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몽마? 어림도 없지! (4)
67화.
8.
극심한 분노.
풀발 2단계에 이르게 하는 근본적인 장치.
오랜만에 비아그라 없이 그 경지에 도달한 최종택은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
그리고 그때는 이미 전투 중이었다.
정확히는, 전투 후 간을 보듯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투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던 건 상처와 몸 상태 때문이었다.
암살자들의 비늘에 약간의 상처가 있었고, 자신의 몸에도 생채기가 나 있는 것과 함께 몸이 가벼웠던 것이다.
'테크닉 모드?'
그에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을 잃었었나….'
확실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남자로 태어난 이상 참을 수 없는 게 정상이었으니까.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러지?'
한데 이 싸늘한 시선은 뭘까.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기분에 최종택이 멈칫한 사이 암살자들이 움직였다.
빈틈이라 판단한 것이다.
슈욱-!
한데 달려오는 폼이 특이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교차하듯 8자를 그리며 달려드는 게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린 사이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쉬익-
갑작스레 휘둘러진 단검에 최종택이 검을 들었다.
장검과 단검이 부딪히며 쇳소리를 냈다.
한데 이상했다.
'…한 놈밖에 없어?'
분명 두 명이 날아왔는데, 막상 막고 보니 한 명이었다.
'어떻게…!'
환각이었나?
당혹스러운 것도 잠시.
빠르게 사방으로 휘둘러오는 단검에 최종택이 다급히 검으로 막았다.
파앗!
"…!"
"조심해요!"
그러는 사이 다른 암살자가 백보아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엄청난 속도.
눈 깜빡할 새에 코앞으로 다가온 모습에 아리아가 급히 방패를 들었다.
"도발!"
[일반적인 도발이 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녀의 도발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를 악문 그녀가 급히 방패로 밀쳤지만, 암살자의 반응이 한 발 빨랐다.
스윽-
마치 뱀이 다리 사이를 지나가듯.
유연하게 공격을 회피한 암살자가 곧장 백보아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아, 안 돼!"
아리아의 외침에 최종택이 온힘을 다해 검을 튕겨냈다.
거리를 벌린 그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백보아의 놀란 얼굴과 뱀처럼 목을 노리는 암살자의 모습이.
'안 돼!'
안색이 창백해진 최종택이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도발!"
그리고 깨달았다.
도발이 통했으면, 같은 스킬을 가진 아리아가 진작 막았으리란 것을.
아니나 다를까.
[일반적인 도발이 통하는 상대가 아닙니다.]
'이런…'
어김없이 뜬 메시지에 최종택이 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가다간 백보아가 죽는다.
그 사실에 불안해진 최종택이 다급히 손을 뻗었을 때였다.
띠링-
'응?'
예상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다.
[일반적인 도발이 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무한정력과 도발이 합쳐지며 시너지가 발동됩니다.]
'…어어?'
그와 동시에 무언가 밑으로 향하는 기운에 당황하길 잠시.
이내 그의 고간에서 무언가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찍-
익숙하다 못해 정겨운 소리.
한데 그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소리가 들린 것과 당시에 얼굴을 얻어맞은 암살자가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
그녀의 얼굴이 멍했다.
자신이 맞고도 무엇에 맞았는지 모르는 모습.
이내 얼굴을 닦아내 손바닥을 확인한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따듯하고 하얀 액체였다.
심지어 끈적하다.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신성한 기운을 뿜어내는데도 더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마족이라서는 일단 아닌 것 같다.
생명체라면 더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
-……
정적이 가라앉았다.
그 속에서 최종택의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와… 이건 나 같아도 좀…"
"…잔인한 사람."
죽을 뻔한 백보아가 그렇게 말할 정도.
모두의 시선이 하얀 액체를 묻히고 있는 암살자를 향했다. 그중에는 아리아도 있었는데, 왠지 표정이 오묘했다.
"……"
묘한 동질감이 보이는 얼굴.
그 시선을 마주한 암살자가 전의를 상실한 듯 허망하게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찌그러진 건 그때였다.
-용서할 수…없다…
그것은 최강의 도발이었다.
눈앞에 먹기 좋은 사냥감이 있음에도 그녀의 눈에는 최종택만이 들어왔다.
그녀가 최종택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인다… 죽인다…!!
부모님의 원수라도 되는 듯 충혈된 눈빛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았다.
썩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어그로 끌었다, 개꿀.'
도발이 완벽하게 통한 거니까.
하지만 나쁜 상황이 아닌 건 최종택을 상대하던 동생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니가 상대하는 동안 뒤를 노리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다른 놈을 노리면 나도 저렇게 되겠지.'
