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종택이 쟁탈전 (1)
92화
3.
어두웠던 밤이 저물고 해가 떴다.
노을이 비친 바다가 은은한 빛을 띄고 있었다. 어제까지 전투가 치러졌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
“……”
“……”
그 광경을 바라보는 최종택과 이재희는 말이 없었다.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예, 뭐…”
누가 봐도 어색한 분위기.
그중에서도 이재희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랐다.
어제 일을 신경 쓰는지 최종택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부끄러우신가 보네. 잘 때 뭐 했나?’
그러며 슬쩍 밑을 바라본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제는 눈으로만 봐도 파악 가능한 수준에 이른 그였다.
한데 묘하게 시선이 따갑다.
마치 신혼 첫 날밤 아무것도 안 하고 잔 다음날 느낄 법한 시선.
휙.
그에 고개를 돌리자 귀신같이 눈치 챈 이재희가 시선을 피한다.
‘뭐지.’
그에 다시 다른 곳을 보면 또 시선이 느껴진다.
그걸 몇 차례 반복하던 최종택이 머리를 긁적였다.
저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은가.
‘조금 떠볼까.’
최종택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다시 시선을 돌려 최종택을 곁눈질하던 이재희가 깜짝 놀라 살짝 뒷걸음질 쳤다.
잠깐 사이 그가 코앞에 와있는 게 아닌가.
“…왜 그러죠?”
당혹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물었다.
나름 담담한 척을 했지만, 눈치 없는 최종택이 보기에도 부자연스런 모습이었다.
그에 최종택이 입을 열려던 찰나.
띠링-
[00 : 01 . 23]
[웨이브에 준비하십시오]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혔다.
쥐구멍이라도 찾은 듯이 몸을 돌린 이재희가 발을 뺐다.
“…웨이브네요. 전투 준비하죠.”
“아…”
그러며 먼저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보며 최종택이 피식 웃었다.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
처음 만날 땐 성공한 커리어 우먼 같았건만.
지금은 커리어 우먼인 척하는 대학생 같이 느껴진다. 그런 면이 묘하게 예나가 떠오르기도 하고.
띠링-
[웨이브가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집중하자.’
재촉하는 메시지를 보며 그가 검을 뽑았다.
그런 그를 맞이하듯 전날보다 배는 큰 파도가 밀려왔다.
4.
[웨이브를 막았습니다.]
[다음 웨이브가 밀려옵니다.]
‘씨발.’
웨이브는 끝없이 쳤다.
나무도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는 말도 요즘엔 눈치 없다하는 시국인데 저건 벌써 18번째다.
저건 눈치가 없다 못해 증발해버렸다.
콰가가가가가-
“어우, 이번에도 대어네요.”
심지어 웨이브가 친 횟수가 늘어날수록 몬스터의 수준도 높아졌다.
상대하기 어려운 수준은 아니다.
각 개채의 수준을 보면 오히려 검의 무덤보다 쉬운 편이었다.
‘바다라서 거슬리네.’
문제는 던전의 환경과 특성.
바다 안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거나 빠른 속도로 떠밀려오는 탓에 한 시도 집중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자칫 방심했다간 몬스터가 개미처럼 쌓여버렸으니까.
[심해의 길잡이가 당신을 인도하려합니다.]
“인어에요! 뒤로 잠시 빼죠!”
그럼 귀신같이 몰려온 인어들 때문에 뒤로 물러나야했다.
그 사이 보란 듯이 쌓이는 몬스터들.
저 성가신 조합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 탓에 난이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참기 힘든 건…
‘씨발, 그림의 떡이라니… 존나 잔인한 말이었어…’
탐스러운 가슴과 머리를 흔들며 유혹하는 인어를 보고만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매끈한 비늘이 저리 통탄할 수가 없다.
독립을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던 유관순 여사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아니야, 미친놈아.
누가 들었으면 그리 말했겠지만, 최종택에겐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건 애정 어린 섹스와는 다른 일이다.
남자가 드림카를 꿈꾸듯, 남자라면 꼭 이루고 싶은 꿈과 같은 거였으니까.
