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진(眞) 예나 (3)
86화.
“저… 각성했어요.”
“…예?”
뜬금없는 말에 절로 반문이 나온다.
섹스하다 갑자기 웬 각성이란 말인가. 황당함에 뭐라 말하려던 그의 머릿속에 한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아…, 난 딸 치다 각성했지.’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위하다 각성한 사람도 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지.
다만, 다른 의문은 있었다.
“그런데 각성이라니… 이미 각성했는데 그런 게 있나요?”
그때의 자신은 일반인에서 각성한 거니 그렇다쳐도, 예나는 이미 헌터이지 않은가.
무슨 2차 각성도 아니고.
각성을 두 번이나 한다는 게 이상했다.
“아… 그런 각성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조건…?을 만족했다고 하네요.”
“조건…”
순간, 백보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무슨 자격을 증명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고민하던 최종택이 이내 좀 전에 떴던 메시지를 확인했다.
뭐라도 짐작이 갈만한 게 뜨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최초로 그녀와 애정 어린 섹스를 했습니다.]
[그로 인해 상대의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상승하였습니다.]
“어…”
“혹시 집히는 구석이 있으신가요?”
최종택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오는 그녀에게 차마 진실을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이걸 뭐라하냐.’
너랑 처음으로 감정 있이 섹스해서 그래.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애당초 그리 많이 섹스를 했으면서도 애정 어린 섹스가 처음인 것부터가 문제였지만, 하여튼 그의 생각은 그랬다.
때문에 그는 말을 돌렸다.
“…크흠. 잘 모르겠네요. 그보다 뭐 어떻게 각성한 건데요?”
“아… 잠시 만요.”
확인해보는 듯 허공을 살피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손까지 바르르 떨던 그녀의 모습에 최종택이 더 조급해졌다.
“왜 그래요. 뭐길래 그래요?”
“저… 느, 능력치가…”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더 궁금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최종택이 엿보기 구멍을 사용했다.
[김예나]
[성별 : 여]
[나이 : 25]
[등급 : B]
[레벨 : 51]
[능력치]
[근력 : A (43 / 100)], [민첩 : A (63 / 100)]
[체력 : A (14 / 100)], [마력 : A (22 / 100)]
[상태 : 경악, 혼돈, 당혹, 기쁨]
[특이사항]
[마음이 충족되었음]
[자박꼼의 영향으로 각성함.]
[B등급 스킬 ‘샤프 아이’ 보유]
……
[A등급 스킬 ‘차징 피어싱’ 보유.]
[S등급 스킬 ‘유령시’ 보유.]
‘미친!?’
동시에 그의 눈이 예나 못지않게 커졌다.
‘능력치가 A등급이 됐다고?’
말도 안 되는 상승폭이었다.
전반적으로 능력치가 한 단계나 오른 거니까.
F등급에서 E등급으로 오른 거면 몰라도, B등급에서 A등급으로 오른 건 컸다.
실제로 최종택도 능력치를 올리는데 애먹고 있지 않은가.
‘S급 스킬은 또 뭐야?’
심지어 보상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A등급 스킬이 끝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S등급 스킬을 각성한 것이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이름.
“아아…”
그에 누구보다 충격이 큰 건 예나였다.
얼마나 노력했던가.
잠잘 시간도 아껴가며 훈련을 하고, 숙련도를 쌓아도 A등급의 문턱은 높았다. 민첩을 제외하곤 오를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아…”
그랬던 능력치가 올랐다.
강해진 것이다.
당장 몸 안에서 순환하는 기운부터가 전과는 달랐다.
서큐버스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힘.
“흐으윽… 으윽…”
한데 왜일까.
목표를 이루었음에도 눈물이 흘렀다. 허무함이나 박탈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감정은 정확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그저 이 감정에 몸을 맡겼다.
“흐윽…”
“……”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지는 않았다.
멀리서 보면 우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저 주저앉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최종택도 입을 다물었다.
‘…그간 신경을 많이 못 쓰긴 했었구나.’
어찌 보면 예나와는 초창기부터 함께한 인연이다.
훈련생 시절부터 붙어 다녔으니까.
자신을 위해 많은 방면에서 도와주었던 사람. 자신이 무신경했음을 깨달은 최종택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스윽.
