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채유린 (2)
103화.
고양이처럼 뾰족하면서도 둥근 귀, 엉덩이 밑으로 내려와 살랑이는 꼬리. 작은 키와 아담한 가슴, 그리고 작은 얼굴까지.
모든 게 작고 귀여웠지만 풍기는 기운만큼은 그 누구보다 거대한 거인이었다.
저 여자를 아리아도 안다.
수왕(獸王) 채유린.
세계 파워 랭킹 102위에 등극되어있는 초절정 고수이자 한국의 자랑인 5대 길드 천견의 수장.
그런 그녀를 부르는 별칭은 여럿이지만, 그중 가장 대표적인 건…
'모든 동물의 여왕(女王)이자 색욕(色慾)의 화신.'
성욕에 힘이 비례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돌 정도로 갈망적인 성욕으로 유명하다는 거다.
한 번 찍힌 남자는 정기가 빨려 미라로 만든다는 인물.
그런 그녀이건만…
"아주머니, 이건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조금만 깎아줘요."
"…여기 시장가가 아니에요 아가씨.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물건값을 깎아주나."
"에이, 그럼 서비스라도 좀 더 얹어주실 수 있잖아요. 다른 아주머니들도 다 그렇게 하던데요 뭘. 대신 제가 팍팍 사드릴게요."
"젊은 아가씨가 흥정도 잘하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이거 2개 사면 서비스로 하나 더 드릴게."
…저게 대체 무슨 장면이란 말인가.
아주머니와 호호 웃으며 흥정하는 모습 어디에도 색욕이 묻어있지 않았다.
욕구로 번들거린다던 눈은 보는 사람이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선량하게 접혀있고, 날카롭게 심장을 파고든다는 목소리는 애교로 가득했다.
'저게 정말 그 수왕이란 말이야…?'
어디로 보나 선량한 아가씨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이쯤 되면 소문이 잘못된 건지, 제 눈이 잘못된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수고하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호호."
"아휴, 아가씨도 복 받아요."
어느새 흥정을 마친 채유린이 음식을 카트에 넣더니 반대쪽 코너로 들어갔다. 그에 아리아도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따라가자.'
수왕 채유린의 숨겨진 모습이라니, 만약 그녀가 기자였다면 특종이나 다름없는 일 아닌가. 그것도 그냥 특종도 아닌 대형 잭팟이었다.
무엇보다 최종택을 납치한 전과도 있으니 그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알아낼 수도 있는 일.
'…흐흥, 뭐 꼭 그 변태 해삼 말미잘 때문에 알아보는 건 아니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한 그녀가 조심스레 코너를 돌았다.
다행히 채유린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높은 곳에 있는 조미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살지, 그냥 포기할지 고민하는 눈치.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수왕의 모습이 아니다. 저 순진무구해보이는 모습에 속지 말자.
저 여자는 잔악무도한 천견의 수장이다.
그렇게 가슴 속 깊이 되뇌인 아리아가 다시 힐끔 그녀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어? 왜 없…'
결국 조미료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나싶어 일어나려던 순간, 뒤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온몸을 짓이기듯 압박해왔다.
마치 거대한 아나콘다가 몸을 옥죄는 듯한 감각.
숨을 들이키는 것조차 폐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압박감에 컥컥거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서 보낸 년이지?"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
좀 전에 아주머니와 살갑게 대화하던 그녀가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고 싶었지만, 숨조차 허락을 맡지 않는 한 쉴 수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일개 헌터들은 기운만으로도 폭사시킬 수 있을 정도.
하지만…
'…참을 수 있어.'
아리아는 일반적인 헌터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그녀가 겪은 일이 너무 많았고, 주변에 대단한 이가 너무 많았다.
"호오…?"
그런 그녀가 의외였던 걸까.
흥미롭다는 듯 꾹 참아내는 아리아를 바라보던 그녀가 발로 바닥을 툭 쳤다.
'허윽!'
그러자 기운이 조금 느슨해지며 숨통이 트였다.
딱 입을 열 수 있을 정도만큼의 압박감이었지만, 아리아에겐 지금이 더욱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손이 달달 떨리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약한 거야?'
너무 분했다.
예나와 보아가 강해진 걸 보며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재희와의 결전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으며 그녀들을 서포트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저 여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예나와 보아였어도 이랬을까 생각하니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분함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어디에서 보낸 건지는 몰라도 능력에 비해 제법… 응?"
"……?"
말하다말고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 그녀가 코를 씰룩이는 게 아닌가.
연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그녀가 이젠 아리아에게까지 다가와 냄새를 맡았다. 머리카락부터 목, 가슴 언저리까지 다가온 순간, 그녀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그리곤 꼬리를 잔뜩 부풀고 고양이 귀를 세운 채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묻는다.
