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7화 〉요망한년 (1) (97/124)



〈 97화 〉요망한년 (1)

97화.




유감을 표하고 있는지 얼마나 됐을까. 옥구슬 굴러가는 듯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에 맞지 않게 농염함이 담긴 음성.

"뭐해요?  일어나고."
"아."

백보아였다.
여전히 가터벨트를 하고 내려보고 있는데  곳곳이 찢어져있어서 괜히 민망해진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예나와 아리아가 붙었다.
예나는 후방에서 지원했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멀끔했다.


그리고 아리아는…

"어, 어딜 보는 거예요? 이 음란한 사람!"
"…볼 것도 없으니까 그만해라."

눈이 마주치자마자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팔을 교차하며 가슴을 가린다. 웃긴 건 찢어진 부위도 가슴이 아니라 허리쪽이었는데 팔을 교차하니 더 잘 드러난다.


저 정도면 일부러 보라는 거 아냐?

띠링-


[특이사항이 갱신됩니다.]
[특이사항]
……
[한동안 하지 못하여 굶주린 상태]
[애정 어린 섹스를 하고 싶음.]


"……"

확실히 저년도 정상은 아니었다.
먼저 문자할  삐진 척 연락도 잘 받지 않더니… 역시 여자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애정 어린 섹스라…'


이 순간 예나와 눈이 마주친 건 우연일까. 잠시 허공에서 부딪힌 시선에 예나가 휙 고개를 돌린다.
부끄러운지 얼굴이 살짝 붉어진  보였다.
민망한 건 최종택도 마찬가지였다.

'예나 씨랑도 할 줄은 몰랐는데…'


그때는 다소 홧김에  감이 없지않아 있어서 현실감이 적었는데, 이렇게 밖에서 보니 어색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죄 지은 것마냥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원해서 한 것이고, 그도 이전처럼 감정 없이 한 게 아니니까.


앞으로도 신경 써줘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다만…

"…흐응."


그런 예나와 최종택을 묘한 눈으로 번갈아보는 백보아를 바라보지 못하겠다.
이게 양다리를 걸치는 남자들의 마음인가.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마음이 찔린다. 그건 예나도 같은 심정인지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먼저 자리를 비킨다.

"…전 먼저 들어가볼게요."


그러다 뭔가 떠올랐는지 우뚝 멈추더니 조심스레 묻는다.


"연락… 해도 돼죠?"
"아… 네. 물론이죠."

물 흘러가듯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여주자 예나가 기쁘다는 듯 웃으며 다시 등을 돌린다. 그리고  초 후 휴대폰이 진동했다.

[전직차도녀 :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전직차도녀 : 다음에  뵈요.]
[전직차도녀 : (수줍어하는 토끼 이모티콘)

'뭐야, 연락한다는 게 지금이었어?'

말로 해도 될 걸 굳이 카톡으로 하는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나 씨가 귀엽긴 해.'

처음 만날 때 세상 시크한 척 FM대로 행동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지금은 눈치를 살피는 토끼 같다.
아니, 저건 눈치를 살피면서 쿨한  하고 싶은 토끼라 해야하나?
이전에는 나름 시크한 컨셉을 잘 유지했던 것 같은데, 진심 어린 섹스를 한 후라 교감이 됐는지 감정표현이 더 풍부해진  느껴진다.

질투도 늘어날지 모르지만, 최종택으로선 아무렴 좋은 일이다.
예나 정도면 예쁘지, 일도 잘하지, 열정적이고 성실하지 일편단심에 수줍어하면서도 할 건 다하지.
여러모로 완벽한 여자 아닌가.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화악, 그림자가 지며 달콤한 향기가 느껴진다.


스윽.

백보아가 몸을 숙이며 다가온 것이다.
샴푸 냄새로 추정되는 달콤한 냄새와 땀에서 나는 큽큽한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그러면서도 묘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게 괜히 밑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백보아가 루비처럼 붉은 눈을 반달로 접었다.
그리곤 작은 앵두빛 입술을 움직인다.

-했어요?
"……"


이걸 뭐라 대답해야할까?
초조함 때문인지 상황 때문인지 심장박동소리가 빨라졌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백보아가 미소를 지은 채 더 가까이 다가온다. 한데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다.


머리카락이 귓가를 살랑이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린 순간.


그녀가 비밀 얘기를 하듯 속삭였다.

'언제? 나한테 연락 보내고 했어요?'
'……'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다.
그에 살짝 긴장이 풀려 굳은 어깨를 내리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좀 있다 저희 집으로 와요.'
'…왜요?'


떨떠름하게 되묻자 그녀가 희고 고운 검지를 들어 최종택의 입술에 가져다댄다. 턱끝을 따라 서서히 내려온 손이 이내 쇄골에서 멈춰선다.
그리곤 고혹적인 미소를 지은 채 세상 요염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잘 참았으니까, 보상.'
'…어?'

할 말을 끝낸 그녀가 멀어지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싱긋 웃어보인다.


"그럼, 저도 들어가볼게요. 좀 있다 봬요?"
"아…"


그렇게 떠나가는 백보아를 최종택이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황당하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여튼  요망한년… 저러면 안 갈 수가 없잖아.'

처녀였던 주제 남자 홀리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다, 예술.
하긴, 그게 백보아의 매력이지. 다들 고생했으니 오늘은 좀 쉴까 했는데 아주 가만히 두질 않는다.

'흠, 일단 나도 일어나볼까.'

