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마족 (1)
122화.
인큐버스.
몽마의 일종으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악마 중 하나. 쾌락을 추구하는 악마로 서큐버스의 남성체라고도 볼 수 있다.
현대인들치고 인큐버스와 서큐버스를 모르는 이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악마.
실제로 저번에 만난 마족도 서큐버스였던 걸 생각하면 친근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놈을 앞두고 긴장을 푸는 이는 없었다.
사아아-
[아무런 답도 없으면 좀 섭한데.]
압도적인 압박감.
가볍게 농을 내뱉는 말투와 표정이지만, 놈의 주위로 뿜어지는 마력은 족쇄처럼 숨을 조여왔다.
그 요망한 백보아마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그녀를 비롯한 일행들 모두 돌처럼 굳어있자 인큐버스의 미소가 조금씩 짙어졌다. 다만, 환한 미소가 아닌 야릇하고 비릿한 미소였다.
[그럼 내가 원하는 대로 해도 되는 건가?]
그런 놈의 말에 그녀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놈은 인큐버스다. 그런 놈이 원하는 대로 한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이전의 몽마를 접했을 때와는 그 근본적인 두려움이 달랐다.
그래서일까.
‘이대로 있을 순 없죠.’
‘방어태세…!’
오히려 정신이 번뜩 든 그녀들이 서둘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어있었다.
꽈악.
“커흑.”
“흑…!”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의 족쇄가 그녀들을 묶어두고 있었으니까.
평범한 족쇄는 아니었다.
몸을 움직이려할 땐 그저 발을 묶는 느낌이었는데, 마력을 끌어올리면 목을 터칠 기세로 조여왔으니까.
달리 말하면 마력만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는 뜻이다.
하나 그들의 직업이 무엇인가.
마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었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리아 정도였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최종택을 향했다.
‘…저 변태마저 속박당한 거야?’
꿈쩍도 안 하고 멍하니 인큐버스를 보고있는 걸 보면 그도 영략없이 족쇄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그와 자신 뿐이건만.
‘저 바보가 뭐하고 있는 거야…!’
그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이대로 두었다간 저 악랄한 놈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데… 혼자서라도 나서야하나?
그런데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그 초조함이 느껴진 걸까.
에바리안 자작의 비릿한 웃음이 한 층 더 짙어졌다.
[마력을 잃은 인간들은 실로 하찮고 보잘 것 없구나.]
그리곤 한 발짝 다가온다.
놈이 여유로운 자태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올 때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단순히 긴장되고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마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콩닥거리고 온몸의 피가 빠르게 순환하는 기분이다. 아드레날린이 분포하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게 심히 불편했다.
그리고 그건 아리아를 비롯한 그녀들 모두 매한가지였다.
‘이게 인큐버스…?’
‘기분 나빠.’
자신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불쾌했고, 또한 두려웠다. 신화에서 인큐버스들이 인간 여성을 상대로 어떤 짓들을 해왔는지 떠오른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그게 결코 신화만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순조롭게 거리를 좁힌 에바리안 자작이 매력적인 웃음을 흘렸다.
스윽.
그리곤 희고 긴 손가락을 펼쳐 천천히 예나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도도한 얼굴이 움찔 떨리며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걱정마라. 내가 진정한 자유를 줄 테니.]
그러며 싱긋 웃는 놈의 얼굴에서 언뜻 최종택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단순한 상상이라기엔 지나치게 현실적인 모습.
심지어 체형이나 골격까지 비슷하게 보인다.
[그저 가만히 몸을 맡겨. 그게 편할 거다.]
“아…”
그에 흔들리던 예나의 동공이 차츰 잦아들었다. 그 대신 약에라도 취한 듯 서서히 풀려가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큐버스라고…?”
[……?]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하나 워낙 조용했던 탓에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그건 에바리안 자작도 마찬가지였고, 이내 그의 시선이 옆을 향했다.
“말도 안 돼.‘
그곳엔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떠는 최종택이 있었다. 한없이 무력한 모습에 에바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봉인을 깨어준 놈이군. 인간이라기엔 이상한 마력을 지니고 있던 놈. 여인들을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무치고 있는가.]
“이럴 순 없어…”
[그럴 만도 하겠지. 하지만 더욱 강하고 매력적인 수컷이 암컷을 취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
실로 악마적인 말이 따로 없었으나 에바리안 자작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저 봐라. 저 놈도 분한 듯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지 않은가.
그 사실이 실로 기껍다는 듯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스으으-
최종택의 피부가 붉어진다 싶더니 그의 몸이 잔뜩 부풀어올랐다. 마치 약물을 투여한 보디빌더 같은 모습에 에바리안 자작이 흠칫하는 것도 잠시.
“아니…”
최종택이 먼저 선수를 챘다. 예고도 없이 휘둘러진 주먹이 안면에 직격했고, 에바리안 자작은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코가 쓰라림을 느끼며 에바리안 자작이 멍한 얼굴로 최종택을 바라봤다.
분명 제대로 속박당해있지 않았던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가 사용한 건 단순한 속박이 아니었다.
‘군단장들조차 자유로울 수만은 없는 권능일텐데…!’
마왕의 측근.
하나의 군단을 이끄는 이들조차 견제하는 권능이 바로 에바리안 자작의 권능이었다.
대상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자신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권능.
이 권능의 무서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원한다면 대상의 마음마저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기적인 권능이었으니까.
그가 최강의 몽마가 된 이유였다.
