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현무 던전 (2)
118화
그후로도 사냥은 계속되었다.
한데 신기한 건 거의 2시간이 지나도록 최종택 일행은 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어려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서걱- 석-
----!
"원킬, 투킬! 다들 누가 더 많이 잡나 내기할래요?"
"좋아요. 꼴등이 1등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콜!"
난이도는 쉽다 못해 누워서 떡 먹기나 다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산성 슬라임이 까다로운 이유가 물리공격이 통하지 않는 체질에, 강력한 독성 때문인데 최종택과 일행들은 그 성질을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각종 방어를 무시하는 유령시와 그에 준하는 수라기.
독을 흔적도 없이 불태우는 청염의 지배자, 그리고 독성을 완벽하게 방어해주는 수호신의 가호까지.
여기에 백보아의 특제 버프까지 더해지니 산성 슬라임들이 당해낼 리 만무.
특성이 사라진 산성 슬라임은 한낱 슬라임과 다를 게 없었고, 복날 개 패듯 두드려맞을 수밖에 없었다.
거의 2시간에 달하는시간동안 최종택과 일행들은 종횡무진으로 몬스터들을 쓸어담았다.
어찌나 빠른지 리젠되는 속도보다 처치하는 속도가 더 빠를 지경.
그 무지막지한 속도에 위화감을 느낀 것일까.
쿠구구구-
위가 한 번 크게 흔들린다 싶더니 천장에서 산성을 폭포처럼 쏟아냈다.
몇 번이나 경험했던 패턴.
랜덤으로 지정되는 안전지대에 들어가지 않으면 온몸이 녹아내리는 위험한 패턴이었지만, 그들은 능숙하게 대처했다.
"수호신의 가호 들어갑니다!"
"미다스의 증명!"
아리아의 보호막과 백보아의 강화 버프까지 들어가자 맨몸으로 산성을 맞아도 끄떡없는 금강불괴가 탄생한 것이다.
비록 잠깐밖에 버티지 못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몸을 감싼 방어막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액을 보며 여유롭게 안전지대에 도달한 최종택이 불쑥 물었다.
"다들 몇 마리잡았어요? 전 열 여덟마리 정도 잡은 거 같은데."
그 물음에 한지수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음, 처음부터는 잘 모르겠고, 내기 시작한 후부터면 열 네 마리 정도 잡은 거 같아."
"전 열 두 마리 잡았습니다."
"흐음, 저는 버퍼니까 필요없죠? 그래도 일단 말하자면 다섯 마리 정도?"
그녀를 이어 줄줄이 답하는 예나와 백보아를 보며 아리아가 기겁했다.
"으익! 다들 그렇게많이 잡았다구요?"
"왜, 넌 몇 마리인데?"
"저, 저는… 일곱 마리… 이익! 이건 반칙이에욧! 저는 탱커잖아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이다 말고 그녀가 대뜸 소리를 지른다.
무슨 지킬 앤 하이드도 아니고. 이중인격과도 같은 모습이었지만, 사실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었다.
딜러인 일행들보다 탱커인 아리아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으니.
오히려 저 정도면 선방한 셈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일행들을 보는 이재희의 시선에는 놀라움이 가득했다.
'다들 생각보다 더 강해.'
종택이야 S급 유망주였고,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강할 건 예상했다.
하지만 설마하니 저 정도일 줄이야?
이제 어딜 가도 대우받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자부하는 그녀였지만, 저들의 강함이 결코 자신 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엘리트 교관 출신이었던 예나야 어느 정도 이해한다치지만,
'저 아리아라는 탱커. 능력이 상당해. 전체광역 쉴드에 데미지 감소 효과까지 있다니… 기본적인 방어력도 튼튼한 편이고, 도발도 탄탄해.'
심지어 딜이 약한 편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본적인 공격력은 약했지만, 간혹가다 거대해진 팔로 몬스터를 쓸어담을 때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데미지가 나왔다.
짧지만 순간 폭딜만큼은 웬만한 딜러들에게도 밀리지 않은 수준.
예나나 자신에 비해 지속적인 딜링이 적어서 내기에서 밀렸을 뿐, 순간 폭딜이나 단단한 방어력을 생각하면 무서운 상대임이 틀림없었다.
과연 승급시험 때 유망주로 취급받던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저 백보아라는 여자… 대체 뭘 하던 사람이지?'
둘은 이해가 되지만, 그녀는 모든 면에서 의문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여자인데, 지금껏 봤던 그 누구보다 신성력이나 버프가 뛰어나다.
그녀의 힐은 다른 힐러들과 차원이 달랐고, 버프 또한 단순 계산으로도 몇 배는 강력하다.
심지어 뒤에서 보조 딜러 역할까지 해주니 그야말로 만능 버퍼인 셈.
'길드장님과 비견되는 외모도 그렇고, 저런 능력자가 눈에 안 띄었을 리가 없는데… 길드장님에게 보고해야겠지?'
아무래도 협회에서 숨겨둔 비밀병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보고하라했으니 길드장님에게 보고해야 마땅할 일.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대단한 건 역시 최종택이었다.
'한층 더 강력해졌어.'
이전에도 강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차원이 다른 강함이었다.
사실 자신이 A등급이니 준 S등급까지 가지 않았을까 추측하긴 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지 않아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왜 길드장님이 그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된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에게 시선이 쏠리곤 했다.
'그리고…'
그덕에 그의 전투를 자세히 볼 수 있었는데 여러 가지로 충격이었다.
