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종택이 쟁탈전 (5)
96화.
언뜻 보기에도 B랭크에 필적하는 기운.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녀의 손에서 번쩍거리는 푸른빛이었다.
좀 전에 봤던 그 벼락과 같은 기운. 하나 그 안의 밀도와 기운의 양이 차원이 다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판단한 순간.
"예나 씨!"
백보아의 외침과 함께 무언가 커다란 기운이 결집되는 게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갈만큼 거대한 기운. 그런 이재희의 시야에 보인 것은 한 마리의 용이었다.
"미친! 이건 갑자기 무슨…!"
"마스터! 조심해야…"
왜인지 도제와 마술사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고, 예나의 몸에는 신성력이 은은한 빛을 내고 있다.
그것도 잠시, 이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용의 머리를 보며 이재희가 의문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도제와 마술사가 압도하고 있었건만,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피해야…'
그리 판단한 순간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리쳤다.
"흐읏…!"
정수리부터 꽂힌 벼락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전신에 퍼지는 짜릿함이 좀 전의 벼락과는 차원이 달랐지만, 충분히 버틸 만했다.
그러나 이재희의 얼굴에는 이내 경악이 피어올랐다.
크아아아-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용이 그녀를 덮치고 있었으니까.
이건 아무리 그녀라도 위험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벼락을 맞은 상태라면 더더욱.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이윽고 용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에 도제와 마술사가 소리쳤다.
"마스터!"
"이런… 저건 아무리 마스터라도…"
화살에 담긴 기운이 어림잡아도 S랭크 수준이다.
단순한 추측은 아니었다.
나름 A랭크인 도제와 마술사가 막아섰음에도 파쇄하기는커녕 막아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제아무리 버프를 받았다 해도 저건 아니지.
그야말로 화살 한 발에 모든 걸 담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 화살이 이재희를 휩쓴 순간, 경기장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끝났다.'
'이걸 막진 못하겠지. 비겁한 녀석들… 디버프가 걸릴 걸 생각하고 수를 바꾸다니.'
처음부터 본격적으로 하려는 순간, 버프가 걸린 걸 보고 시간을 끌기로 계획을 수정.
그동안 예나가 도제와 마술사의 어그로를 끌고, 아리아와 백보아가 아슬아슬하게 이재희의 공격을 방어.
그러다 디버프가 생겼을 때 방심한 틈을 타 폭딜까지.
"누가 짠 건지 정말 잘 짰다니까요."
"…재수없지만, 이번에는 인정할게요."
"좋은 판단이었습니다. 덕분에 가장 큰 전력을 손쉽게 헤치울 수 있었어요."
그야말로 완벽한 전략이었다.
이걸 다 떠올린 건 다름 아닌 백보아였다.
그런 그녀들과 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떨어진 돌무더미를 보며 최종택은 놀란 듯 멍해있었다.
'…다들 갑자기 왜 이렇게 세진 거지?'
진심 어린 섹스가 이 정도였나?
이건 예나도 예나인데, 백보아의 화력이 미쳤다. 순간 폭딜 한정이지만, 등급을 몇 계단이나 올려주는 버프에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는 버프까지.
게다가 뛰어난 성능의 견제기 겸 CC기까지 보유하고 있따.
둘의 시너지만 해도 이리 뛰어난데 만약 피카츄까지 각성하면 어찌된단 말인가.
'나란 남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 순간에도 자뻑을 하는 게 참 그다웠다.
어쨌거나 이 정도라면 이재희가 넉다운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백보아와 예나가 뿌듯해하는 이유도 그래서겠지.
'슬슬 팝콘도 다 떨어져가고 딱 좋네.'
도제와 마술사야 저 정도면 금방 정리될 테고.
딱 타이밍 맞게 끝났다는 생각에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콰앙!
"…어?"
"보, 보아 씨! 피해요!"
무언가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이 들리더니, 돌무더기가 박살나며 터져나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이재희였다.
한데 방금까지와는 그 기세가 전혀 달랐다.
온몸이 무기로 이루어진 듯 날카롭게 벼려져있었고, 주변으론 마력이 넘실거렸다. 그런 그녀의 주위로 흩날리는 벚꽃잎과 무기들.
이전에 최종택이 아수라 던전 때 보았던 그녀의 필살기였다.
"…영광으로 아시죠. 아무에게나 보여주지 않던 기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
최종택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제대로 감탄했던 기술, 당연히 저 기술을 처음보는 백보아 일행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지금 저 상태는 위험하다고.
'저것이 5대 길드의 마스터…'
'감춰진 길드 마스터의 힘이 이 정도였다니… 믿을 수 없네요.'
제아무리 진 각성을 했다고는 하지만, 저건 객관적으로 무리였다.
지금도 온몸을 짓누르는 짙은 압박감에 발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다.
그렇다고 포기하냐?
'그럴 순 없어.'
그것만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싫었던 그녀들의 눈에 투지가 깃들었다.
어차피 끽해봐야 방어구가 파손되고 마는 전투다.
저깟 기운에 질려서 포기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그녀들이 각오를 다잡고 있을 때, 최종택도 진지한 얼굴로 생각했다.
'와씨, 개꿀잼. 저걸 사네.'
이보다 팝콘이 잘 어울리는 상황이 없다.
아주 흥미진진한 상황에 제대로 관람객 마인드가 된 것이다. 그렇게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보고 있을 때.
콰앙!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깨고 나선 건 이재희였다.
