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성녀의 조건 (4)
76화.
4.
다음날.
따사롭게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뜬 최종택이 몸을 돌렸다.
'…어?'
그러자 웬 여신이 보였다.
거품 속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가 이랬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그런 여자가 나체로 누워있었다.
흠칫 놀랐던 그가 이내 백보아라는 걸 자각하곤 떠올렸다.
'아… 맞다. 같이 잤지.'
그녀와 진한 밤을 보냈던 기억을.
'저 요망한 여자랑 할 줄이야…'
이상하게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한테만큼은 쉽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집요하게 장난치곤 했는데…….
세상만사 모르는 거라더니 결국 그녀와 하게 되었다.
'기분이 이상하네.'
처음 겪는 감정이었다.
진희 누나와 한 다음 날에는 서로 어색하기 그지없었는데 지금은 가슴이 간질간질한 묘한 느낌이다.
"……"
그래서일까.
최종택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속눈썹이 되게 길구나. 피부도 생각보다 더 하얗고.'
가지런한 눈썹부터 촉촉한 입술까지.
마치 탐닉하듯 천천히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이내 그 밑으로 내려왔다.
잡티는커녕 털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였다.
'…아름답다.'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신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몸이었다.
그래서 더욱 더럽히고 싶은 욕망이 드는 몸.
띠링-
[풀발이 발동되었습니다.]
당연히 밑에도 힘이 들어갔다.
평소라면 다시 덮쳤을 그였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자네. 하긴, 피곤할 만했지.'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자게 괴롭혔었으니까.
아파 보였던 어제와 달리 한결 편안해진 얼굴을 보니 절로 흐뭇해졌다.
'자게 두고, 나도 밀린 거 확인해야지.'
어제 그녀와 하고 난 후.
수많은 메시지가 떴었는데 흥미로운 보상이 많았다.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보상을 확인할 분위기가 아니라 넘겼는데 어제부터 쭉 궁금했다.
[최초로 애정 어린 섹스를 했습니다.]
[최초 보상이 주어집니다.]
저 최초 보상이.
한데 유심히 보다 보니 괜히 민망해졌다.
'크흠…, 처음이라니 거참…'
마치 지금까지의 그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하여튼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을 차린 그가 곧장 최초 보상을 확인했다.
[스킬 '애무'를 획득하셨습니다.]
[애무]
-등급 : SS
-설명 : 시작과 끝.
-체위술의 상승기법으로, 체위술을 보유해야 합니다.
'…그래. 애무도 중요하지. 왜 안 나오나 했다.'
체위술도 있고, 풀발도 있는데 애무 정도야….
이제는 익숙한 상황에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름에 대한 충격보다는 능력에 대한 충격이 더 컸다.
'체위술? 체위술의 상승기법이라고?'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애무 다음이 체위잖아! 그럼 당연히 체위가 다음 단계여야 하는 거 아냐?'
그의 정신 상태가.
그렇게 헛소리를 지껄이던 그가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거렸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음. 하긴, 체위보단 애무가 더 중요하긴 하지.'
역시 정상은 아니다.
하지만 굳이 따지면 틀린 논리는 아니었다.
섹스에서 애무가 빠진 건 팥 빠진 단팥빵이나 다름없으니까.
시스템도 그렇게 생각하니 무려 SS등급이라는 등급을 배정한 것 아니겠는가.
'애무라……'
그런데 상상이 안 가긴 한다.
대체 무슨 스킬일까.
설마하니 진짜 상대를 애무해주는 스킬일 리는 없고.
'체위술과 비슷할 것 같긴 한데…'
한참을 고민해보던 그가 이내 스킬 창을 닫았다.
'나중에 써보면 알겠지.'
지금은 그것보다 다른 보상을 확인할 때였다.
전체적으로 메시지를 훑어보던 그가 이내 상태창을 켰다. 딱 이렇다 할 보상이 능력치밖에 없었던 탓이다.
[최초로 애정 어린 섹스를 했습니다.]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한데 그 상승 폭이 심상치 않았다.
[이름 : 최종택]
[레벨 : 38]
[능력치]
[근력 : S (10 / 100)], [민첩 : A (65 / 100)]
[체력 : A (50 / 100)], [마력 : S (0 / 100)]
[풀발이 적용된 상태입니다.]
'어? 잠깐만.'
상태창을 본 최종택이 눈을 부비적거렸다.
'씨발?'
눈 씻고 봐도 그대로였다.
그 경이로운 광경에 최종택이 감탄을 흘렸다.
"와씨… 쌌다."
S등급이 두 개였다.
심지어 다른 능력치도 눈에 띄게 올라간 상태.
서큐버스 때가 특별했지, 그 전까지 더럽게 오르지 않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일이다.
최종택이 정신을 못 차리고 어깨춤을 출만한 일.
'씨발, 이대로만 가면 S급 금방 찍겠는데?'
점점 목표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강해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본인이 생각해도 경이로운 성장 속도에 감탄을 흘리고 있을 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잉?"
언제 일어난 거지?
눈 뜨자마자 소리친 것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건 그 후였다. 고개를 돌리자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떠는 그녀가 보였다.
"왜 그래요!?"
"느, 능력치가 올랐어요!"
"뭐라고요?"
덩달아 놀란 그가 바로 엿보기 구멍을 사용했다.
[백보아]
[성별 : 여]
……
[능력치]
[근력 : C (0 / 100)], [민첩 : C (0 / 100)]
[체력 : C (0 / 100)], [신성력 : S (64 / 100)]
'진짜네?'
