은 흔치 않다.

표국의 후계자에게 입적하는 건 분명 기녀 치고는 성공하는 삶이지만, 기녀도 사람인지라 그 상대가 무뢰한이라면 혐오감이 들 수밖에 없다.

"좆같네. 왜 그걸 말 안 했지?"

"그, 그게...."

"뻔하지. 양쪽으로 다 돈 떼먹으려고 했구나. 진짜 앞길 창창한 청년의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했군. 쯧."

까딱 잘못하면 표국의 후계자와 엮여서 인생이 꼬이기 일보 직전인 상황이다.

"지가 무슨 비극의 여주인공인 줄 알아."

나는 그냥 기루에 쌓인 물 좀 빼내러 왔을 뿐인데, 홍련은 나와 추소광을 두고 저잣거리에서나 나올 법한 비극을 쓰고 있었다.

"어휴. 나한테 엉겨 붙으려는 속내는 알겠는데...."

안타까운 동시에 짜증이 치민다.

여기서 홍련을 구한다면 내가 홍련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고, 추소표국이라는 곳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하룻밤 즐기기 위해 품은 여인을 위해 지역의 유지를 적으로 돌린다? 좋지 않다.

- 그런가.... 미안하오, 추 공. 그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소. 내 사과하리다.

- 아, 아닙니다! 대협께서 너그러이 상황을 이해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삼구한테 꿍쳐둔 천년하수오 선물로 줘야겠어.'

나 대신 허리를 숙이고 사과를 하며 자존심을 팔았다.

아무리 하인이라고 한들 나 대신 기고 들어가는 것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외모 때문에 기루의 입구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던 와중에 유일하게 나를 받아준 기루라고 도와주려고 했더니, 졸지에 이 동네에서 떠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생각해보니 열 받네?"

나는 그냥 물 빼러 왔는데 왜 내가 이런 문제에 엮여야 한단 말인가.

정파식 해결, 하하 호호 웃으며 서로 사과하고 끝.

모두가 서로 불편하게 한 발씩 양보하며 물러서지만, 서로 앙금이 남아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파식 해결, 힘으로 때려잡고 떠난다.

추소광은 피떡이 되어 오랜 기간 누워있겠지만, 홍련과 기루는 분명 망하게 될 게 뻔하다. 내가 기루를 책임져 주지 않는 한.

'좆 같은데 그냥 죽여?'

마교식 해결, 전부 죽인다.

가장 깔끔하고 깨끗한 방법이다.

<추소표국학살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관아에서 조사는 이루어지겠지만, 무공의 흔적을 남기면 전형적인 은원에 의한 복수라는 식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죽인다, 살린다, 죽인다, 살린다...."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 기루의 불편한 분위기를 바꿀 화사한 꽃이 들어왔다. 기루 특유의 분내와는 다른 자연의 꽃내음이 가득한 여인의 기운에 나는 눈이 확 트였다.

"오늘 두 번이나 얼굴을 보다니. 인연인가?"

활짝 열린 기루의 입구에는 팽유월이 한기를 뿜으며 서 있었다.

- 이게 무슨 행패입니까.

얼음장 같은 팽유월의 목소리에 추소광과 호위무사들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추소광은 아내가 될 여인의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는 이유로, 호위무사들은 불합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 자체에 대한 불쾌감으로.

- 왜 저희 가문의 무사들이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추 공.

- 흥...! 어차피 그대가 우리 표국의 사람이 되면, 저들 또한 우리 표국의 무사들이 될 사람들이요! 내가 미리 쓴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는가!

추소광은 오히려 으름장을 놓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행동에는 일말의 수치심이나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 흐음? 이게 무슨 일이지?

삼구는 주변을 훑으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무공을 배우는 속도는 빨라 일류가 되었지만, 스승이 여자를 안으러 가는 걸 직언이랍시고 훈계할 정도로 눈치는 없는 녀석이었다.

[척 보면 모르냐. 팽유월이 저 새끼 아내 될 여자고, 홍련은 팽유월을 쏙 닮은 여자다. 저렇게 차갑게 대하는 걸 보니, 혼인을 올리기 전에 홍련으로 재미 좀 보려고 한 듯하군.]