밑에가 뻐근하다.
다리로 슬쩍 가리며 기지개를 켠 최종택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이익! 이이이익!!"
"…? 뭐하냐?"

아리아가 삿대질하며 알  없는 언어를 내뱉고 있는 게 아닌가. 어딘가 아픈 아이인 건 알았지만, 언어까지 잃어버리다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뭔데?"
"이익…"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자  말이 없었는지 아리아가 입술을 달싹거린다.
쟤도 참 생긴 것만 보면 예쁘장한데.
본인 정신세계는 생각 안 하고 혀를 차는 최종택을 보며 아리아가 눈물을 머금는다. 그에 당황한 건 최종택이었다.


"아니… 너 우냐?"
"안 울거든요! 이 나쁜 사람! 말미잘! 해삼!"

빼액 소리를 지르곤 투다다다 도망치는 아리아.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최종택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붙잡고 얘기를 들어야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또 때 되면 알아서 풀리겠지."

쓸데없이 좆은 크면서 여자 마음은 좆도 모르는 최종택이었다.


-

한편 최종택이 여자들과 투닥거리고 있을 때.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그래, 어서오거라."

이재희는 구성의 회장, 이태진과 마주하고 있었다.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기세. 곧게 편 허리와 부리부리한 인상에선 호랑이와 같은 기세가 느껴진다.


하나 그런 이태진도 손녀 앞에선 한없이 부드러웠다.
의자를 돌려 손녀와 마주한 그가 이재희의 몰골을 보곤 걱정스런 눈으로 말했다.

"다쳤구나. 치료하고 오지 않고선…"
"장비만 상했을 뿐, 보호구가 있어서 보는 것처럼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래… 대련이 꽤나 힘들었나보구나."


그에 이재희가 주먹을  쥐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자신이 이겼을 거라 확신한다. 백보아라는 여자가 제법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결국 서포터.


타고난 위력이 다르다.
많이 지치긴 했지만, 도제와 마술사도 넉다운 당한 건 아니니 그 여자만 어떻게 했으면 분명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자존심 상해.'


이재희의 팀은 5대 길드의 유망주들. 반면 상대는 이름 한  제대로 떨치지 못한 무명이다.
도제와 마술사만 밀려도 기분이 상할 일을 자신까지 합류해서 비등하게 싸웠다?


5대 길드라는 이름이 울고 갈 일이다.
그렇기에 할아버지도 자신을 부른 거겠지. 차마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이태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분하느냐."
"…네. 솔직히, 많이 분해요."
"무엇이 그리 분하더냐. 혹여나 구성의 이름에 먹칠했다는 생각을 하는 건 아니더냐."

그에 이재희는 부정할 수 없었다.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할아버지가 일구어내고, 이재현이 관리하여 5대 길드에 들어선 구성. 그 자리를 물려받은 자신은 언제나 완벽해야했다.

그래야 그들에게 먹칠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으니까.


한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여자들에게 졌다는 것보다, 그래서 최종택을 놓쳤다는 것보다 그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던 이태진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이야. 내가 구성을 일구어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을 것 같으냐."
"…할아버지가 실패를요?"
"그래. 다들 나보고 성공한 재력가, 타고난 재벌, 미다스의 손이라고들 하지만 사실  셀 수도 없이 많은 실패를 해왔다. 누구보다 많이 좌절했었지."

믿을  없었다.
 굳건하고 고고한 할아버지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모습이라니. 그 심정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이태진이 껄껄 웃는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구나."
"…네."

그에 즐겁다는 듯 웃던 이태진이 회상에 젖은 듯한 눈이 되었다.

"하기야… 너가 태어났을  나는 이미 회장이었으니… 하지만 말이다, 내 손녀 재희야. 잡초는   밀어낼수록 더 끈질겨지지 않더냐.
"……"
"상처도 그렇다. 찢어지고 아물수록 굳은살이 박히고 강인해지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그리 물은 이태진이 인자한 얼굴로 덧붙였다.

"사람은 실패하면서 성장하는 법이란다."
"…아."


무언가 깨달음이 온 것일까.
분함을 감추지 못하던 이재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어린 손녀의 성장이 흐뭇한지 이태진은 그저 기껍다는 듯 웃었다.

'늘 가면 속에 살던 아이이거늘… 오늘은 어쩐지 스스로를 드러내는구나.'


항상 자신의 모습을 본따 생활하던 아이다.
심성이 곱고 감성적인, 또래의 여자들과 같은 아이가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딱했었다.


그런 그녀의 어린 모습은 분명 회사 입장에선 좋지 않았다.


일처리까지 감성적으로 될 수 있으니까.
그건 효율이 좋지 않고 결국  판단들이 하나둘 쌓여 무너지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손녀의 또래다운 모습에 흐뭇한 건, 회장이기 전에 할애비로서 어쩔 수 없는  아니겠는가.

'이게  최종택,  남자 덕분이겠지.'

이재현에게 자빠트려라 게획을 들은 후라 영 마음에 들지 않기는 하나, 확실히  놈이긴 했다.
두 달만에 준 S급의 영역에 들고, 5대 길드의 관심을  몸에 받고 있으니까.
심지어 꽁꽁 감춰있던 이재희의 감정까지 깨웠다.

'진태협, 그 친구가 싸고 돌 만하구만.'

권왕 진태협.
과거 헌터계를 주릅잡던 대가인 그가 모든 걸 퍼주며 싸고도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그의 애기가 나와서일까.
문득 며칠 전 사신 애송이에게서 받았던 연락이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