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네가 왜 여기서 나와? (2)
115화.
뭔가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기분이다.
한동안 못 본 사이 장난끼가 짙어진 것도 같고…
잠시 이게 어찌된 일일까 고민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나중에 알게 되겠지.”
어차피 중요한 일이면 그녀의 말대로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거여도 금방 장난이었다며 본론을 꺼내주지 않겠는가.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부족한 잠을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 왔어?”
“……?”
다음날 회의실에서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다.
너무 어이가 없으면 오히려 할 말을 잃는다고.
비슷한 맥락으론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멍해지는 것과 같았다. 그런 면에서 지금 최종택은 그 어느 때보다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
“응? 내가 생각한 반응이 아닌데… 별로 안 놀랐나?”
눈앞에서 손바닥을 흔드는 한지수를 보고도 최종택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으니까.
최종택이 정신을 차린 건 몇 초가 더 지난 후였다.
꿈틀.
“어? 반응했다.”
눈썹을 꿈틀거리는 그를 보며 한지수가 신난 듯 장난끼 어린 미소를 짓는다. 그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며 최종택이 소리쳤다.
“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음… 그야 오늘 너랑 같이 던전을 가기로 했으니까?”
“…왜?”
“섭하네. 나랑 가는 게 그렇게 싫어?”
그러면서 시무룩해하는데 묘하게 가슴이 찔린다.
누가 대학 남자들 모두의 우상 아니었을까봐 남자 홀리는 실력이 여간내기가 아니다. 놀라운 건 저걸 자각하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얘교가 몸에 밴 여자들이 있는 것처럼 그녀도 저런 모습이 몸에 밴 것일 뿐.
‘누가 대학 여왕님 아니랄까봐.’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하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성숙해진 분위기가 새롭게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자 적당히 솟은 가슴과 함께 그녀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작고 하얀 얼굴에 토끼처럼 큼지막한 눈, 오똑한 코와 물방울 같은 콧망울에서 청순함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눈 밑에 박힌 눈물점이나, 코 옆에 난 점이 묘하게 남자를 자극한달까.
좀더 밑으로 내리자 몸매를 돋보이는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색 H라인 치마가 들어온다.
붉은 머리카락이 다소 날라리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살짝 와인빛이 돌아서인지 얼굴이 청순해서인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들어갈덴 들어가고 나올 덴 나온 몸매.
그러면서도 기본적으로 슬랜더 타입이라 예나와 얼추 비슷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분위기가 전혀 다른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어찌됐든 남자 여럿 홀리기에 충분한 얼굴이었다.
‘더 예뻐진 것도 같고? 아, 등급이 올랐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강해질수록 예뻐지는 헌터의 특성상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리아도 더 예뻐보인 것도 그것 때문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세요? 저흰 안 보이나요?”
고개를 돌리니 뽀로통한 아리아가 보인다.
평소처럼 징징 모드를 발동하려는 모습인데 오늘은 놀랍게도 예나도 함께였다.
도도한 척 연기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가나 입술이 어딘가 심통이 나있는 걸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백보아가 묘한 눈으로 아리아와 한지수, 그리고 최종택을 둘러보고 있고.
마지막으로 그런 그녀들을 한지수가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음.’
이건 제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도 기류가 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 아는 얼굴들이구만.’
최근 그가 한 행보가 있었으니까.
어제 연락도 제대로 확인 안 했으니 아리아가 오늘 유독 심통이 나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상외로 백보아가 침착하긴 한데…
‘저년 성격을 생각하면 오히려 불안하단 말이지.’
지금도 흥미롭게 바라보며 미소짓는데 눈이 웃고있지 않다. 묘하게 살발한 느낌에 최종택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한지수가 바짝 다가온다.
“헐, 왜 대답 안 해줘? 나랑 하는 게 싫은 거야? 난 그때 좋았는데. 우리 되게 잘 맞았었잖아.”
“아니…”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지 않겠니?
실제로 두 쌍의 시선이 양쪽 관자놀이에 꽂히는 게 느껴진다. 억울함과 당혹스러움에 잠시 할 말을 잃었는데 생각해보니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꼭 오해만은 아닌가?’
어찌됐든 던전을 돌고나서 불방망이 맛을 보지 않았던가.
어쩐지 여자친구에게 내연녀를 들킨 듯한 기분에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입 다물고 있자.’
이럴 땐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다행히 그 판단이 맞았는지 상황을 지켜보던 협회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이번 던전이 사신 길드에서 양보한 거라 정보공유 겸 지원을 보냈네. 자네와 인연이 깊은 친구라고 들었네만… 듣기로 같이 던전도 돌았다지?”
A급이나 되는 던전을 어디서 구했나 했더니 사신 길드였나?
왜 양보해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로선 잘된 일이었다.
심지어 이번 탐사에서 한지수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이라니 오히려 추가전력으로 봐야하는 셈.
다만…
“아… 뭐, 맞긴 한데… 갑작스러워서요.”
“음? 얘기를 못 들은 겐가? 내 아리아에게 꼭 전달하라 했는데……”
“……”
범인은 아리아였나?