심지어 조금 오른 것도 아니다.
세 개의 능력치가 3단계나 상승한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다.
'나랑 하면 오르는 건 알지만… 이 정도나 오른다고?'
이거 형편성에 어긋난 거 아닌가?
왜 본인보다 상대가 더 오른단 말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좀 더 생각해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지, 교관님이랑 피카츄 새끼는 그렇게까진 안 오른 것 같던데…'
그와 했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만약 단순히 그와 한 것 때문이라면 S급 헌터 한두 명 나왔어야 했다.
이건 필히 백보아에게 무언가 있다는 뜻.
'설마?'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는 금방 감이 왔다.
['???'가 당신이 그녀를 구원해주길 원합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구원해달라고 했었지?'
정확히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그녀와 하기 전 그런 메시지가 떴었다.
자신만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다고.
아무래도 그녀와 자신 사이에 무언가 관계가 있는 듯했다. 그게 뭘지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무언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윽! 히으…"
'…응?'
뭔가 하고 보니 백보아가 주저앉아서 울고 있다.
한데 너무 서럽게 운다.
나라 잃은 백성도 저 정도로 서글프게 울진 못할 정도로 광광 울고 있었다.
"왜, 왜 울어요?"
"흐아아앙-!"
당황해서 묻자 아예 목 놓아 울어버린다.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파묻은 것이다.
최종택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다.
'내, 내가 뭘 잘못했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
주마등처럼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많아서 모르겠네.'
잘못한 게 한두 개여야지.
차라리 잘못하지 않은 걸 꼽으라는 게 훨씬 수월할 지경이었다.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고마워요."
"…예?"
"흐윽, 저도 이제… 누군가를 지킬 수 있게 됐어요."
펑펑 운 탓에 잠겨있는 목소리에 짙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성녀의 자격을 획득합니다.]
[신의 은총이 당신을 휘감아 이로운 효과만 남깁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성장할 수 있습니다.]
줄곧 그녀를 옥죄었던 족쇄가 풀렸으니까.
자신을 따라다니던 저주가 풀리며 닳아가던 마음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그 무게는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건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이 사람을 조금만 더 빨리 만났더라면… 이걸 조금만 더 빨리 얻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애써 외면하던 감정이 물밀 듯 터져 나왔다.
그 무게는 결코 적지 않았다.
"흐아아아앙!-!"
"어어…"
그리고 그 무게만큼 그녀는 울음을 터트렸다.
묵혀두었던 감정을 원 없이 쏟아내며 그녀는 굳게 다짐했다.
'강해질 거야. 앞으로는 신부님과 수녀님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다시는 같은 비운을 겪지 않으리라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겠다고.
그것은 저주를 받은 어린 자매가 아닌, 성녀로서의 다짐이었다.
"어버버……"
그런 그녀의 앞에서 최종택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5.
퍼엉!
인공지능 과녁이 터져 나갔다.
[Perfect!]
[최고기록 달성! 축하합니다!]
그리고 뜬 메시지.
훌륭한 성적이었지만, 그걸 지켜보는 예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오히려 밝지 못한 수준을 넘어 어둡게 가라앉아있었다.
'…부족해.'
며칠을 틀어박혀 훈련만 했다.
그 덕에 사격 실력도 늘어 이제는 400m가 넘는 거리에서도 중앙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속사의 숙련도도 한 등급 올랐고.
하지만…
'능력치가 오르지 않아.'
가장 중요한 게 요지부동이다.
사실 이게 당연했다.
B등급 정도 되면 웬만한 훈련으론 능력치를 올릴 수 없으니까.
백날 실전경험을 쌓아도 잘 오르지 않는 능력치가, 며칠 사이 훈련으로 늘 수가 있겠는가.
'나도 알아. 알지만……'
예나도 안다.
이건 터무니없는 요구라는 것을.
'하지만… 종택 씨는 저렇게 강해졌잖아. 그런데 난 왜…'
그 터무니없는 걸 매일 해내는 최종택이 이상한 거다.
그걸 알지만, 서글픈 건 어쩔 수 없었다.
한낱 학생이었던 그가 교관인 자신보다 강해져서?
아니.
'이대로는… 옆을 지킬 자격이 없어.'
그런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자신이 서글펐다.
미치도록 분했다.
자신의 재능은 겨우 이 정도라는 것이.
뚝. 투둑.
눈 밑이 뜨거워지더니 이내 무언가 떨어졌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친 그녀가 다시 활을 들었다.
'더 강해져야해.'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반면,
'예나 씨 요즘 너무 무리하는데… 괜찮으실까.'
그녀를 뒤에서 바라보는 아리아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6.
150평이 넘는 펜트하우스.
벽 한 면이 전부 창문으로 트여있는 곳에 전화를 받는 여자의 모습이 비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
창문을 보며 다리를 꼰 그녀가 의자 팔걸이에 기댄 채 머리를 괬다. 발가락은 여유롭게 꼼지락거렸다.
-그럼 날을 잡으면 연락 주시길.
"예. 알겠습니다."
이윽고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전화를 끊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분위기를 바꾼 그녀가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런 그녀가 질문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대답했다.
"언제든지 괜찮다고 합니다."
그에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은 그녀가 의자를 돌렸다.
어느새 진지해진 그녀의 눈이 세바스찬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내일 당장 나오라 해요. 나도 궁금하니까."
"예."
"그리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눈으로 말했다.
"준비는 최상으로 해주세요. 우리 이름에 걸맞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