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천색마-1화 (1/568)

"육봉에 대해 알고 있소?"

개방의 거지, 장삼은 자신과 맞은 편에 앉아 은자를 내어놓는 남자에 소면을 뱉을 뻔했다.

"시방, 육봉?"

"...아. 미안하오. 무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섯 봉을 말한 것이오."

장삼은 남자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낡고 거친 검은 장포에 산발을 정리조차 하지 않은 남자의 모습은 전형적인 낭인의 형상이었다.

"여섯 봉황에 대한 건 왜 알려고 하시오?"

"명산의 정상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도가의 사람일까.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도인 특유의 말투에 장삼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개방의 제자로서 봉 좀 쓴다 싶은 자신도 감히 경지를 알아낼 수 없을 만큼, 남자의 내공은 깊었다.

"...그야 정상에 올라 천하를 눈에 담으려고 하는 거 아니겠소?"

"그렇소.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보고 개안하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자연의 피조물인 인간 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 있겠소?"

도인이 아니라 단순히 여색을 밝히는 자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로 인해 도가에서 퇴출당한 존재이거나.

"...은자 한 냥 더."

어느 쪽이든 개방의 제자로서 정보를 사러 온 이에게 팔 수 있는 정보를 안 팔 수는 없다. 저잣거리 삼척동자도 아는 여섯 봉황에 대해 입을 좀 놀리는 걸로 은자를 받는 건 남는 장사다.

"무림맹주의 딸, 신녀 독고연! 여인의 몸으로 세가의 차기 가주로 불리우는 검접, 모용란! 아미파 장문인의 제자이자 여섯 봉황 중 으뜸, 절제검 유설라! 무공부터 이름까지 비밀리에 가려진 마교 소공녀! 혈교의 귀공녀, 혈소예! 중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섯 명의 후기지수를 두고 사람들은 여섯 봉황이라고 부르지!"

"다섯 명인데?"

"크흠. 그게 실은…."

장삼은 탁자위의 은자를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품에서 은자를 더 꺼내 장삼의 위에 올렸다.

"거지에게서 산 정보를 다른 곳에 퍼뜨리지 마시오. 그러면 모든 거지가 그대를 적대할 테니."

"퍼뜨릴 생각도 없소. 나는 그저 알고 싶을 뿐이니."

"크흠. 여섯 봉황 중 제갈가의 여식이 있지 않은가? 아 글쎄, 제갈가에 색마가 들었다더군."

"호오."

남자의 목소리에 흥미가 돌기 시작했다.

"색마? 그 말은 혹시?"

"...꽃이 꺾인 여인이 어찌 봉황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갈가에서는 쉬쉬하고 있지만, 이 거지도 아는 걸 세상 누가 모르겠는가? 흐흐흐."

"육봉 중 한 명이 줄었으니 오봉인가? 재미있군."

"...여섯 봉황은 전통 같은 것이지. 한 자리가 비었으면 응당 다음 자리가 채워지는 법. 검성의 손녀가 될지, 녹림의 딸이 될지,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문파의 여인이 될지 아직은 모르는 법."

"그들에 대한 정보도 살 수 있나?"

"......흐음?"

장삼은 남자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대하며 터득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남자가 여인들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보이는 반응은-

'복수?'

은원에 대한 해결. 산발이 된 앞머리 속에서 스친 남자의 날카로운 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왠지 여기서 더 알려주면 자신이 위험해질 것 같다는 직감에, 장삼은 뚱한 얼굴로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없소. 정보가 없소. 육봉...에잇, 여섯 봉황 중 한 명의 꽃이 꺾인 지가 언젠데, 벌써 후보가 누구인지 정한단 말이오?"

"그런가...그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채워지게 되겠구려."

"그렇겠지. 자리가 비워졌으면 채워지는 게 인지상정이니. 더 궁금한 것 있소?"

장삼은 슬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남자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기가 쇠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소. 제갈가에 들었다고 하는 색마에 대한 정보는 혹시 가지고 있는가?"

"......."

남자의 기가 흉흉해졌다. 장삼은 그제야 남자가 왜 여섯 봉황에 대해 운운하며 정보를 샀는지 알 수 있었다.

"당신도 여인들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참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썩 나쁘지는 않군. 영웅이 삼처사첩을 거느리는 게 무어 나쁘겠소."

"그런가. 그 색마도 그런 생각으로 제갈가에 침입했겠지? 아쉽게도 정보는 없소. 단지 경공술이 무척이나 뛰어나다는 것밖에는."

"크흐흐. 알겠소. 좋은 정보구려."

남자는 씩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삼의 주머니는 남자가 가져온 은자로 두둑해져 있었고, 점소이와 객잔 주인은 더 주문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장삼은 낡은 외투를 걸쳤다.

"영웅처럼 보이지도 않고 삼처사첩을 거느리기에는 여인들의 배경이 너무 드세기는 하지만...뭐, 좋소. 내 그대를 응원하리다."