저도 모르게 홱 돌아보자 아리아가 찔렸는지 눈을 피한다. 절대 까먹은 게 아니라 일부러 말 안 했다고 광고하는 듯한 반응.
‘허.’
그 모습이 귀엽긴 한데 황당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숨길 게 따로있지 굳이 저런 걸 숨겨서 어디에 쓴단 말인가? 어차피 같이 파티를 돌면 알게 될 건데.
한데 그리 생각하는 건 최종택뿐인 모양이다.
끄덕끄덕-
뭐가 맞다는 건지 예나와 백보아가 아리아를 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마치 어릴적 참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던 담임 선생님 같다.
어쨌거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수랑 같이 파티를 짜라는 말씀인가요?”
“응, 계속 그러는 건 아니고 이번 한 번만. 너가 싫다하면 어쩔 수 없구.”
“중요한 건 자네 의견이라고 얘기해놨으니 거절해도 상관없네. 사실 아리아에게 의사를 꼭 물어보라 당부했는데…이렇게 될 줄이야 미안하네.”
거절해도 상관없다며 흔쾌히 말하는 한지수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협회장까지.
이쯤되면 거절하는 게 나쁜 놈 아닌가.
‘뭐, 지수 정도면 괜찮지. 어차피 테스트 목적이 컸으니까.’
그리고 던전을 양보해준 것도 사신 길드라는데 받아주는 게 예의 아니겠는가.
판단을 마친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고마워해야할 수준인데요 이 정도면. 그리고 지수 정도면 능력 있기도 하고… 모르는 남보다야 훨 나으니까.”
“헤에… 준 S급 랭커한테 칭찬 받았다!”
그 와중에도 순수하게 기뻐하는 그녀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한데 보다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최근에 깨달음이 있었다했지?’
과연 무슨 깨달음이 있었길래 순식간에 A등급까지 치고 올라왔을까.
비록 처음부터 희귀한 자연계 A등급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곤해도, 멘티스에게도 쩔쩔매던 게 그녀였다.
최종택이야 워낙 사기적인 루트를 탄데다 풀발 빨이 컸고.
‘저 정도 성장세면 웬만한 랭커들 급 성장세 아닌가?’
불과 몇 개월만에 몇 계단을 올라간 거니 하이랭커까진 아니라도 상식외의 속도였다.
‘잠깐 봐볼까.’
이럴 땐 역시 엿보기 구멍이지.
잠시 그녀의 눈치를 보던 최종택이 속으로 중얼거리자 상태창이 떠올랐다.
[한지수]
[성별 : 여]
[나이 : 24]
[등급 : A]
[레벨 : 41]
[능력치]
[근력 : B (60 / 100)], [민첩 : B (80 / 100)]
[체력 : A (0 / 100)], [마력 : A (85 / 100)]
[상태 : 반가움, 기분이 묘함.]
[특이사항]
[낙성대 퀸카가 헌터를 숨김]
[S등급 스킬 ‘청염의 지배자’ 보유.]
……
[A등급 스킬 ‘화형’ 보유.]
‘오?’
그렇게 나타난 상태창은 기대이상이었다.
‘생각보다 엄청 세졌잖아?’
근력과 민첩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그리 낮은 편도 아니고 마력의 경우는 최종택과 거의 비등할 정도였다.
S등급 스킬과 A등급 스킬도 생겼고.
‘청염의 지배자? 저번에 그 불의 지배자 스킬이 진화한 건가?’
성장 스킬이니 언젠가 진화할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개화할 줄이야.
심지어 청염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속성이기도 했다.
‘흑염의 지배자 에나도르가 도시 하나를 불태울 수 있다고 했지?’
물론 그는 하이랭커 중 하나인 만큼 마력이나 숙련도가 넘사벽이긴 하겠지만, 달리 말하면 한지수에게도 그럴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재능 있는 친구라곤 생각했지만 기대이상이다.
‘이 정도면 교관님이나 피카츄한테도 안 꿇리겠는데? 조합도 상당히 괜찮고.’
사실 최종택 일행에게 부족한 건 후방지원이었다.
낮은 등급에선 모를까 고위 등급에서까지 예나 혼자서 원거리 딜러와 지원사격을 맡기에는 벅찬 감이 있었으니까.
물론 이번에 각성한 이후로는 모르는 일이지만, 후방을 맡아줄 사람이 늘어서 나쁠 건 없었다.
‘일단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돌 던전이 중요했다.
너무 쉬운 던전은 의미가 없으니.
A등급이나 되는 던전이 쉬울 확률은 적지않냐 할 수도 있지만, A등급이라고 다 같은 A등급이 아니었다.
사실상 B등급 위의 대부분 난이도가 A등급으로 분류되는 것뿐이니까.
난이도가 몇 배나 차이가 나든 규격외인 S등급 외엔 모두 같은 범위에 드는 것이다.
물론 +나 -와 같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검의 무덤도 A등급이었지.’
던전의 특성상 그건 정말 의미없는 표기였다. A등급이었던 검의 무덤이 웬만한 A+등급보다 난이도가 높았으니까.
그 생각을 눈치챘는지 협회장이 다소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번 던전은 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