무릎을 굽혀 눈을 마주친 최종택이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러고 있기를 잠시.
어느 정도 진정된 듯 보이자 조심스레 팔을 뗐다. 그러자 부끄러운지 예나가 휙 고개를 돌렸다.
주섬주섬 옷을 입는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초췌해보였다.
‘고생 많이 하셨구나.’
마지막에 봤을 때만 해도 활력이 돋았었는데.
지금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힘이 없다.
병약미소녀가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해야하나.
‘앞으론 더 신경 써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최종택이 손을 뻗었다.
가슴이 묵직해진 걸 느낀 예나가 흠칫 놀라더니 밑을 내려다봤다.
“……”
진지한 얼굴의 최종택과 그렇지 못한 손의 위치를 보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역시 최종택은 최종택이었다.
1.
다음날.
먼저 눈을 뜬 예나가 기지개를 켰다.
슬쩍 옆을 보니 최종택은 아직 자고 있었다.
[09 : 31 AM]
‘…깨우지 말자.’
감정이 복받쳐 올라 대화를 나누다 잔 탓에 아직 몇 시간 자지 못했다.
그중엔 몸의 대화도 있었으니 피곤이 상당하리라.
때문에 예나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움직이다 잠에서 깰까봐 염려한 것이다.
그 대신 빤히 자는 모습을 바라봤다.
‘…지금 보니 많이 잘생겨지셨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좀 풋풋한 훈남 느낌이었건만.
지금은 무르익은 열매처럼 탐스럽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무쌍처럼 보이는 속쌍, 날카로운 콧날과 뚜렷한 턱선까지.
같은 얼굴이라고는 생각이 들지만, 그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힐끔.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한 듯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겸 그녀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김예나]
[레벨 : 51]
[능력치]
[근력 : A (43 / 100)], [민첩 : A (63 / 100)]
[체력 : A (14 / 100)], [마력 : A (22 / 100)]
[유령시]
-등급 : S
-설명 : 공격속도가 빨라지고 관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마력을 소모할 시, 숙련도에 따라 방어력 무시와 같은 효과를 무시할 수 있습니다.
‘…대박이긴 하다.’
다시 봐도 영 적응이 안 된다.
이게 내 능력치라니.
‘S급 스킬은 처음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초조했었는데, 지금은 남의 얘기처럼 붕 떠있었다. 그녀의 눈이 묘한 빛으로 번뜩인 건 그때였다.
‘이건 나만 누려야할 게 아니야.’
마치 신문물을 처음 접한 유목민처럼.
동료들에게 공유해야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으으음…”
흠칫한 그녀가 바로 최종택을 바라봤다.
다행히 잠꼬대였는지 꼼지락거리다가 다시 뒤로 돌아서 베개를 안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보아 씨랑 아리아 씨를 불러야겠어.’
휴대폰을 꺼내 연락을 보내던 그녀가 옷을 챙겼다.
외투까지 걸치고 나가려던 그녀가 잠시 멈칫했다. 슬쩍 뒤를 보니 자신을 안았던 것처럼 베개를 꽉 안고 있는 최종택이 보였다.
스윽.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수첩을 꺼냈다.
“음…”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가 이내 무언가를 끄적이고 내려놓았다.
-아주 중요한 일이 떠올라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집을 나온 그녀는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그러자 연락을 받고 대기하고 있던 백보아와 아리아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급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 있어요?”
그중에는 걱정 어린 시선도 있었다.
다름 아닌 아리아였다.
어딘가 혼이 나간 것처럼 훈련실을 빠져나가더니, 다음날 갑자기 급한 일이라며 호출한 것 아닌가.
그녀로선 무슨 일이 터진 건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는 그런 일은 아닙니다. 저도 제가 멍청했다는 걸 깨달았으니…”
“아…”
예나가 그녀의 질문에 먼저 대답해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아리아의 안색이 편해졌다.
‘많이 좋아졌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더는 어제처럼 위험해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도를 깨우친 승려처럼 여유까지 느껴진다.
그에 아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인가? 뭔가 느껴지는 기운도 좀… 강해진 것 같은데…’
사람이 하루 만에 강해질 수가 있나?