그건 죽어도 싫었다.
'언니를 봐. 눈이 돌았어.'
늘 냉정하고 객관적이던 언니였건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모습에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판단은 빨랐다.
'이 새끼부터 처리하자.'
그녀가 언니와 합세했다.
그런 둘의 합공에 최종택도 결국 검 한 자루를 더 꺼냈다.
던전에 입장하기 전 예나에게 받았던 그 검이었다.
쉬익- 팡!
깡! 까강!
그의 검이 쉴새 없이 움직였다.
마치 제공권처럼.
단검이 일정 거리에 들어올 때마다 그의 검이 순식간에 막거나 흘려냈다.
마치 얇은 막이 씌워진 것처럼 공격이 닿지 않는다.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급소를 노려올 거야.'
상대는 노련한 암살자.
괜한 틈을 보였다간 순식간에 승패가 뒤집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공격을 안 하고선 승리할 수 없는 법.
하나, 그는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다.
슈욱!
팍! 파바박! 팍!
쉴새 없이 화살이 날아왔으니까.
한데 좀 이상했다.
속사를 쏘아내던 예나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안 피하지?"
아무리 쏴도 피하지를 않는다.
마치 이 세상에 최종택과 그녀 단 둘뿐이라는 듯 몸이 화살투성이가 되어도 고개 한 번 안 돌린다.
-크아아! 죽인다!!
-어, 언니… 심정은 알겠는데 피해…! 아니면 죽어!
-죽어도 죽인다!!
-아아…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최종택이 감탄을 흘렸다.
'아아… 이것이 최강의 도발인가.'
미친 성능이었다.
하나 그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최종택이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나도 슬슬 한계야…'
조금씩 힘에 겨운 게 느껴졌다.
한 놈 한 놈이 리치보다 강력한 놈들이니 당연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의 방어도 깨질 터.
'엘리전이네.'
그녀가 예나의 화살에 먼저 쓰러질지, 자신이 먼저 무너질지.
그 싸움이나 마찬가지였다.
조금씩 밀리는 최종택의 모습에 아리아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나도 도와줘야 하는데… 낄 수가 없어.'
그녀가 끼기엔 너무 빨랐다.
다시 테크닉 모드가 된 최종택과 두 암살자의 움직임은 눈으로 쫒기도 버거웠다.
'종택 씨에게 맡길 수밖에 없어…'
무력했다.
눈앞에서 싸우고 있음에도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을 후볐다.
그러던 그때.
까앙!
"크윽…"
양쪽에서 강하게 꽂히는 공격에 최종택이 침음을 흘렸다.
손이 저릿했다.
당장이라도 검을 놓고 싶었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타앗-
그가 멈칫한 사이 동생 암살자가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든 것이다.
-언니의 복수다…!
막기에는 늦은 상황에 최종택이 이를 악물었다.
'젠장, 손이 모자라… 어?'
그때, 최종택의 뇌리가 번쩍였다.
무언가 엄청난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가며 메시지가 나타났다.
띠링-
[체위술 극의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극의…?'
뭔가 감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손이 없다면 발로 해라…!'
부록에도 실려 있는 유명한 말.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남자는 발이 세 개지.'
이윽고 그가 힘차게 골반을 튕겼다.
"고간포!"
-…!
그와 동시에 눈부신 빛이 고간에서 뿜어져 나왔고, 암살자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콰가가가가-!
"미친!"
"헐…"
그 엄청난 광경에 모두가 감탄했다.
퍽!
-크헉…!
빛이 사라졌을 때, 그녀는 벽에 처박힌 후였다.
-크아아!
걱정할 법도 하건만.
아직도 도발에서 벗어나지 못한 언니는 여전히 광분한 상태였다.
하나 아까와 같은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상처 입은 짐승이 포효를 지르는 것과 같았다.
"야, 마족."
그런 그녀에게 파고든 최종택이 씨익 웃었다.
"넣을게…"
그러며 검을 찔렀다.
푸욱!
가슴 깊숙이 박힌 검에서 묘한 울림이 느껴지는 것과 동시에 최종택이 나직하게 말했다.
"체위술… 74…"
파아아앙!
그 말을 끝으로 암살자가 터져 나가며 굉음이 터졌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여자가 소리쳤다.
-언니!!
이성을 잃은 듯 비틀거리는 몸으로 허겁지겁 달려드는 그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언니의 정신을 무너트리고 끔찍하게 죽인 저 남자가.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이젠 더 이상 '명령' 때문이 아니었다.
원한만이 남아있을 그때.
키이잉-
펑!
-…어?
