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현무 던전 (1)
117화.
"아, 감사합니다."
점검을 마친 지원팀이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보고를 올렸다. 그에 적당히 대답해주자 이마에 손날을 올리곤 꾸벅 허리를 숙여보인다.
그리곤 절도 있게 물러나기까지.
군대 생활 한 번 기깔나게 잘 할 것 같은 그들을 보며 최종택이 멋쩍게 미소지었다.
'눈 굴러가는 거 다 보인다.'
보고를 올릴 때부터 물러나는 순간까지도 힐끔힐끔 동료들을 보는 게 눈에 훤히 보인 탓이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일행들은 연예계에 뛰어들어도 대성할 만큼 외모가 뛰어났으니까.
당장 이번에 끼게 된 한지수도 웬만한 배우보단 이쁘니 말 다한 셈이다.
'그러고보니 옛날에는 그 신서희도 그렇게 예뻐보였는데…'
그녀가 못생긴 건 아닌데 아무래도 격의 차이가 심하긴 하다.
E스포츠로 치면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랄까. 오랜만에 그녀를 떠올리던 최종택이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보니 어느순간부터 연락이 끊겼네.'
한동안 끈질기게 연락했던 것 같은데 어느순간부터 잠잠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지금 3명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니까.
'그래도 어떻게 지내는지는 궁금하네. 나중에 교관님한테 물어볼까?'
그녀가 맡은 학생이기도 하니 잘 알지 않을까 싶다.
예나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한 그가 이내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눈앞의 던전이 중요했다.
"그럼 이제 입장해볼까요?"
"좋아요."
"흐으. 좀 떨린다."
"어? 지수 너도 철갑 던전은 처음이야?"
"응, 당연하지. 워낙 희귀한 던전이기도 하고 나도 던전 경험이 막 엄청 많지는 않아서."
이건 꽤 의외였다.
사신 길드에서 양보해준 던전이니 당연히 경험이 많을 줄 알았는데. 던전을 돌다 막히는 게 있으면 물어보려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알아내야할 듯하다.
'역시 직접 뚫는 게 제맛이지.'
그 사실이 불안함보다는 설렘으로 자리잡은 최종택이 씨익 웃었다.
이게 얼마만의 설렘인지. 최근 여자에게만 설래서 그런가 오랜만의 흥미로운 던전이 그리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던전에 발을 들이밀었을 때였다.
파직-
"어?"
온몸에 정전기라도닿은 듯 짜릿한 감각이 퍼졌다.
워낙 짧게 치고 빠진 탓에 긴가만가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느껴졌다.
게이트에도 정전기가 일어나나?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은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 겪는 상황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작은 손바닥이 등을 민다.
"안 들어가구 뭐해여."
"아…"
아리아였다.
이상하다는 듯 올려다보는 그녀와 일행들을 보던 최종택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흠. 이상한 사람… 그럼 들어가요."
"알았어, 재촉하지마."
천천히 등을 미는 그녀의 반동력으로 던전 안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정전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착각이었나?'
분명 짜릿하게 뭔가 지나갔었는데…
다소 찝찝함을 안고 던전 안으로 들어갔으나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걸 느낄 정신이 없었다.
"으허억!"
"흐익!? 흐기야아악!"
"꺄악!?"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몸이 꼬꾸라진다 싶더니 낙하하고 있었으니까.
빨간 속살이 원통 모양으로 주변을 감싸고 있고, 밑에선 바람이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가 내뱉어지고를 반복했다.
딱 설명을 들었던 그대로의 모습.
그러나 최종택의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슈아악-!
'아니, 들어오자마자 낙하한다고는 말 안 했잖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걸 혼자 누릴 수 없다는 마인드가 틀림없다.
어쩐지 탐사팀이 유독 눈치를 보더라니…!
그렇게 꼼짝없이 낙하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 일 분가량이지만 체감상 영겹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저 밑에서 보이는 붉고 푹신한 무언가를 보며 최종택이 소리쳤다.