그저 앞으로 돌진했을 뿐인데, 바람이 찢기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그런 그녀의 뒤로 벼락이 내리 꽂린 건 그 직후였다.
'천벌보다 빠르다고?'
아직 최종진화 기술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 빠른 속도 아닌가.
그러나 백보아도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쿠릉- 콰르릉!
연달아 벼락을 내리꽂자 하늘이 요동친다.
그에 이재희가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될 걸 기대하며 예나가 활 시위를 당긴 채 기운을 모았다.
하지만…,
서걱- 석-
주위로 흩날리는 수백의 검과 꽃잎이 벼락을 모조리 쳐냈다. 그 사이 순식간에 다가온 이재희가 검을 휘두르렀다.
그러자 아리아가 급하게 끼어들며 방어 스킬을 외쳤다.
"…방어 태세!"
그러자 놀랍게도 이재희의 검이 막혔다. 그러나 이재희의 검은 하나가 아니다. 수많은 마법검이 그녀를 향해 결집되는 순간.
파아앗!
예나가 활 시위를 당겼고, 거대한 화살촉이 대포처럼 날아와 결집되려는 마법검을 쳐냈다.
지금부터는 한끗 싸움이었다.
누구라도 먼저 공격을 시도한 사람이 이기는 싸움.
그리고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건 백보아와 이재희 뿐.
그 사실을 자각한 두 여자가 서로를 향해 마법검과 벼락을 준비하려던 찰나였다.
"그만--!"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진 사자후.
갑작스런 소리에 검을 휘두르던 이재희와 벼락을 뻗던 백보아가 멈추었다.
서로의 코앞에서 멈춘 그녀들을 향해 한 남자가 다가왔다.
"대련은 이쯤에서 끝내시죠, 길드장님."
웬만한 모델보다 우월한 피지컬.
흔히 조각상이라고 부르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어딘가 차가운 인상의 남자. 고고한 자태를 뿜어내는 남자를 본 이재희의 눈이 커졌다.
"…오빠, 아니 부길드장?"
갑작스레 등장한 남자, 그의 정체는 바로 구성 길드의 부길드장 이재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이어서일까.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중에는 최종택도 있었다.
'부길드장? 이재희의 친오빠라는 사람인가. 이전 길드장이었다가 물러났다는…'
빤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재현도 묘한 기운을 감지한 것일까. 묘한 눈으로 한동안 최종택과 시선을 마주하던 그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S등급이란 말은 없었는데… 왜 저렇게 세지?'
은둔고수인 이재희가 더 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했었는데 그래도 A랭크 정도 될 거라 생각했다.
전에 봤던 S랭크 비서가 구성 길드의 임무를 모두 맡고 있다 들었으니까.
한데 지금 보니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저 이재현이라는 남자, 최소 그녀보다 2배는 더 강하다.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을 뿐.
'S급 사이에도 격이 있다 했지?'
언젠가 들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체감된다.
확실히 격의 차이가 느껴지니까.
지금껏 마주쳤던 이들 중 저 남자랑 비슷한 헌터라면……
'채유린 이상이야.'
5대 길드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여자이자 누구나 싸움을 기피한다는 전투왕. 세계 파워 랭크 102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보다 강하다라…
확실히 갈 길이 멀긴했다.
하지만 이전 협회 시상식 때와 달리 지금은 자신이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더 강해져서 돌아올 테니까.'
금방 놈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이.
씨익 웃은 최종택이 문득 든 생각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수왕, 걘 뭐하고 있으려나. 말 잘 듣고 있으라했는데… 신경을 안 쓰고 있었네.'
그만 바라보는 그녀의 입장에선 너무 슬픈 일이었지만 최종택이 알 리 만무.
그저 나중에 한 번 봐야겠다 생각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건 나중 일.
지금은 이재현이라는 남자가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는지가 더욱 궁금했다.
다행히 그도 양반은 못되는지 금방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의 호출입니다."
"……"
짧기 그지없는 문장.
하나 그에 대한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들의 아버지라면, 무려 한국 대표 재벌 기업인 구성의 회장이라는 소리니까.
한국의 호랑이.
이재희의 카리스마의 원천이라 볼 수 있는 인물.
"아버지의 호출은 절대적. 대련은 이 정도로 멈추고 따라오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그에 이재희가 이를 악물었다. 다 잡은 먹이를 놓친 사냥꾼처럼 눈을 질끈 감은 그녀가 이내 검을 회수했다.
"…당신들의 승리입니다."
그리곤 검집에 집어놓곤 휙, 뒤돌아 무대를 나온다.
분함을 애써 감추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뒤를 도는 순간 그녀는 평소의 카리스마 넘치는 구성 길드의 마스터가 되어있었다.
"그럼…"
살짝 고개를 숙여보인 이재현이 그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걸로 끝이었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도제와 마술사는 눈치를 보다 빠졌고, 해설자는 다급히 마이크를 꺼내들었다.
-스, 승자는 백보아 팀입니다!
"……"
얼떨결에 승리자가 된 백보아 일행들은 떨떠름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그녀들의 표정은 오묘했다.
패배의 수렁텅이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사람처럼 분한 모습이기도 했고, 또한 성장한 자신에 대해 뿌듯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상태.
확실한 건 당분간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어보였다.
그리고…
'아니… 이긴 건 좋은데… 잘 구경하고 있었는데 왜…'
최종택은 내심 안도되는 한편, 갑자기 흥이 깨진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