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미녀 길드장과의 던전 탐방 (1)
87화.
3.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그 후로도 예나와 백보아가 뭐라 말을 했지만, 그녀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한참이 지난 후였다.
지이이잉-
“어라, 종택 씨네요?”
백보아의 목소리에 풀죽어있던 아리아의 귀가 쫑긋했다.
그러는 사이 전화를 연결했는지,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교관님?
“네.”
-어우,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어요. 문자 온 거 봤는데 다들 모여 있는 거예요?
슬쩍 그녀와 눈을 마주친 백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아도 관심이 생겼는지 어느새 다가와 전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예. 무슨 일이죠?”
-아, 그럼 지금 말하면 되겠다.
폭탄이 떨어진 건 그때였다.
-저 며칠간 못 볼 거 같아요.
“예?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그에 예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깜짝 놀라 다가왔다.
방금까지 화제의 중심이었던 종택이 아닌가.
그런 그가 며칠간 못 본다고 직접 선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의문에 최종택이 별 일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 구성이랑 필드 던전 가기로 했거든요.
“…!”
하나,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뭐?’
‘필드 던전…!?’
그녀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얘진 머릿속으로 필드 던전에 대한 정보가 스쳐지나갔다.
‘필드 던전이면 기본이 몇 박 며칠이잖아.’
‘못해도 2박3일이라고 들었는데…’
구성 미녀 재벌 3세와 몇 박 며칠 던전 탐방?
그리고 그 대상이 최종택이다?
‘이건 안 돼.’
‘종택 씨라면 분명 한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건 빼박이다.
마치 십년간 합을 맞춘 것처럼, 예나와 백보아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안 돼요!!”
“절대 안 됩니다!”
그 기세에 최종택의 목소리가 움찔했다.
-어…
그의 입장에선 그녀들이 왜 저리 막는지 이해가 안 됐다.
사실 그게 당연하다.
애초에 구성과 3번의 던전을 돌아야하는 게 약속이니까.
하지만 예나로선 무조건 막아야할 일이었다. 최종택과 던전에서 가장 많이 한 여인이 그였으니까.
“아무튼 안 돼요!”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미 잡아버려서… 아무튼 다녀와서 봐요.
“종택 씨?”
뚝.
예나가 당황해서 입을 열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긴 것이다.
“아…”
황망한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던 예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짓씹고 있는 백보아가 보였다.
“구성과 몇 박 며칠입니다.”
“그 인간이라면 분명…”
거기까지 말을 잇던 백보아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구성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네요.”
“……”
그에 예나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중 가장 심각한 건 그녀들이 아닌 아리아였다. 침울하다 못해 서러운 얼굴이 된 아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나만 못했는데…”
서글픈 아리아였다.
4.
15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
서울 한강이 훤히 보이는 야경을 보며 이재희는 던전을 돌았을 때를 떠올렸다.
흐릿한 기억이었지만, 드높은 기세만큼은 선명했다.
‘…엄청났었지.’
아수라를 앞에 두고 꼿꼿이 선 그의 기세는 웬만한 S급 못지않았다.
아니, 기세로만 보면 그 이상일지도…
‘삼도류라… 설마 쌍검이 끝이 아닐 줄은 몰랐어.’
그 오만방자하던 아수라가 경악하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속이 다 시원했다.
한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 자루를 든 걸까? 입으로 든 건가?’
흐릿한 시야로 뒷모습만을 본 탓에, 자세까지는 보지 못했다.
그게 영 아쉬웠다.
자신의 검술에도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검’을 여자는 결코 사용하지 못하는 검임을 상상도 못하기에 가능한 아쉬움이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영입을 해야돼.’
최종택, 그를 구성으로 끌어들이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는 딱 자신이 원하던 인재였으니까.
그걸 제외하더라도 그가 보이는 성장세를 보면, 필히 영입하는 게 좋았다.
그러려면 무언가 메리트가 있어야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그가 구성에 올 이유가 없어.’
그의 삼도류를 보고 깨달았다.
자신이 호기롭게 건넸던 조건은 그에게 큰 메리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지원? 브리핑?
협회보다 질이 좋은 건 맞지만, 그뿐이다.
‘…권 노아. 그녀가 문제야.’
협회에게는 권 노아 표 무구라는 무기가 있으니까.
아무리 많은 지원을 해줘도 그녀가 만든 무기만한 가치는 없었다.
특히 그 대상이 최종택이라면 더더욱.
‘강자에게는 알량한 지원보다 강한 무기 하나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당장 자신만 해도 그렇게 여기는데 그는 어떻겠는가.
협회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협회에겐 없는 것은 질 좋은 던전과 파티원 정도인데…’
이 정도 무기론 부족했다.
막말로 그 정도 능력자면 A급 던전을 돈 주고 사면 되는 거니까.
그에게 있어 구성의 지원은 있으면 좋지만, 굳이 없어도 상관없는 정도의 가치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돈은?
‘돈에 연연하지는 않는 사람 같았지.’
