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마족 (2)
123화.
하기야 현혹이 풀린 후로 처음 느껴졌던 압박감이나, 던전의 붕괴 같은 건 말끔히 사라진 후였으니 저리 뚜까 맞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따.
그러나 놈도 엄연한 마족.
단순히 환상을 보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었는지 구타의 현장 속에서 쩌렁쩌렁한 기합이 퍼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아-!!
"어으… 귀야."
"으으…"
마력을 담은 함성인 걸까.
귀가 먹먹할 정도의 소리에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겼는지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그러며 드러난 짧은 빈틈.
파앗!
[죽인다 인간…!]
그 틈을 비집고 에바리안 자작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놀라운 건 속도도 속도였지만, 의외로 몸에는 그 흔한 타박상 하나 입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그에 최종택이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왜 나한테 와?'
정작 개 패듯 팬 건 그녀들인데, 원망 가득한 눈을 받고 있는 건 그였다.
이건 도발이 쎄도 너무 쎈 거 아닌가.
그래도 어찌보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생긴 것이니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최종택이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파앗! 서걱-!
놈이 지척에 도달하는 것과 동시에 뽑아진 발도.
그림처럼 그어진 검이 허공에 아름다운 일섬을 그리며 에바리안을 베었다. 그리고 그런 일섬을 위에서 내려찍은 왼쪽 검이 마치 십자가와 같은 궤적을 남겼다.
"체위술 가위치기!"
최종택의 전매특허이자 그만의 비기!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간 가위치기는 제아무리 마족인 그라도 피할 수 없어보였다. 놈이 인간형 타입인 이상 말이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꾸드득-꾸득.
"…!"
관절이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이더니 이내 기이한 궤도로 몸을 틀어버렸다. 그리곤 다시 뼈를 맞추며 착지하는 에바리안 자작.
소름이 돋는 회피법에 흠칫 몸을 떠는 틈을 타 그가 손을 찔러왔다.
슈아악-
웬만한 클로보다 날카롭고 튼튼한 손톱이었다.
필히 저 손톱에 가슴을 찔리면 단숨에 심장이 빼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설상가상으로 마기까지 담은 찌르기에 최종택이 급히 검을 회수했다.
"체위술… 정상위!"
그러다 회수하던 검이 중력에 짓눌린 것처럼 빠르게 낙하했다.
무려 수라기를 품은 검이었다. 그대로 위에서 내려찍은 검과 놈의 손이 부딪히자 쩌엉,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파아앙!
"으윽…"[크으으…]
방 전체에 울려퍼질 정도의 충격파에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밀려났다.
얼추 보기엔 엇비슷했지만, 최종택은 알 수 있었다.
'피해가 없어.'
내상을 입은 자신과 달리 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정확히는 상처를 입었으나,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그리곤 곧장 타격을 입은 최종택에게 달려들려했지만, 타이밍 좋게 쏟아진 지원사격에 놈이 쯧 혀를 차며 뒤로 물러났다.
가까스로 한 숨 돌린 최종택이 눈살을 찌푸렸다.
'정신세뇌가 끝이 아니었어.'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놈이 동료들에게 그렇게 뚜까 맞고도 저리 멀쩡할 수 있는지.
'재생능력이 있었다니…'
심지어 그 재생의 폭이 심상치 않았다.
웬일로 일이 술술 풀린다 싶더니,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모습에 최종택이 혀를 내둘렀다.
'일대일로는 내가 밀리는 건가.'
이건 무척 컸다.
무려 풀발 2단계 극의를 사용하고도 대인전 능력이 밀린다는 뜻이니까.
그가 가진 최강의 기술이라 봐도 무방한 상태이니까.
다시 삼도류를 사용할 수 있음 좋겠지만, 아직은 미숙했기에 원하는 순간에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이게 B급이 맞나? 혹시 A급인 거 아냐?'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동료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그중에는 빠르게 힐을 부여하고 있는 백보아도 있었다.
"저 마족, 강해요.""알아요. 못해도 B급 이상… 적어도 저번의 그 몽마보단 훨씬 강해요. A급 던전에 저런 놈이 뜨는 게 말이 되나요?"
"아무리 철갑 던전이라지만 이건 좀… 이상하긴 해."
최종택의 물음에 한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건 길드장님한테도 들어보지 못했다. 제아무리 A급 철갑 던전이라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상황을 파악하는 그들의 모습에 정신을 차린 걸까.
도깨비처럼 일그러져있던 표정이 어느새 평온하게 돌아와있었다.
특유의 백작 느낌의 고혹적인 미남자가 된 에바리안 자작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몽마의 수치라… 그렇다면 그런 놈에게 당한 너는 그 수치만도 못한 남자겠군.]
"쫌생이도 아니고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
[건방진 놈…]
피식 웃으며 받아친 최종택이었으나 속은 타들어갔다.
'저 재생능력이 너무 거슬려. 어떻게 잡아야하는 거지?'
대개 재생능력이 강한 놈을 잡을 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재생속도보다 더욱 빠르고 많은 데미지를 입혀 치유효과를 상회하거나, 재생할 틈도 없이 한 번에 죽일 정도의 화력을 뿜어내거나.
'그런 게 있을까?'
슬쩍 동료들을 본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아… 하아…"
그녀들은 좀 전에 마력을 대부분 쏟아부었는지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티를 안 내려하지만 그의 눈엔 전부 보인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장 지친 건 한지수와 백보아였다.