"바닥이에요! 다들 자세잡아요!"
"흐이익!"
그 외침에 아리아를 비롯한 일행들이 팔을 휘적거리며 자세를 잡았다.
그렇게 지면에 발이 닿으려는 순간.
질끈.
최종택과 일행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한데…
또옹- 퐁.
"으잉?"
무언가 이상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소리와 감각에 최종택과 일행들이 슬며시 눈을 떴다. 그러자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보였다.
하늘이 붉으면 이러할까.
거대한 고급 침대 위에 있는 듯 푹신한 바닥과 마찬가지로 푹신해보이는 벽면. 그리고 붉게 물든 천장까지.
옅게 보이는실핏줄이 없었다면 몬스터의 몸 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풍경이었다.
'이게 철갑 던전…'
어째서 현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것 같다.
이렇게 거대하고 웅장한 내부를 가진 거북이가 현무 말고 또 있을까. 주변을 둘러볼수록 그저 감탄만 나온다.
"와… 생각했던 것보다 예쁘네.엄청 징그러울 줄 알았는데."
"그러게요… 생각보다 예쁘다."
이 순간만큼은 다들 같은 감정인지 그녀들도 감탄을 토해내고 있다.
백보아도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 희고 고운 손으로 벽면을 천천히 쓸어내리고있는 걸 보면. 그렇게 가볍게 한 번 훑었을 떄였다.
찰박- 찰박.
"…!"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백보아가 황급히 손을 떼고 신속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춘 최종택과 일행드리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봤다.
'근처였어.'
예상대로 소리의 주범은 금방 나타났다.
찰박찰박.
초록색 액체로 이루어진 사람의 형첵라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고 있다.
정확히는 형체를 형성했다가 녹아내리고를 반복한다.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액체괴물과 굉장히 흡사한 생김새.
설명만 보면 징그러울 조건을 모두 갖췄으나 놀랍게도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냉철했다.
"아무래도 위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 거 같네요."
차가운 예나의 말에 최종택이 검을 바로쥐며 수긍했다.
위로 떨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타고 온 입구가 기도가 아닌 식도라는 뜻.
'운이 좋네.'
사실 좋은 상황은 아니다. 폐에서 시작하는 것보다 위로 시작하는 길이 몬스터가 훨씬 많이 나오니까.
심지어 물리공격 위주인 그들 파티로선 슬라임계의 몬스터에게 취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베스트 시나리오였다.
새로 얻은 힘과 합을 테스트하기 가장 좋은 스타트를 밟은 것이니까.
"하나 둘… 넷, 열둘. 겁나 많네."
많긴 하나 못 잡을 건 없다.
어떻게 요리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슈욱!
대뜸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놈들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정확히는 꿰뚫은 게 아니라 몸을 통과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화살이 몸을 모두 통과했을 때는 처참하게 녹은 후였다.
"산성 슬라임이네요."
B등급 이상의 던전에서만 서식한다는 슬라임.
강한 산성을 띈 탓에 근접 타입과 물리 타입 헌터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는 놈들이었다. 물리공격이 주를 이루는 최종택 일행에게 있어 최악의 상대.
하지만,
"먼저 들어갈게요!"
"어어?"
뭐라 만류할 새도 없이 총알처럼 튀어나간 아리아가 냅다 방패를 들이박았다.
확실히 이전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여섯 마리나 있는 곳에 단신으로 들어간 건 무모했다.
'저러다 방패 녹으면 어쩌려고…'
제아무리 단단한 그녀라도 분명 타격이 있을 터.
하나 상황은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수호신의 가호!"
그녀의 외침에 맞춰 신성한 빛이 뿜어지더니, 이내 얇은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반투명하게 감싼 것이다.
그러자 흔적도없이 녹일 듯 휘감아오던 슬라임들이 바깥으로튕겨나갔다.
파앙!
----!