"...이거, 기대에 부응하려면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는데. 그런데 형장, 내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근방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면 누가 있소?"

"......당문의 후계자?"

"크하하! 사천당가? 크흐흐, 좋군. 좋구려. 고맙소."

남자는 마지막으로 은자 하나를 뒤로 튕기며 객잔을 빠져나갔다. 불과 일각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두툼한 은자를 주머니째 넣게 된 장삼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오늘 장사는 여기까지 해야겠군."

분타에 오늘 번 은자를 넣고 바로 술 한 잔을 챙겨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쾅!!

문이 열리자,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청년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와 진을 형성했다. 장삼은 그게 제갈 세가 일류 무사들이 펼치는 진법임을 직감하고 두 손을 들었다.

"무, 무슨 일이시오?!"

저벅, 저벅.

하얀 도포를 두른 풍채 좋은 남자가 무사들의 가운데를 가르고 나타났다. 장삼은 남자의 외형을 바탕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떠올렸고,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갈 세가의 가주임을 금방 상기해냈다.

"방금 여기에 이런 남자가 오지 않았나?"

가주는 웬 사내의 용모파기를 들이밀었다. 뱀처럼 눈이 찢어진 남자는 관가에서나 볼 법한 학사를 연상케 했다.

"이런 남자는 들어온 적 없는데...."

"아니면 여인들에 대한 정보를 물은 자는 없었나?! 특히 여섯 봉황에 대한 정보를 사간 이 말이야!"

"그거야-"

장삼은 무사들의 너머에 있는 대로, 불과 조금 전에 나간 산발의 남자를 가리켰다.

"저 남자가 정보를 샀...."

"쫓아라!"

가주의 말에 무사들은 일제히 남자를 향해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무사들의 존재를 진즉에 눈치챈 듯, 경쾌한 몸놀림으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허공답보?!"

하늘을 향해. 장삼은 남자에게는 일부러 팔지 않은 색마에 대한 첩보를 상기했다.

- 여색을 밝히는 남자는 변장이 자유로와 역체변용술을 익힌 듯하며, 누구도 쫓을 수 없는 경신법을 가진 남자라고 하더라.

"씨발...좆됐다...."

은자에 혹한 나머지, 중원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색마에게 여인의 정보를 팔아버리고 말았다. 장삼은 자괴감에 구역질이 치밀어올랐다.

* * *

"어휴, 그래요. 총각! 당예진 아가씨가 얼마나 착한 분인데!"

"오호, 그래요? 그것참 상냥하신 분이겠네요."

순박한 인상의 청년은 여인으로부터 산 꼬치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향신료를 듬뿍 쳐서 구워낸 뱀고기는 독성이 짙었으나, 당가 인근에서 파는 것답게 독은 말끔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근데 총각은 아가씨를 왜 찾는 건가? 보아하니 명문의 자제분 같은데...."

"하하.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세계를 유람하는 중에 아름다운 분에 대한 소문이 들려서요."

청년은 정중한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단순한 노점의 여인에게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건 과례가 아닐까 싶었지만, 잘생긴 총각의 인사를 받은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뱀꼬치를 하나 더 건넸다.

"총각, 내가 총각이 내 아들 같아서 주는 거야."

"아니, 안 주셔도 되는데."

"이런 거 사양하는 거 아니야. 자, 어서 들-"

"여기 있었구나, 이 악적!"

사방에 하얀 도포를 날리는 무사들이 검을 빼 들고 진을 쳤다. 갑작스러운 무사들의 등장에 시장의 상인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피했고, 무사들이 펼친 원진의 중심에 놓인 청년은 태연하게 먹던 뱀꼬치를 마저 뜯어먹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닥쳐라! 네놈의 정체는 이미 파악되었다, 색마!"

"색...?!"

여인은 등에 소름이 돋아 기절할 뻔했다. 명문세가의 후계자를 연상케 하는 청년이 실은 색마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존재에게 속아 신나게 당문의 여인에 대한 걸 떠들어댔다?

"아, 아가씨...!"

"당예진이라고 했던가?"

청년은 뱀고기의 기름이 줄줄 흐르는 나무 꼬치를 들고 무사들을 겨눴다. 나무 꼬치에서 뻗어져 나온 푸르스름한 기운에 무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했다.

"검기!"

"나는 지금부터 당예진 아가씨를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길을 비켜주지 않겠어?"

"닥쳐라, 무림공적!"

하늘에서 암기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끝에 독이 진득하게 발린 암기는 하늘을 덮으며 청년을 덮쳤다. 무사들은 당가 특유의 살상력 짙은 암기를 뿌리며 등장한 노인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독왕!"

"당가의 무사들은 나와라! 제갈가의 무사들과 함께 합공을 펼친다!"

녹색의 장포를 두른 무사들이 튀어나와 또 다른 진을 펼쳤다. 졸지에 수십 명에 이르는 일류 무사들의 포위를 받은 청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무 꼬치로 주변을 가리켰다.

