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미녀 길드장과의 던전 탐방 (5)
91화
1.
그런 순간이 있다.
세상이 조용해지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지는 세상에서 심장소리만 울려 퍼질 때.
지금 이재희가 그랬다.
“…뭐해요?”
천천히 눈을 뜨고 묻는 그 물음에 이재희의 세상이 멈추었다.
이 순간, 든 생각은 하나였다.
‘…어떡해.’
심장이 터질 듯 뛴다.
무심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평소의 멍청해 보이는 모습과 다른 진지한 눈.
‘…설마 자고 있던 게 아니었나?’
머리가 복잡했다.
만약 깨있었던 거라면 자신을 뭐라 생각했겠는가. 슬쩍 시선을 피한 그녀가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곤 휙, 몸을 돌려 뒤돌았다.
더는 얼굴을 마주보고 있기 힘들었던 탓이다.
두근두근두근.
‘아… 이재희, 왜 그런 거야.’
터질 듯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가 스스로를 나무랐다.
아무리 분위기가 그렇다해도 그렇지.
이건 엄연히 범죄로 이어질 수 있던 일 아닌가.
좋은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필드 던전을 계획했는데, 이래선 말짱 도루묵이었다.
‘아…’
하지만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말짱하게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결국 그녀가 질끈 눈을 감았다.
‘…자는 척하자.’
설마 잠에 든 사람을 억지로 깨워서 얘기할 린 없지 않겠는가.
물론 빤히 보이는 생각이었다.
‘음, 부끄러우신가 보네.’
애써 자는 척하는 그녀의 모습에 최종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눈썹을 손가락으로 훑을 때부터 깨있었다.
처음엔 잠꼬대인가 싶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점점 밑으로 내려오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이거 각 아닌가?’
남자라면 참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젠 섹스에 도가 튼 최종택이 이런 떡을 마다할 리가 없었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최근 애정 어린 섹스를 한 탓일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아무 의미 없는 섹스에 목을 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더 무르익을 때 먹는 게 맛있지.’
상대를 애태우는 게 더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 상대가 재벌 3세라면 더더욱.
스윽.
어깨를 으쓱인 최종택이 슬쩍 그녀에게 다가갔다.
안 그래도 좁은 텐트라 그런지 그것만으로도 살이 닿는 면적이 확 넓어졌다.
마치 품에 안은 것 같은 감촉에 이재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지금 안으려는 건가?’
그녀로선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한데 꼭 싫지만도 않았다.
두근두근두근.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꼭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일초, 이초…
‘…?’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편안한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살짝 안은 채 잠에 든 최종택이 보였다.
그 모습이 얄궂게 느껴진 건 왜일까.
왠지 모를 감정에 이재희가 살짝 울상을 짓다가 슬쩍 위를 바라봤다.
[07 : 12 . 20]
“…짜증나.”
가뜩이나 얼마 자지도 못하고 왔건만.
오늘도 푹 자긴 그른 듯 했다.
2.
“오늘로 벌써 2일 차입니다.”
“…했겠죠?”
백보아의 말에 예나와 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의 경험을 생각하면 확신할 수 있었다.
“무조건이죠.”
재벌 3세 미녀 헌터와 단 둘이 던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가만히 있는다?
그녀들이 아는 최종택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해가 서쪽에서 떠도 운치 있는 섹스라고 좋아할 남자가 그였으니까.
그래서 문제였다.
“그럼 능력치가 오른다는 걸 알겠군요.”
“……”
구성이라는 거대세력이 본격적으로 최종택을 노리게 될 테니.
만일 애정 어린 섹스라도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종택을 가져오려 할 것이다.
그게 대기업의 방식이니.
“무슨 수를 써야할 텐데…”
예나가 걱정하는 이유도 그거였다.
그에 백보아가 다소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까진 괜찮을 거예요. 했더라도 능력치가 조금 오른 정도였을 테니 섣부르게 움직이진 않을 걸요.”
“음… 확실히, 종택 씨가 애정 어린 섹스를 잘 안 하긴 하죠.”
“맞아요.”
원래 생각이라는 걸 잘 안 하는 최종택이다.
백보아는 몰라도, 예나의 경우만 해도 관계를 그렇게 맺었는데도 이제 겨우 애정 어린 섹스를 했지 않은가.
처음 만난 여자와 애정을 섞을 확률은 적었다.
“애정……”
그녀들의 대화를 듣던 아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왠지 마음이 아팠다.
그러는 사이에도 예나와 백보아는 대책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무리 최종택이 가지 않겠다고 했어도 그저 두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순 없었으니까.
“그렇다하더라도 능력치가 오르는 건 매력적인 부분이 맞죠.”
“지금까진 대기업과 부딪힌 적이 없으니 괜찮았어도… 5대 길드는 조금 얘기가 다르긴 합니다.”
이재희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어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른다.
문제는 그녀의 소속이었다.
대기업인 만큼 상대하려면 그녀들도 무언가 한 수가 있어야하는데…
“으음…”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의외로 먼저 입을 연 건 아리아였다.
“종택 씨는 어차피 우리한테 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차라리 종택 씨가 구성 팀에 가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나요?”
“……”
아리아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의외의 발언에 예나와 백보아도 순간 멈칫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구성의 지원을 받고 강해진 후 자신들과 함께하는 게 베스트니까.
굳이 소유권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음…”
하지만…,
서로 눈을 마주친 두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 둘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아, 이래서 종택 씨랑 애정 어린 섹스 안 해본 사람과는 말을 섞으면 안 됩니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세상만사 합리적으로만 일이 진행될 순 없는 법.
특히 애정 어린 관계를 맺은 사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벌떡.
그녀들이 동질감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런 행동에 눈이 동그래진 아리아를 보며 백보아가 말했다.