[웨이브를 막았습니다.]
[19번의 웨이브를 막았습니다.]
“후우.”
어쨌거나 이젠 그것도 마지막이다.
[던전, ‘석양의 파도’의 주인이 다가옵니다.]
[마지막 웨이브를 준비하십시오.]
“드디어 보스네요.”
“마력을 충분히 비축해놨으니 괜찮을 겁니다.”
이번이 약속의 20번째 웨이브였으니까.
이 순간을 위해 마력과 체력을 유지하며 교대로 웨이브를 막았었다.
수라기를 사용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보스에 또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저번 던전처럼 난이도가 껑충 뛰면 낭패 아닌가.
실제로 이미 한 번 마족의 기운으로 던전이 변형된 상태다.
두 번 변형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
사아아아-
파도가 쳤다.
걱정과 달리 별 다른 메시지 없이 순수한 파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단 하나의 실루엣만을 동반한 잔잔한 파도에 최종택의 눈이 커졌다.
“아.”
이윽고 탄성을 내뱉은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실루엣이었다.
화려하게 웨이브 진 긴 머리카락,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는 끝내주는 몸매와 각선미.
[인어들의 여왕, 샤를레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아…”
그것은 인어였다.
거지같은 생선비늘이 아닌, 맨다리를 드러낸 인어.
그 믿을 수 없는 실루엣에 최종택이 주먹을 꽈악 쥐었다.
‘믿고 있었다고 쥐엔장…!’
감동의 쓰나미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의 모습에 이재희가 입술을 빼죽 내밀었다.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나는 쳐다도 안 보더니…’
단 둘이 잠에 들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늘.
한낱 마물 따위에게 저러는 것 아닌가.
자신이 몬스터에게 밀렸다는 생각이 들자 자존심이 상했다. 마음 같아선 뭐라 골려주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었다.
‘…인어 아닌 거 아냐? 인어가 왜 다리가 있어.’
자신이 봐도 저 실루엣은 어엿한 인간여성이었으니까.
그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불편해졌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쓸 그가 아니었다.
‘와씨… 얼굴은 얼마나 예쁠까.’
그저 샤를레나의 미모를 떠올리며 가슴 설레하기 바빴다.
사아아-
그러는 사이에도 샤를레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몸매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에 최종택이 격분하여 이마를 탁 쳤다.
‘와…’
남자가 원하는 워너비 몸매.
흔히 만화에서나 볼 수 있다는 완벽한 콜라병 몸매에 잘빠진 다리였다. 저 몸매로 못생길 수가 없다.
아니, 일반인처럼만 생겼어도 이미 미녀다 저건.
두근두근.
이재희를 앞에 두고도 뛰지 않았던 심장이 뛰었다.
그 순간, 샤를레나가 멈추었다.
저벅저벅.
그리곤 지면처럼 물 위를 걸어서 다가왔다.
탐스럽게 튀어나온 골반 밑으로 보기 좋게 움직이는 매끈한 다리.
‘오오….’
그 매혹적인 움직임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샤를레나가 다가올수록, 감탄은 다른 감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어…'
무언가 감이 싸했다.
결코 달려서는 안 될 무언가가 달린 기분.
그에 최종택이 오싹함을 느낀 순간, 이윽고 샤를레나가 멈추었다.
“…?”
그러자 보였다.
웨이브 진 머리 사이로 드러난 생선 대가리가.
이보다 더 정직하게 동그랄 수가 없는 눈동자가 달린 푸른 대가리.
“……”
정적이 흘렀다.
최종택은 물론이고, 이재희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정적을 깬 건 샤를레나였다.
-나의 아이들을 괴롭힌 게 그대들인가…
흉측한 입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으아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최종택의 주위로 어두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수라기였다.
석양이 졌을 때보다 몇 배는 더 짙고 거대한 마력. 그 마력은 순식간에 집중시킨 최종택이 발작하듯 손을 휘둘렀다.
사악-!
동시에 샤를레나의 머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깔끔하다 못해 섬뜩했다.
목 잘린 귀신도 저 정도로 깔끔하게 잘려있진 않겠다 싶을 정도로.