거대한 화살이 그녀의 배를 관통했다.
이내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왜?'
그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뒤집힌 시야 속에서 구멍 뚫린 자신의 몸이 보였던 것이다.
그게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스윽.
"해치웠습니다."
죽음을 확인한 예나가 활을 집어넣었다.
그에 최종택이 감탄했다.
'오우야.'
활을 등에 메며 드러난 라인이나 상황이 너무 섹시했다.
'교관님이 이쁘긴 해.'
그간 일이 많아서 자각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비현실적인 외모긴 했다.
뭐 이들 중 비현실적인 외모가 아닌 사람이 있겠냐만.
"후우…"
한숨을 내쉰 그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개빡셌다.'
결과적으론 나름 쉽게 잡긴 했지만, 중간보스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도발이 없었다면 큰 피해를 받았을 터.
어쩌면 일행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높은 확률로 그랬을 거다.
'…분해.'
'결국 아무 것도 못했어….'
'보아 씨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그녀들로선 분한 일이었다.
지독할 정도의 무력감.
'지금도 이런데 종택 씨가 더 강해진다면…'
아니, 당장 이번 던전의 보스를 만나기라도 한다면….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최종택의 생각도 그녀들과 비슷했다.
'지금 이대로는 위험해.'
짐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충분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까.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큰 도움이 될 때도 많았다.
다만…,
"확실히 파티가 지원 사격할 수 있는 게 너무 적네요. 한 명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생각입니다."
"확실히 안정성이 떨어지긴 해요."
최종택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거렸다.
특히 후방을 맡은 백보아와 예나의 공감이 더욱 컸다.
지금처럼 암살자를 만날 때 무력해지는 상황은 확실히 위험했으니까.
"일단 가볼까요."
"그 전에 힐부터 받아야죠."
최종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백보아가 얼른 다가왔다.
손에 맞닿은 팔에서 따듯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졸음이 느껴질 정도의 편안함.
긴장이 풀려서 몸이 나른해진다 싶을 땐 이미 상처가 모두 치유된 후였다.
'뭐야, 몸이 너무 가벼운데?'
심지어 컨디션까지 멀쩡해졌다.
전투 전 수준으로 회복된 건 아니지만, 거의 그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와…S등급 스킬이 확실히 사기긴 하다.'
보통 치유를 많이 받으면 오히려 몸 상태가 안 좋아진다.
치유의 개념 자체가 재생력을 높인 거니까.
한데 그녀의 치유는 궤가 달랐다.
굳이 표현하지만 재생이 아닌, 과거로 돌리는 듯한 느낌이랄까.
'원거리에서 펑펑 쓸 수 있으면 개사기일 텐데… 그게 아쉽네.'
하긴, 그랬으면 S등급이 아니라 SS+는 됐곘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사이 치유를 마친 백도아가 아리아에게 다가갔다.
탱킹을 하느라 다신 상처가 큰 탓이었다.
부분부분 찢어진 곳에서 여린 살결이 드러난 채 맞닿은 둘이 뭐라 얘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음.'
여러모로 보기 좋은 광경을 흐뭇하게 보고 있을 때였다.
파앗!
"…!"
"!?"
갑자기 시야가 밝아졌다.
태양을 직접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눈부신 빛이 세상을 덮었다.
"뭐, 뭐야 이게!"
"이게 무슨 일이죠?"
그 놀라운 상황에 최종택이 본능적으로 밑을 내려다봤다.
'난 아닌데.'
일단 자신이 범인은 아니었다.
다행히 범인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치지직-
"…어?"
발밑에서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며 마법진이 그어졌으니까.
그에 당황하는 사이 메시지가 떴다.
띠링-
[몽마의 마법이 발현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전이가 시작됩니다.]
"…전이?"
"미친…!"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시야가 바뀌었다.
음침한 동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촛불이 켜졌다.
벽면에 줄지어 놓인 촛불이 켜지며 은은한 조명이 내려와 동굴의 모습을 밝혔다.
붉은 침대 하나와 묘한 욕실 하나.
"…뭐지?"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풍경을 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정도도 예상 못 했어?]
작게 웃는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아이가 모유를 찾듯이, 의식하기도 전에 그의 고개가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아무리 내가 본래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이곳의 주인은 나라고.]
"아…"
그러자 보였다.
모든 남자가 상상하던 꿈의 악마.
딱 우리가 상상하는 그 서큐버스가.
마치 상상 속에 있는 걸 그대로 실사화 시킨 듯한 모습에 최종택이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인간답지 않은 가슴과 라인에 최종택이 인간답지 않은 반응을 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
그는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