내 전음에 삼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가 설명을 해놓고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젠장, 내가 저놈이랑 똑같은 놈이라고?'

팽유월 대신에 홍련을 안으려고 했다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니.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개새끼. 팽유월이나 안을 것이지 왜 홍련까지 안겠다고 지랄을 하다가 이 사달을 일으켜?"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 밑에서 팽유월과 추소광의 언쟁을 들을 때마다 기가 막히고 화가 들끓었다.

'그러니까 저 새끼가 첫날 밤을 못 참아서 팽유월 대신 홍련을 취하러 왔고, 내가 그것 때문에 혼자서 좆이나 잡고 술을 마셔야 한단 말인가?'

이건 용서할 수 없다. 뒷 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지금은 끓어 넘치는 이 분노를 풀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삼구야. 일단 자리를 빠져나와라]

나는 삼구에게 전음을 남기고 은자를 챙겼다.

원래는 반나절 값만 치르고 나머지 은자를 챙기려고 했으나, 불쾌해진 나머지 은자 한 냥도 챙기기 싫었다. 나는 젓가락에 기를 불어넣어 날카로운 칼로 만들었다.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 먹고 떨어져라."

나는 은자를 전부 남기고 창으로 빠져나왔다. 기루의 1층 상황이 한눈에 보이는 반대편 건물까지 뛰어오른 다음, 아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 흥이 식었다. 나는 이만 가도록 하마.

- 어, 네? 저기, 언제....

- 살펴 가시옵소서.

홍련은 눈치 좋게 삼구를 떠나보냈다. 덕분에 삼구는 홍련을 안지도 않았건만 홍련을 안은 것처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삼구는 적당히 기를 죽이며 골목으로 빠져나왔고, 담벼락과 지붕을 밟고 뛰어올라 내 옆에 착지했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잘했다, 삼구야. 그럼 이제 저 새끼를 어떻게 조지지?"

"...하아, 스승님. 그러니까 제가 기루에는 가지 말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입구를 빠져나오자마자 내 옆으로 뛰어오른 삼구는 바로 내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려고 했지만, 나 때문에 허리를 숙인 것에 한 번 참았다. 나도 염치라는 게 있으니까.

"너는 알고 있었냐? 홍련이 나를 엿 먹인 것."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냅다 대가리부터 갈기셨잖습니까."

"할 말이 없군. 다음에는 한 번만 더 참고 후려치도록 하마."

아무리 스승이라도 잘못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하는 법. 나는 점점 잦아들어가는 소란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분위기 잡고.'

슬슬 삼구를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삼구야. 네가 익힌 광천수라검이 이제 몇 성이지?"

"......오성에 이르렀습니다."

"내공은?"

"스승님의 은혜 덕분에 일 갑자를 넘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가서 맞아 죽지는 않겠군. 이제 하산해도 좋다."

"예? 스승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 말에 삼구는 화들짝 놀라며 엎드렸다. 조금 전까지 팽가의 무사들을 상대로 내기로 찍어누르던 중년인이 여인의 앞에서 애걸복걸하는 동정처럼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를 버리시는 겁니까?!"

"버리기는. 애초에 약속이 그거 아니었냐.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나를 돌봐주기로. 쯧, 누가 돌봐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삼구는 특유의 노안으로 대외적인 나의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제 여자 안을 만할 만큼 자랐으니, 삼구와 헤어질 때가 되었을 뿐이다.

"오늘 네가 무사들을 상대로 겁박하는 것을 보고 느꼈다. 너는 이제 완연한 고수다. 이제 내 곁을 떠나 세상을 주유하고 천하를 누비면 초절정, 아니 그 이상도 노릴 수 있지. 내가 네게 처음 무공을 가르칠 때가 기억나느냐? 네가 익힐 광천수라검이 극성에 이르면 어디까지 노려볼 수 있다고?"

"...백대고수는 기본이요, 천하 십 대 고수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광천수라검.

전생, 혈강시 시절 나를 숱하게 괴롭혔던 천하 십 대 고수 중 한 명인 <검황>의 검법.