구성이 가장 자신 있는 무기였지만, 재벌인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자는 돈보다 다른 걸 중요시한다고.
‘이번에 필드 던전을 가고나면 기회는 한 번이야.’
그 안에 쇼부를 쳐야한다.
막막한 현실에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아…”
늘 남들보다 우위에 서서 선택했던 그녀였다.
가만히 앉아서 바라보고만 있어도, 어떻게든 구성에 들어오고 싶어서 온갖 아부를 떨곤 했다.
그땐 그런 남자들이 한심하게 느껴졌는데…
‘이토록 원하는데 가질 수가 없다니…’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된다.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애 처음으로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 일방적인 부탁을 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어쩔 수 없지.’
결국 해답을 못 찾은 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찝찝함으로 가득했다.
‘상대하긴 싫지만… 자문을 구해보는 수밖에.’
일 하나는 잘하니까.
꾹 참고 호출하자 이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층에 있기에 금방 도착한 것이다.
“들어와.”
기다렸다는 듯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한 남자였다.
웬만한 모델보다 우월한 피지컬.
흔히 조각상이라고 부르는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였는데, 어딘가 차가운 인상이었다.
어딘가 이재희와 비슷한 고고한 분위기.
“네가 이 시간에 나를 호출할 줄은 몰랐는데.”
“…막히는 일이 생겼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조금 도와줘야할 것 같아.”
“무슨 일인데 그러지?”
이재현.
구성의 전 길드장이나 현 부길드장, 이재희의 친오빠였으니까.
이재희가 그를 부른 이유도 그래서였다.
“영입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인재 영입이나 관리는 잘하잖아.”
“흐음…”
이재현, 그는 과거 구성을 최강의 길드로 만들었던 이니까.
잠시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
“남자야?”
“응. 최종택이라고 S급 유망주로 유명한데…”
“아아, 누군지 알겠군.”
이해했다는 듯 이재현이 손을 내밀었다.
그게 자신이 발언하겠다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는 이재희가 입을 다물었다.
“그 남자라면 영입할 만하지. 네가 나를 불렀다는 건 지원으로 스카웃을 할 수 없다는 건데…”
“…맞아. 돈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았어. 권 노아 때문에 다른 지원으로도 승부를 보기 힘들어.”
“돈에 연연하지 않는다라……”
그 말에 이재현이 검지와 중지로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습관이었다.
“그럼 답은 하나네.”
답은 금방 나왔다.
이재희가 이어질 말에 집중하는 순간, 그의 입이 열렸다.
“자빠트려.”
“…?”
내가 뭘 들은 거지?
뒤늦게 말뜻을 이해한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장난 칠 때야?”
“장난 아니야.”
하나 이재현은 진지했다.
“예로부터 남자를 영입할 땐 미인계만한 게 없었지. 천하를 호령하던 장수인 여포도 미인계로 당했잖아.”
“……”
“돈에 연연하지 않는 남자는 많아도, 미인을 거부하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아.”
한데 그 말이 또 논리적이다.
듣다보니 그럴싸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재희가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친오빠가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하는 새끼가 어디 있냐?”
“나는 길드에 이득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게 구성이니까.”
“……”
이것도 오빠라고.
세상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열불이 난다.
이런 모지리에게 답을 구하려 했다니…
“하아…”
한숨을 내쉬며 분을 삭인 그녀가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이제 들어가.”
“그래.”
그에 묵묵히 돌아가던 이재현이 멈추었다.
그리곤 당부하듯 말했다.
“네가 이상하리만큼 남자에 관심이 없는 건 안다. 하지만… 네가 생각할 때 결코 놓치기 싫은 남자라면 갖은 수를 써서라도 가져. 순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
“그럼 가보마.”
제 할 말만을 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그녀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지만 맞는 말이었으니까.
길드장은 그 누구보다 길드를 생각해야한다.
하지만…
‘하아… 모르겠다. 우선 내일 있을 던전에 집중하자.’
고개를 흔들며 상념에서 벗어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11시가 넘었다.
내일 있을 던전을 생각하면 시간을 허비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이재희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천장을 바라봤다.
-네가 생각할 때 결코 놓치기 싫은 남자라면 갖은 수를 써서라도 가져
왜일까.
순간 그 말이 떠올랐다.
‘놓치기 싫은 남자라…’
잠시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디서든 당당한 모습과 기대 이상의강함. 위험이 닥칠 때도 잃지 않는 평정심과 도전정신.
…마지막으로 자신을 구해주었을 때의 패기까지.
‘…쓸데없는 말을 들었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그녀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었다.
내일이 던전이니 빨리 잘 생각이었다.
‘…잠이 안 와.’
한데 눈이 너무 선명하다.
수학여행 때 수다를 떨 때처럼, 정신까지 뚜렷한 게 각성제를 맞으면 이러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든 자려고 뒤척여 봐도 시간만 흐를 뿐.
오히려 점점 뚜렷해지는 걸 느낀 이재희가 이불을 턱 밑으로 내렸다.
“하아…”
결국 그녀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