첨벙,
이내 물 안에 빠진 몸을 앞에 두고 최종택이 울부짖었다.
“씨바아아알! 아니야!! 아니라고! 저건 인어가 아니라 어인이잖아!”
“아…”
마치 시력을 잃은 것처럼 눈을 붙잡고 서럽게 우는 모습.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이재희가 정신을 차렸을 땐 저도 모르게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겨우 2일.
그 짧은 시간에 어딘가 이상해진 그녀였다.
4.
[던전, ‘석양의 파도’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해프닝이 지나고.
최종택과 이재희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수고했습니다.”
“최종택 씨도 수고하셨어요.”
2일 만에 보는 현대 공기에 정신을 차렸는지 최종택도 제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다소 기운이 없어 보이기는 한데, 아까에 비하면 멀쩡하다 봐야했다.
그에 대답하던 이재희가 빤히 그를 바라봤다.
마치 부모님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눈치를 보는 듯한 모습.
“…할 말 있어요?”
“아…”
보다 못한 최종택이 묻자 이재희가 입을 오물거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이던 그녀가 이내 허리를 피곤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여자 이재희가 아닌, 구성 길드장의 모습이었다.
“최종택 씨,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겠습니까?”
“…?”
갑자기?
예상치 못한 말에 최종택이 멈칫하자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저도 압니다.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있는 것을. 차분하게 그날을 기다리려고 했지만… 너무 탐이 나네요.”
“……”
“그래서 다시 한 번 제안합니다. 전폭적인 지원을 해드리겠습니다. 원한다면 다른 조건도 모두 채워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이재희가 숨을 골랐다.
그리곤 결연한 얼굴로 최종택과 눈을 마주하며 고운 손을 내밀었다.
“저와 함께 해주시겠어요?”
“……”
거의 프러포즈를 하는 듯한 모습.
그만큼 진솔한 그녀의 모습에 최종택의 눈이 흔들렸다.
하나 그것도 잠시.
‘아…’
이내 평정을 찾은 그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깨달은 것이다.
‘진심이시구나.’
그녀가 가벼운 마음이 아닌, 진심으로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상업적이든 무엇이든 결코 그 무게가 적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거절해야 돼.’
그런 사람에게 어물쩍 대답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판단을 마친 그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들어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
그에 이재희가 고개를 떨구었다.
처음 당당하고 자신감 넘쳐보였던 그녀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
살짝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지금은 확고해야했다.
“…하아.”
그 흔들림 없는 눈을 마주한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권 노아 때문인가요?”
“음? 그건 아니에요.”
“…?”
그에 이번엔 이재희가 아리쏭한 얼굴이 되었다.
구성이 협회에게 밀릴만한 건 권 노아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건 없었다.
“그럼…?”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묻자 최종택이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제 팀이 있거든요. 구성에 가는 것보다는 제 팀원들과 팀을 구성하는 게 더 좋아서요.”
“……”
사실 팀 때문만은 아니긴 했다.
아무리 팀이 있다 해도 구성에 가는 게 큰 메리트가 있었다면, 그는 구성에 들어갔을 테니까.
하나 몇 번 던전을 가본 결과, 그는 구성의 도움이 크게 필요 없었다.
‘지금만으로도 충분하지.’
정확히는, 굳이 협회와 팀을 버릴 정도로 좋지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데 왜 굳이?
그런 생각이었으나, 이재희가 느끼기엔 다르게 느껴진 듯했다.
“…그 말은 구성보다 최종택 씨의 팀원이 더 뛰어나다는 소리인가요?”
“…어?”
말이 그렇게 되나?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해하는데 이재희가 주먹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그게 이유라면 조금 자존심이 상하는군요.”
“어… 그게 아니라.”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 싶어 뭐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어머, 그게 자존심 상할 일인가요? 당연한 것뿐인 걸요.”
“…?”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듣기 좋은 음색과 달리 장난꾸러기 같은 말투.
그리고 파격적인 검은색 가터벨트.
“…보아 씨? 교관님… 그리고 피카츄까지?”
그곳엔 기세등등한 얼굴을 한 팀원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