워낙에 강해서 정파 무림맹의 맹주 후보로 거론될 정도였으나, 혈교주에게 조종당하는 나한테 얻어맞아 혈강시의 일부가 되었다.

그의 무공이 어디 절벽 사이에 숨겨진 동굴에 안치된 무공인 만큼, 어디 가서 '네 놈이 어떻게 우리 세가의 검법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 번 더 분위기 잡고.'

"삼구야, 네 뜻을 널리 펼쳐라!"

"스승님이 계집질하는데 제가 불편해서 떨어뜨려 놓으려고 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지.

"알면 조용히 닥치고 떠나거라. 그리고 어디 가서 나를 스승이라고 부르지 마라. 명령이다."

"......허, 참. 알겠습니다. 스승의 명을 따릅니다."

삼구는 한참을 멍하니 머리를 긁적이며 미적거렸다. 나는 삼구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우리가 지냈던 산 쪽 방향을 가리켰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곳을 기억하느냐?"

"압니다."

"그곳에 천년하수오를 묻어두었다. 광천수라검이 칠성에 이른 뒤에야 찾을 수 있도록 몰래 조처를 해두었으니, 천하를 주유하다 때가 되면 그곳으로 가라."

"스승님,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대체 스승께서는 정체가 무엇입니까?"

언제나 삼구는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

나는 굳이 그에게 내가 어떤 존재인지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삼구는 그냥 내게 성인의 몸이 될 때까지 세간의 이목을 끌어줄 보호자일 뿐이었으니.

"천하 십 대 고수에 이르는 무공을 어떻게 알고 계시며, 온갖 영약들이 있는 위치는 또 어떻게 알고 계시며, 당신이 사용하시는 무공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게 하나냐?"

"말씀해주십시오. 스승님의 이름은 말하지 못할지언정, 어떤 문파의 무공을 이어받았는지 당당히 외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거 말할 시간에 칼침이나 더 놓으면 되는 것을.... 알았다, 알았어. 말 안 하면 떠나지 않을 기세로구나."

나는 몸을 돌려 건물 지붕 끝에 섰다.

"채음보양."

"...예?"

"뭘 못 들은 척을 하고 있어. 채음보양이라니까?"

혈강시 시절, 내가 온갖 혈교주의 조종을 받으며 온갖 무공을 몸에 축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단 하나의 무공만을 극성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랑 배맞춰서 강해지는 자다."

여인의 음기를 몸에 강제로 흡수하여 받아들인 내기와 강제로 몸에 집어넣은 피의 영향으로, 나는 그들의 무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스승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못 믿겠으면 믿지 말든가. 이제 멀리 떠나거라. 이번 일로 네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승님,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내가 여자를 안으려다 방해를 받은 이상, 추소광도 똑같이 방해를 받아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추소광의 손이 닿기 전에, 팽가의 여식을 한 번 안아보려고 한다. 감히 내가 안던 여자를 빼앗아 안으려고 했으니, 놈이 안을 여자를 내가 안아야 하지 않겠느냐?"

"...범죄를 저지르실 생각입니까?"

"범죄? 흐흐.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떠난다고 해주거라."

범죄를 저지를 생각은 없다. 그저 남녀가 마음이 맞아서 배를 맞출 뿐.

"혹시 아느냐? 팽유월이 나랑 눈이 맞아서 가문을 버리고 떠나버릴지."

"...하아.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저를 떠나보내려 하신다면, 저는 스승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삼구는 불편한 지붕에서 내게 구배지례까지 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금빛의 내공을 퍼뜨리며 허공을 달리는 경신법은 광천수라검의 육성 초입에서나 익히는 게 가능한 무공이었다.

오성이라더니, 육성의 무공을 펼치며 떠나더라.

"짜식. 자랑하기는."

나는 지붕 위에 걸터앉아 새롭게 안을 채워온 술병을 꼬나쥐었다.

"근데 그냥 한 소리 아닌데."

나는 삼구에게 단 한 마디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채음보양이 내 진신절기인 것을."

삼구가 여자였다면, 아마 나는 삼구를 계속 취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작품후기]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