마나를 많이 잡는 광역기나 버프를 자주 사용한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둘은 앞으론 기껏해야 지원사격 정도나 가능할 터. 그렇다고 예나나 아리아라고 해서 마냥 상태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저 둘보다는 덜 지쳤을 뿐이지 상황이 썩 좋지 못했다.
그렇다고 자신은 멀쩡하냐?
비교적 가장 멀쩡하긴 하지만, 혼자 저 불사신같은 놈을 감당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좆됐네.'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
분명 현혹을 풀 때만 해도 승리가 확정된 것 같았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그 사실이 기꺼운지 에바리안 자작의 미소가 짙어졌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구나. 가여운 인간이여.]
"체위술 폭풍섹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최종택이 쌍검을 휘둘렀다.
양손에 쥔 검이 바람처럼 매끄럽게 움직였고, 이내 거대한 돌풍을 만들어냈다. 바람에 칼날이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은 광경.
파바바밧! 파밧!
서걱- 석-
기습적인 공격에 피할 수 없던 걸까.
수많은 칼날이 에바리안 자작을 베고 지나갔다.
졸지에 폭풍의 중심으로 빨려들어간 에바리안 자작이 허공에 뜬 채 난도질 당했으나, 놈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이름 한 번 더러운 거에 비해 모기 딜이 따로 없구나.]
실제로 놈의 몸에 상처가 나는 족족 다시 아물고 있다.
그러다 가볍게 발을 튕기자 파앙, 하며 공기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돌풍이 멈춘다. 그와 동시에 놈의 신형이 사라졌다.
'…뒤!'
온 신경을 집중하여 놈의 위치를 파악한 최종택이 보지도 않고 뒤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호오…]
빠른 대처에 팔을 베인 에바리안 자작이 감탄을 흘리기도 잠시.
다시금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이번에 나타날 곳은 정해져있었다.
"피해요!"
"어…"
그러나 최종택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에바리안 자작은 이미 백보아와 아리아, 그리고 예나와 한지수의 뒤에 있었으니까. 눈이 마주친 에바리안 자작이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슈악-!
그리곤 휘둘러지는 손톱.
한데 그 손톱에 담긴 마기가 범상치 않다. 어찌나 거세게 휘둘러지는지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대포 소리처럼 터져나왔다.
즉사.
저기에 닿기만 해도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를 위력.
그에 최종택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안전구멍!"
그러자 그녀들의 중심에 검은 구멍이 생겨나더니, 간발의 차로 그녀들을 빨아들였다.
"이게 무슨…?""어떻게 된 거죠?"
무슨 상황이 벌어진지 몰라 멍하니 있던 그녀들이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마족이 바로 옆에 있는데 놈은 애꿎은 주변은 둘러보고 있다.
"저희를 못 찾는 거 같은데요…?"
"어떻게 이게 가능한 거죠?"
이해할 수 없다는 그녀들의 반응에 아리아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안전구멍이에요. 안에서는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이곳을 보거나 간섭할 수 없어요. 안에서도 바깥에 간섭할 수 없고요."
"아하… 종택 씨의 스킬이구나."
"그런 스킬이… 항상 보지만 늘 신기하군요."
감탄하던 예나가 문득 이상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리아 씨는 왜 그렇게 얼굴이 붉죠?"
"…모, 몰라요. 제가 언제 붉었다고 그래욧!? 그, 그보다 저희 때문에 사용한 거 같은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자구요."
당황한 듯 소리치던 아리아가 괜히 말을 돌렸다.
평소라면 심상치 않은 기류를 감지했을 그녀들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순순히 따랐다.
"와…"
"……"
그렇게 본 상황은 굉장했다.
그녀들이 있던 곳 주위로 거대한 발톱자국이 그어져있었으며, 그 모양대로 크레이터가 생긴 건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까.
그런 무지막지한 위력을 뽐낸 것치고 에바리안 자작은 의외로 얌전했다.
그저 가만히 최종택과 마주하고 있을 뿐.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에바리안 자작이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몰라도 잘 숨겼군. 마나가 전혀 감지되지 않아.]
"오이오이, 구멍은 절대안전이라고."
그에 장난스레 맞장구쳐준 최종택이었지만 속은 타들어갔다. 간신히 세이프해서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다면 일행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으리라.
설령 살았다해도 분명 어느 한 곳은 잘렸거나 불구가 되었을 터.
'좀 전에는 힘을 숨긴 건가? 어떻게 이런 힘이…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유독 강한 몽마라 해도 이건 선을 넘지 않았다.
특히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곳이 던전 안이라는 것이다.
'마족들은 던전 안에서는 힘이 봉인된다고 들었는데… 그럼 밖에 나가면 얼마나 강한 거지?'
이게 봉인된 힘이라면 그야말로 밸붕 아닌가.
나름대로 준 S등급에 도달한 최종택과 A등급의 뺨을 치는 동료들이 함께 덤벼도 끄떡도 없다니 말이다.
하나 그건 최종택의 오해였다.
[마족이 던전에서 어찌 그리 강한지 의문인가 보군.]
"……"
부정할 수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자 놈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족이 던전 안에선 힘이 약해지는 건 사실이지. 힘이 봉인되었으니까 말이야.]
"……"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게 뭐 어쨌냐는 듯 눈살을 찌푸리던 최종택이 멈칫한 건 그때였다.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문구에 그가 기겁하듯 눈을 크게 떴다.
'설마 핵을 만졌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