조금이면 착각이라고 넘기겠건만.
‘조금 강해진 게 아닌 것 같은데…’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다.
한편 그런 둘을 백보아가 묘한 얼굴로 번갈아보았다.
저주 때문에 집에만 있던 탓에 그녀는 예나의 상태를 몰랐다.
하나 그녀가 누구인가.
‘무슨 일 있었나보네.’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그녀들이 어떤 일과를 보냈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판단을 마친 그녀가 슬쩍 위로를 건네주었다.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은 예나의 표정이 돌연 진지해졌다.
그에 자연스레 백보아와 아리아도 숨을 죽였다.
‘무슨 약을 한 건 아니시겠지?’
‘예나 씨가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평소 혼자 삭히는 타입인 그녀다.
그건 단순히 감정적인 것만이 아닌, 일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일로는 도움을 청하지 않는 그녀가 소집까지 할 정도라니.
과연 무슨 얘기가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그때.
“저…”
이윽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토씨 하나도 흘려듣지 않을 기세로 대화에 집중했다. 그런 그녀들에게 예나가 선고하듯 말했다.
“…어제 종택 씨랑 했습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선고를.
한참을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아리아가 이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런 그녀의 얼굴은 확 달아올라있었다.
사실 그녀도 알곤 있었다.
최종택이 자신하고만 하는 게 아니라, 두 동료와도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걸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다고 저리 선포하듯 말할 건 없지 않은가.
아리아가 도움을 바라는 눈빛으로 백보아를 바라봤다.
그러자 보였다.
“아, 저는 그제 했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보아의 모습이.
“…??”
“아…?”
전혀 예상치 못한 발언에 아리아는 물론 예나마저 당황한 듯 얼 탄 얼굴이 되었다.
씨익 웃은 그녀가 한 발짝 다가와 물었다.
“그럼 예나 씨도 능력치가 오르셨겠네요.”
“…예. A등급이 되었습니다. 그럼 혹시 보아 씨도……”
백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묘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녀들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배를 탄 동지와도 같은 모습.
“…??”
그 배에 타지 못한 건 아리아뿐이었다.
이게 뭐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드디어 깨달은 그녀가 펄쩍 뛰었다.
“두, 둘만 언제 했어!”
자신만 빼고 귀신같이 했다는 소리 아닌가!
어찌나 배신감이 들었는지 습관처럼 하던 존대도 나오지 않았다.
사실 산타는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치가 떨리는 상황.
하나 그녀들은 대답해주지 않았다.
“제 능력치가 지금 A급으로 올랐습니다. 보아 씨는 어때요?”
“저도 처음으로 능력치가 올랐어요. 덕분에 이제 성장이 가능해졌어요.”
“과연…”
그저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눌 뿐.
“종택 씨는 어때요?”
“종택 씨는 구성에 가지 않을 거라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보가 구성에 들어가면 어찌될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둘을 부른 것도 있습니다. 그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았어요.”
어찌나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지 노발대발하던 아리아도 멈칫할 정도였다.
왠지 뻘쭘해진 아리아가 티 나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조용히 대화를 들었다.
“종택 씨의 능력이 저희의 생각보다 더 뛰어나요. 능력치가 오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오른다는 걸 알게 되면 구성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입하려할 거예요.”
“건전한 방법이면 좋겠지만… 이득이 중요한 그들이라면 어찌될지 모르죠.”
한데 통 이해되지 않는 말 투성이었다.
결국 아리아가 손을 들며 물었다.
“저는 종택 씨랑 하면 능력치가 크게 안 오르던데… 어떻게 해야 그렇게 오르나요?”
수업시간에 질문하는 법 수칙을 완벽하게 지킨 모범적인 자세.
그에 감격했는지 예나가 처음으로 대답해주었다.
“애정 어린 섹스가 있어야합니다.”
“……?”
동시에 아리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럼 나랑 했던 건 뭐야?’
당황해서 어버버거리고 있는 사이, 백보아가 감탄하며 대답했다.
“아… 대단했죠.”
“맞아요.”
그걸 또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예나.
침울한 얼굴로 그런 둘의 모습을 보던 아리아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나만 없어 종택이…’
마음이 너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