'한층 더 병신같아졌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바지춤에서 거대한 기운이 집약되더니 이내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섬광을 쏟아내던 그의 모습이.
자신의 청염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위력이었다.
이전에 멘티스를 잡을 때도 특이한 아이이긴 했지만, 지금은 특이함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런데도 능력만큼은 확실한 게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무슨 능력인 걸까?'
모르긴 몰라도 결코 평범한 능력은 아니리라.
한층 더 강해진 병신미에 정신이 혼미해진 그녀가 멍하니 최종택을 바라봤으나, 그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아리아와 투닥대기 바빴다.
"꼬우면 내기를 하지 말았어야지. 다 너의 선택 아니겠어?"
"이, 이 비겁한 사람! 그렇게 소원이 받고 싶어요?"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꾹 닫는 아리아.
억울함 가득한 모습에 최종택이 씨익 웃자 발끈한 아리아가 휙 고개를 돌린다. 그러다 백보아와 눈이 마주치더니 먹잇감을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다급하게 입을 연다.
"그, 그럼 보아 씨도 저랑 똑같이 기준 잡아야죠! 왜 탱커는 껴놓고 버퍼는 빼욧! 심지어 보아 씨는 딜 지원도 되는데!"
급히 생각한 것 치곤 제법 논리적인 발언.
원래대로라면 그녀의 말이 맞지만, 왠지 백보아와의 내기는 껄거름했기에 최종택이 급히 반박에 들어갔다.
"야, 보아 씨는 일부러 최대한 버프에 신경 썼는데 빼야……"
"어머, 저는 소원 들어줘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요? 뭐든 들어줄게요."
하나 그 반박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보아가 끼어들었다. 이년은 왜 편을 들어줘도 난리인가 싶어 쳐다보니 눈이 마주친 그녀가 생긋 미소 짓는다.
한데 왜일까. 그저 미소 짓는 것뿐인데도 고혹적이게 느껴진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때마침 방어막을 타고 흐르는 폭포가 한층 강해지며 땅이 살짝 흔들렸다.
"으힉! 이번 위액은 너무 오래걸리네요."
"그러게요. 다들 괜찮아요? 안전지대에서 안 빠져나갔죠?"
"멀쩡해요."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안부를 묻는 그녀들과 달리 백보아는 중심을 잡지 못했는지 휘청였다.
반사적으로 그녀를 잡아채자 백보아가 생긋 미소짓는다.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요."
한데 너무 갑자기 잡아챈 탓일까.
껴안기다시피한 그녀의 가슴이 팔뚝에 닿는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 치마 사이도 허벅지에 딱 붙어있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 시선이 느껴진 탓일까.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레 한 발짝 물러난 그녀가 씨익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혹시 꼴리셨나요?"
"…아닙니다만."
"흐응…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며 특유의 묘한 얼굴로 빤히 쳐다보는데 그 시선이 어찌나 야릇한지 엄한 곳에 힘이 들어갔다.
슬쩍 눈길을 돌려 일행들을 확인한 그녀가잠시 멈칫했다.
"어…"
"아."
얼굴을 붉히며 이쪽을 빤히 보던 한지수와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깜짝 놀랐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면서도 힐끔힐끔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백보아가 묘한 얼굴을 하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스윽.
그리곤 보란 듯이 최종택에게 상체를 들이밀며 가까이 다가갔다.
살짝만 앞으로 다가가도 입술이 닿을 거리. 돌처럼 굳은 최종택을 보며 싱긋 웃은 백보아가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인다.
----
"……!"
그러자 최종택의 눈이 커지더니 꿀꺽 침을 삼키는 게 보인다.
덩달아 한지수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뭐, 뭐야. 무슨 말을 한 거야?'
뭔지는 몰라도 최종택의 반응을 보니 심상치 않은 말인 듯하다. 궁금해죽겠는데 차마 물어볼 수도 없고.
그녀가 끙끙 앓고있는 사이 최종택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망한년.'
처녀비치 출신이라 확실히 남자를 홀릴 줄 안다.
예나나 아리아에게서 평소엔 느끼지 못하는 꼴림이랄까.
덕분에 주니어도 왜 자신감의 근원인지 이해가 될 정도로 잔뜩 성이 나 있다.
'이번엔 풀발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아무리 풀발의 달인인 그라도 항시 유지하려면 집중할 필요가 있었는데 지금만큼은 아무 신경 안 써도 될 것 같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을, 그리고 한지수는 그녀 나름대로 심각해하고 있을 때였다.
띠링-
[위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수호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 떴어요."
"어, 떴다. 다들 전투준비하죠!"
경쾌한 알림음이 울림과 동시에 끊임없이 쏟아질 것 같던 위액이 차츰 멎어가기 시작했다.
암막커튼이 겆히듯 서서히 드러나는 세상을 보며 최종택을 비롯한 일행들이 재빨리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건 심란해하던 한지수나 최종택도 마찬가지였다.
'앗, 하필이면 이럴 때…'
'어떻게 생긴 놈일까? 이번에도 슬라임이려나?'
만약 또 슬라임이면 기대이하일 것 같은데.
신박한 구조의 던전 타입 때문에 즐겁기는 하지만, 2시간 넘게 슬라임만 잡아댔더니 슬슬 지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기원이 통한 것일까.
[안전지대가 해제됩니다.]
[수호자가 당신을 적으로 인지합니다.]
시야를 가리던 위액 장막이걷히며 드러난 수호자는 산성 슬라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