“우리의 각성한 힘을 보여 드리죠.”
“어……”
그에 예나도 합세했다.
“가시죠.”
“따라오세요.”
그러며 앞장서는 예나와 백보아.
‘…뭐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리아가 뒤늦게 그 뒤를 따랐다.
그 끝에 도착한 곳은 B급 던전이었다.
협회 측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던전 중 하나인, 트롤의 아지트.
“…여긴 왜 온 거예요?”
“보고만 있어요.”
처음에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다짜고짜 웬 던전이란 말인가.
심지어 최종택도 없이 B급 던전을 간다는 게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백보아가 있는 한 몬스터가 많이 몰려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위험하지 않을까…’
그녀들에게 있어 B등급은 B+등급이라 볼 수 있던 것이다.
하나, 그 걱정이 깨지는 건 금방이었다.
콰가가가가강-!
“……”
엄청난 굉음이었다.
화살 한 발로 몰려드는 몬스터를 쓸어버리며 들린 폭발음.
그 소리만큼 흔적 또한 살벌했다.
파스스-
대부분 가루가 되었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진 것이다.
심지어 일반 몬스터도 아닌 트롤이.
‘…미친.’
그에 아리아가 저도 모르게 욕두문자를 내뱉었다.
아무리 백보아의 버프를 받았다 해도, 이건 너무 강하지 않은가.
이건 예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보아 씨의 버프가 이렇게 좋았나?’
이전에도 사기였던 그녀의 버프가 한층 더 강해졌다.
하나 그녀들의 힘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쾅!
퍼어억!
“어우, 속이 다 시원하네요.”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족족 쓸어버린 그녀들 덕분에 금방 도착한 보스방.
[…인간.]
그곳에서 나온 트롤은 평범한 놈이 아니었다.
일반 트롤보다 두 배는 큰 덩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돌연변이.
흔히 트윈 헤드 트롤이라는 이름보다 헌터 학살자로 더 악명을 떨치는 놈이었다.
끼이이익-
[죽을 각오는 되었나…]
꿀꺽.
그 악명에 걸맞게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아리아가 마른 침을 삼켰다.
“…이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탱킹한 편이라곤 해도, 어디까지나 C~B등급 헌터의 수준.
저놈의 공격을 막을 정도로 단단하진 않았다.
‘아무리 원거리 딜을 잘 넣어도 어그로를 못 잡으면…’
그 끝은 파멸이리라.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그녀가 슬쩍 뒤로 물러나려던 찰나였다.
파앗!
“…!”
놈이 움직였다.
거대한 덩치가 무색할 만큼 빠른 속도였다.
총알처럼 날아온 트롤이 쇠몽둥이를 휘두르자 아리아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었다.
그리고 아차했다.
‘아…! 못 막을 텐…’
분명 벽에 처박힐 게 뻔했다.
곧 다가올 충격에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스으으-
‘…어?’
무언가 따스한 기운이 몸 안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바다에 들어온 것과 같은 시원한 감각이 뇌에 전해졌다.
결코 맞물릴 수 없는 두 감각이 공존하는 오묘한 느낌.
그에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굉음이 터져 나왔다.
쾅!
“아.”
정신이 번쩍 든 아리아가 두 눈을 부릅떴다.
‘…막았어?’
트롤의 몽둥이가 방패에 정확히 직격하고도 전혀 밀리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그리 버겁지도 않았다.
방금까지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던 보스가, 지금은 가벼운 스파링 상대를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말도 안 돼.’
믿기지 않는 상황에 멍하니 방패를 들고 있을 때였다.
“뒤로 물러나요!”
예나의 외침이 귀를 찔러왔다.
그에 아리아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방패로 몽둥이를 튕겨낸 후 옆으로 구르자 뒤로 무언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퍼어엉!
[커헉…! 마, 말도 안…]
곧이어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떨리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에 뒤를 돌아본 아리아가 입을 벌렸다.
“헐.”
그만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하면 화살 한 방으로 트인 헤드 트롤의 심장 부근을 흔적도 없이 뚫어버린단 말인가.
[재생이… 안 된다고…?]
트롤이 당황했는지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놈은 현실을 부정하기 전에 피할 생각을 먼저 했어야했다.
슈우욱-!
파바바밧! 파밧!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화살이 놈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움직임을 방해할 때나 쓰는 공격.
파악! 퍽! 퍼벅!
[크아아아아악!]
하나, 지금은 한 발 한 발이 치명타였다.
트롤의 두꺼운 가죽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공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던 것이다.
심지어 중간마다 떨어지는 백보아의 낙뢰는 마치 신의 천벌과도 같았다.
털썩-
“흐음…”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쓰러진 트롤을 보며 백보아가 넌지시 물었다.
“그게 새로 얻은 스킬인가요?”
“예. 유령시라는 스킬인데, 관통력을 올려주고 마력을 소모하면 적의 방어력관련 효과를 무시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재생력도 무시하는가보네요.”
“그건 제 버프 때문이에요.”
“아…”
그런 둘의 대화를 들으며 아리아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정 어린 섹스가 이 정도야?’
대체 뭘 각성했길래 저런단 말인가.
그야말로 사람이 달라졌다.
이제는 같은 파티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가 느껴진다.
동시에 묘한 기대감 또한 들었다.
“이 정도라면… A등급 던전도 저희끼리 클리어할 수 있겠는데요? 전력이 이 정도라니…”
감탄 섞인 그녀의 말에 백보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아, 전력이라뇨. 아직 제 백보센트 중 10보센트 밖에 사용 안 했어요.”
“아…”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아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퍼센트 아닌가요?”
“아.”
그러자 백보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라임이 좋잖아요.”
“……”
최종택에게 묻혀서 그렇지, 저 여자도 정상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