그는 군단장이 아니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군단을 이끌 수 있는 이였으니까.
한데 그걸 한낱 인간이 풀었다고?
그것도 저리 쉽게?
‘마, 말도 안 된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최종택은 제 감정을 표출하기 바빴다.
“남자는…, 최면 따위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건 남성에 자신감이 없는 이들이나 쓰는 법.”
[뭐…?]
“너는 몽마의 자격이 없다.”
영문없이 안면을 구타당한 것보다 저 말이 더욱 충격이었다.
‘내, 내가 몽마의 수치라고…?’
잠시 그 말을 되뇌던 에바리안 자작의 얼굴이 멍해졌다.
소위 말해 벙찐 모습. 뒤늦게 의미를 파악했는지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차가운 빙판 위에 올라선 듯한 한기마저 느껴질 정도.
[지금 뭐라 했는가…]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
인간이라고는 생각들지 않는 음성에도 최종택은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띠링-
[상태이상 ‘현혹’에 걸리셨습니다.]
[스킬 ‘자신감의 근원’이 발동했습니다.]
[당신은 감히 자신보다 작은 이에게 현혹되지 않습니다.]
솔직히 처음 현혹에 걸릴 때만 해도 절망적이었다.
이전의 몽마 때 겪었던 권능이나 능력들을 떠올리면 이번 인큐버스도 강할 거라곤 생각했다.
심지어 저놈은 그때보다 훨씬 강력하니 더하면 더할 터.
‘현혹은 선 넘었잖아.’
하지만 그래도 현혹은 너무 심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놈에게 홀려 그저 시키는대로 따르는 노예가 되는 정신세뇌 능력.
필히 놈의 권능일 터였다.
그 압도적인 능력에 대응할 수 있는 헌터가 몇이나 될까. 당장 강해진 그녀들조차 아무런 반항조차 못하지 않았나.
그렇게 끝날 줄 알았건만……
‘자신감의 근원에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스킬로 그 사기적인 권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저 한층 더 우람해지는 게 끝인 줄 알았던 능력이 실은 정신세뇌 계열 능력을 방어해주는 스킬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러면 SS등급 하고도 남지.’
역시 SS등급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최종택의 눈에 당혹스러워하는 에바리안 자작이 들어왔다. 언뜻 보아도 자신보다 키가 크다.
그에 씨익 웃은 최종택이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인큐버스라더니 작나봐?”
그러며 힐끔 시선을 내려 한 곳을 바라보자 에바리안 자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연하지만 부끄러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마치 둘도 없는 치욕을 들었다는 듯 분노로 험상궂게 일그러져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도깨비의 형상을 띈 그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감히…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보다 큰 수컷이 암컷을 차지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 않았나? 찔리나봐?”
[이익…! 죽인다!]
오늘도 훌륭하게 도발 스텍을 쌓은 최종택.
고삐 풀린 황소처럼 달려드는 에바리안 자작을 보는 그녀들의 표정에 언뜻 연민이 스쳐지나갔다.
늘 느끼지만 최종택과 같은 팀이라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퍼엉! 푸슈슉!
급소를 찌르고 날아오는 화살과 낙뢰가 에바리안 자작을 강타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화르륵.
낙뢰에 잠시 멈칫한 그의 주위로 떠오른 도깨비불이 반짝 빛나더니, 이내 걷잡을 수 없는 화마가 되어 놈을 집어삼켰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후끈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
파앙!
하지만 에바리안 자작의 분노를 막을 정도로 뜨겁진 못했는지, 이내 그 열기를 뚫고 튀어올랐다.
그런 놈의 목표는 최종택.
그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모습에 최종택이 작게 감탄을 흘렸다.
‘도발 한 번 제대로 걸렸네.’
정 안 되면 자박꼼표 도발이라도 써야하나 싶었는데 거기까진 필요없을 듯했다.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긴 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상당히 빨라.’
단순히 정신세뇌가 전부가 아닌지 놈의 맷집과 속도가 범상치 않다.
그에 최종택이 검을 뽑아들 때였다.
스으-
“어?”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치 노을을 등지고 그림자가 지듯 순간 어두워진 시야속에서 거대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콰아아아앙!
위에서부터 수직으로 내리꽂힌 주먹이 에바리안 자작을 직격했다.
바닥이 움푹 파일 정도의 위력. 이번만큼은 무시하고 들어올 수 없었는지 에바리안 자작의 움직임이 멈췄다.
시야를 가릴 정도의 연기 너머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우리를 현혹시켰겠다!”
“본때를 보여주자구요!”
듣기만 해도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
하지만 그녀들은 단순히 호기롭게 소리치는 걸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곧이어 수많은 화살과 낙뢰, 그리고 청염이 피어오른 것을 보면.
화르륵- 화악! 푸우욱!
사방에서 화살비가 빗발치고, 하늘에선 한줄기 낙뢰가 내리꽂히며 지상에선 거대한 화마가 들끓었다.
그 사이사이 들려오는 묵직한 타격음.
정신없이 쏟아지는 공격을 보며 최종택이 뽑아들던 칼을 도로 집어넣었다.
“…음.”
개패듯이 맞는다는 게 저런 걸까.
아직 연기도 안 걷혔는데 진짜 미친 듯이 공격이 쏟아진다. 예로부터 여자의 한이 그리 무섭다더니…
‘뭔가 미안한데.’
이것이 작은 남자의 말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