"너… 주인… 아니, 최종택 씨랑 무슨 관계지?"
"…주인?"
"똑바로 대답하라, 여자."
채유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취조실에서 범죄자에게 진실을 요구하는 이처럼, 혹은 남자친구의 내연녀를 발견한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그에 멍하니 있던 아리아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동료?"
"…!"
그러자 채유린의 눈이 회등잔만해지며 귀가 쫑긋거린다.
참으로 다채로운 변화에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손을 잡곤 살갑게 군다.
"주인 님의 동료분이셨구나! 진작 말하시지… 혹시 제가 실레를 저지른 건 아닐까요?"
"……"
"다친 곳은 없죠? 어쩜 좋아… 혹시 언제부터 동료였던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승급시험 때부터?"
"어쩜…! 그럼 거의 초기 동료시군요! 세상에… 어쩜 좋아."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고양이 귀가 축 처진 채유린의 모습에 아리아는 그저 어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까까진 죽이려고 굴더니 지금에 와선 왜 친한 척한단 말인가? 아니, 그것보다 천견 길드의 주인이 이래도 돼?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리아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저, 저한테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
그런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 채유린이 작은 얼굴을 갸웃거렸다.
"그야 주인님의 동료이시니까요?"
"그, 그게 왜… 아니 그것보다 주인? 왜 그 사람이 당신 주인인데요! 뭐, 뭘 해줬다고! 서, 설마 그렇고 그런 짓을…"
어떤 상상을 했는지 아리아의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홍당무처럼 물들었다. 삿대질하는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제 은인이시니까요. 은인을 주인으로 모시는 건 생명체라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은인?"
이게 무슨 말이지?
그 눈치라곤 일도 없는 남자가 은인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 의문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채유린이 묻기도 전에 답을 말해주었다.
“안개 속에 갇힌 듯 흐릿한 세상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내려온 그날, 주인님은 제 저주를 풀어주셨어요.”
“..?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
“어둠 속에서 끝없는 갈증에 몸부림치던 저는 그날 구원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 말하는 채유린의 얼굴이 너무도 애틋하여 아리아는 차마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 뜻을 다르게 받아들인 것일까.
채유린은 신의 계시를 받은 사도가 신의 위엄을 전도하듯이 결연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게 무슨 일이래.’
이게 갑자기 무슨 전개인가 싶지만, 힘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아리아는 깔끔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얘기를 듣는데 생각보다 채유린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했다.
강인한 S급 스킬들로 인한 저주에 점점 정신이 지배당하고 있었고, 급기야 광기를 주체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부터 그로인해 심적으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까지.
간신히 정신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벅찬 탓에 단순해진 사고방식에서 구원해준 것이 바로 최종택이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유망주들을 납치한 것도 그녀라는 확신이 드는 얘기였다.
그에 아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지만, 채유린은 그날을 회상하는 듯 애틋한 눈빛을 할 뿐이었다.
“아아.. 그날 주인님이 제게 오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에요.”
“흐응..”
그에 아리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소문이 돌긴 했다.
색욕의 광기에 미쳐 날뛰며 5대 길드의 이름에 먹칠을 하던 여자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사고판단과 일처리를 보이고 있다고.
‘사실은 그게 본래 모습인 건가?’
설마 그럴까싶었는데, 얘기를 듣다보니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한테 말해드려야지.’
어쩌다보니 중요한 정보를 알게된 아리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문득 이상한 점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 눈치없는 사람이 저주를 풀어줬다고?’
아주 먹으라고 숟가락까지 떠밀어야 성공할까말까인 남자가 납치당한 상황에서 저주를 간파하고 역으로 은혜를 입힐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할 줄 아는 건 섹스밖에 없는 짐승같.. 어어!?’
거기까지 사고가 도달한 순간,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서, 설마..’
무엇을 상상한 건지 얼굴을 잔뜩 붉힌 그녀가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순진무구한 표정의 채유린을 담은 눈이 쉴새 없이 흔들렸다.
“그,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저주를 푼 거죠?”
“아..”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입을 살짝 벌린 채유린이 이내 수줍게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축였다.
한데 왜일까.
분명 수줍게 보여야할 모습이 마치 탐스러운 음식을 떠올리는 듯 보이는 건.
“...굉장했어요. 그런 건 살면서 처음이었어요.”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말에 아리아의 눈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괴, 굉장해? 뭐가?’
넋이 나간 듯 서있던 그녀가 뒤늦게 뭐라 말하려는 찰나.
지이잉-
“아, 잠시만요. 연락이... 엇! 주, 주인님!?”
“!?”
휴대폰을 확인한 채유린의 외침에 아리아가 입을 다물고 휴대폰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