우르르 모여있던 놈들이 주변으로 흩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순식간에 포지션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아리아가 씨익 미소를 지은 순간. 후웅, 거대해진 그녀의 주먹이 바닥에 내리꽂혔다.
---!!
당연히 물리공격인 만큼 피해는 없었지만, 슬라임들의 형체를 뭉개기엔 충분했다.
그에 반응하듯 소리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는 슬라임들.
진형붕괴에 이은 어그로까지 완벽한 탱킹이다.
'저게 새로 얻은 스킬들인가.'
보호막과 광범위 공격기술이라… 제법 궁합이 좋다.
심지어 저 보호막은 혼자만 받는 게 아닌지 파티원 모두에게 개인별로 보호막이 씌워있다.
'진 아리아는 다른 것인가.'
이전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기다렸다는 듯 쏘아진 속사가 슬라임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슈슉! 슉!
---------!!
한데 이번에는 녹지 않고 정확히 놈들의 몸에 구멍을 내는 게 아닌가.
유령시의 방어무시 효과 때문이었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의 특성을 무시해버리는 사기 스킬.
거기에 약점을 보는 샤프아이와 백보아의 특제버프까지 있으니 그 시너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리라.
팡! 팡!
'시원시원하네.'
저리 원샷원킬 낼 기세로 놈들을 터트리는 것도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만 지나도 금방 끝낼 수 있을 정도의 위력. 하지만 공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화르륵-
어둠을 밝히는 도깨비불처럼 슬라임들의 주변으로 피어오른 불씨가 따악, 하는 소리를 신호삼아 거대한 화마가 되었다.
푸른 불꽃이 놈들을 집어삼키는 와중에도 아리아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는 세밀함까지.
화려한 스케일과 정확도에 최종택이 감탄을 흘렸다.
'다들 장난 없네.'
언제 이렇게 세진 거지?
농담이 아니라 이재희가 애먹은 것도 납득이 된다.
아마 자신이 빠진다해도 지금 이 맴버로 다시 붙으면 이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니까.
그만큼 탱이면탱, 딜이면 딜, 보조면 보조. 모든 밸런스가 완벽했다.
'이대로 손가락만 빨 수는 없지.'
남자가 모름지기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않겠는가.
들러리가 될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최종택이 불길에서 도망치는 슬라임을 향해 컬을 겨눈채 땅을 박찼다.
파앙!
공기가 진동할 정도의 속도. 순식간에 도망치던 슬라임 세 놈의 사이로 파고든 그의 주위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
그에 슬라임들이 멈칫한 순간.
서걱- 석-!
최종택의 검이 유려하게 움직였고, 슬라임들이 자각했을 땐 이미 몇 번이나 베인 후였다. 반박자 늦게 검의 궤적대로 그림을 그리는 수라기.
철컥.
"절정하라--
세련된 검무가 끝나고 매끄럽게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최종택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애무…!"
푸화아아아악!
--!!
그러자 거짓말처럼 놈들이 동시에 초록 액체를 분수처럼 뿜어냈다. 검은빛과 초록빛이 함께 어울어진 광경은 꽤나 아름다웠고, 최종택은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존나 멋있어."
"아……"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리아와 예나가 이마를 탁 집었다.
어딜 내놓아도 부끄러운 그의 모습에 절로 리액션이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 힐끔 한지수를 바라봤으나 다행히 그녀는 전투에 집중하느라 보지 못한 눈치였다.
그에 최종택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에잉, 봤으면 분명 반했을 텐데.'
…이걸 다행이라해야할지 아니라해야할지.
그녀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종택은 다시 사냥에 집중했고, 빠른 속도로 산성 슬라임들이 녹아내렸다.
한 명 한 명이 큰 전력을 뽐내고 있는 상황.
때문에 그들은 보지 못했다.
스으으-
그들이 집중해서 싸우는 동안 천장이 잠시 검게 물들었다 사라졌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입장한 후부터 게이트가 조금씩 검게 물들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