"한 명을 상대로 이렇게 핍박하는 게 어디 있소? 그러고도 당신들이 정파의 인간들이오?"

"네 놈의 세 치 혀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

"독왕 어르신! 놈의 말은 듣지 마십시오! 뱀처럼 간사하기 짝이 없습니다!"

독왕과 제갈가의 가주는 양쪽에서 청년을 압박하며 자세를 잡았다. 청년은 길게 하품을 하며 두 손을 들어 올렸다.

"100대 고수 둘에 두 가문의 무사들이 평범한 청년을 핍박하다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땅에 떨어진 건 네 놈의 양심일 터! 나의 딸을 그렇게 만들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크하하! 나 참. 이보시오, 제갈 가의 가주. 내가 뭐 제갈세가의 여식을 어떻게 하기라도 했는가?"

청년이 비릿한 미소를 짓자, 그에게서 흉흉한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냥 예쁜 꽃이 있길래 꺾은 것일 뿐인데."

제갈가의 가주와 독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중후하고 뒤틀린 내공에 치가 떨렸다. 청년의 내공에는 분명히 제갈가의 내공심법으로 얻은 현묘한 내공이 서려 있었다.

"채음보양! 이 쓰레기 같은 색마 놈! 네놈은 무림 공적으로도 모자라다!

"그건 오해인데. 그것참.... 대화로 해결할 방법이 없군. 그럼 어쩔 수 없지."

위이잉.

청년이 든 나무꼬치에 서린 푸른 기운이 마치 붓처럼 형태를 바꾸었다. 장포를 크게 펼치며 기수식을 취하는 청년의 자세는 제갈 세가의 적통에게만 전수되는 가문의 비전이었다.

"네 이놈!! 나의 딸을 어디까지 능욕할 셈이냐!"

"내가 뭘? 이걸 가르쳐 준 장본인에게 따지시오."

청년은 낄낄 웃으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뱀꼬치의 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갓 구워낸 열기가 따끈따끈 솟아오르는 뱀고기를 씹어먹은 청년은 남은 꼬치를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이 개 같은 새끼!!"

"왜 그러시오? 그냥 먹고 버렸을 뿐인데."

태연한 청년의 말에 가주는 속이 울컥 뒤틀리고 말았다. 거친 잇자국으로 뜯어먹혀 바닥에 나뒹구는 뱀고기가 마치 누군가의 상태를 연상케 하여, 내기의 흐름을 거칠게 만들었다.

"가주! 정신 차리시오! 놈의 세 치 혀에 놀아나서는-"

"당예진. 독왕의 손녀였던가?"

청년은 꼬치끝을 독왕의 목에 겨누며 비릿하게 웃었다.

"꽃을 가지러 왔소."

"죽어라아아아----!!"

두 가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청년을 향해 뛰어들었다. 청년은 낄낄 웃으며 손으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아니지. 꽃 따러 왔다고 해드릴까?"

청년, 색마에게서 흉포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 * *

"흡, 흐끅!"

당예진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옷장에 숨었다. 밖에서는 무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비릿한 혈향은 점차 짙어져 예진의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끼이익.

옷장의 문이 열리자, 온몸에 피칠갑을 한 남자가 초점 없는 얼굴로 당예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 헛걸음했구만. 다 컸다고 하더니...."

"흐, 흐흑, 오, 오지 마세요, 이 악적!"

"......에이, 텄네."

청년은 발목을 움켜쥔 노인의 몸을 벽으로 걷어찼다.

"할아버지!!"

"걱정 마라. 목숨은 붙여놓았으니. 젠장. 근데 이 개고생을 하고...아!"

우우웅.

청년은 당예진의 머리에 손을 올려 기를 불어넣었다. 정체불명의 기가 백회혈을 통해 침투하자, 당예진은 전신이 파르르 떨렸다.

"내기를 불어넣었다. 너는 이제 영원히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 만월이 되는 날...다시 나타나마."

"다, 닥치세요! 당신이 그때까지 살아있을 것 같아요?! 온 천하가 당신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요!"

"크흐흐. 한 번 사는 인생, 좆대로 사는 거지. 이왕 좆대로 살 거면 내 뜻대로 하는 거고. 됐고, 가서 엄마 모셔와."

청년, 색마라고 불린 남자는 낄낄 웃으며 몸을 돌렸다.

"도대체...왜...왜 이런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거예요...?"

"왜냐고?"

색마는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깊게 가라앉은 혼탁한 눈동자는 심연처럼 뒤틀려있었다.

"복수. 무림에서 은원만큼 확실한 동기가 어디 있어?"

"복수를 위해 여인을 범한다니…. 그런게 어디 있어요...."

"여기."

색마는 자신의 가슴을 당당히 두드렸다.

"나는 전 무림의 꽃을 딸 것이다."

[작품후기]

색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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