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지리는 마력 (3)
57화.
"이, 이거 설마…? 히이익! 더, 더러워!"
최종택의 발언에 아리아가 발작을 일으켰다.
정액으로 착각한 모양.
한데 발작하는 움직임이 조금 이상했다.
얼굴을 붉히며 다리를 배배 꼬는 게 발작인지 흥분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그 황당한 모습에최종택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힐이야, 병신아."
"히익! 그런 야한 말을…!"
"…??"
아무래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듯하다.
그런 둘을 꽁트를 바라보던 예나가 문득 의문을 표했다.
"…굳이 힐을 얼굴에다 쏘나요?"
"……"
동시에 최종택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녀의 말대로굳이 얼굴에 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본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행위.
그런 그를 대신해 대답해준 건 백보아였다.
"취향이신 거 같은데 이해해드리죠."
"아아…"
그러자 예나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최종택이 화제를 돌렸다.
"…일단 저놈들부터 잡죠."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백보아의 반응에 최종택이 눈살을 찌푸렸다.
한 번 넘어가주겠다는 걸로밖에 안 보였던 탓이다.
'언제 한 번 꼼짝 못하게 한다, 내가.'
물론 속으로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분노를 터트린 대상은 백보아가 아닌 몬스터였다.
-…?
끄어어?
그의 이글거리는 눈과 마주친 몬스터들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직 좀 전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쿵. 쿵. 쿵. 쿵.
끄어어어!
금새 정신을 차린 스켈레톤 메이지가 흉포한 기운을 뿜어냈다.
웬만한 B등급 보스에 필적하는 기운.
일개 중간보스라고는 믿기지 않은 기세였지만, 그에 압도되는 이는 없었다.
"아까는 잘도 기습했겠다…! 이 비겁한 몬스터! 혼쭐을 내드리죠!"
"다시 넣을게요, 버프."
"…지원사격 준비되었습니다."
오히려 의욕을 불태웠다.
그런 그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최종택이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뒤졌다. 딱 대라."
-……
그에 놈들이 주춤 물러난 건 단순히 착각은 아닐 것이다.
6.
[스켈레톤 메이지를 처치하셨습니다.]
[리치가 당신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중간 보스를 처치하고 나타난 메시지.
그에 최종택이 반사적으로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저기인가.'
좀 전까지 느껴지지 않았던 삭막한 기운이 전해져왔다.
이게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화났나 보네.'
아끼는 수하를 죽인 최종택 일행을 부르는 것.
아마 찢어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을 거다.
'원하던 바지.'
그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이템이 드랍되었습니다.]
'일단 템부터 확인해야지.'
지금은 보상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중간보스이긴 하나 명색이 B등급 던전이다.
제법 쓸만한 템을 기대해볼 법했다.
그런 기대와 함께 놈에게서 나온 템들을 확인한 최종택이 손뼉을 쳤다.
[본 오브]
[스켈레톤 나이트의 갑옷]
[스켈레톤 메이지의 로브]
[나이트 견갑]
'오오?'
완제품이 네 개나 드랍된 것이다.
'확실히 언데드들이라 그런가 완제템이 잘 나온다.'
엄청난 일이었다.
일반적인 B등급 던전에서 보스를 잡고 나오는 완제템이 2~3개 정도였으니까.
운이 나쁠 경우 하나밖에 안 뜨는 경우도 있다.
'대신 재료 아이템이 하나도 안 뜬 건 좀 아쉽긴 하네.'
재료 아이템도 유용하게 쓰이는 걸 생각하면 다소 아쉽긴 했다.
하지만 최종택은 더 욕심부리지 않았다.
겨우 중간 보스를 잡고 완제템이 4개나 나왔는데 재료까지 바라면 그건 도둑놈이다.
"흠… 하나씩 나누면 딱이겠네요."
"다들 혹시 원하는 아이템이 있나요?"
예나의 말에 최종택의 시선이 한 아이템에 꽂혔다.
처음부터 눈여겨보던 템이었다.
[본 오브]
[등급 : B]
[설명 : 스켈레톤 나이트의 뼈에 마력을 숙성시켜 만든 오브.]
[스켈레톤 메이지가 애용하던 무기로, 신성력을 낮추고 마력을 높여준다.]
[신성력 관련 – 50%] [마법 데미지 + 12%]
[마법 스킬 크기+10%][마나 회복 속도 + 25%]
[단, 착용자는 받은 데미지의 10%만큼 30초간 추가 출혈데미지를 입음.]
[다른 효과와 중복 적용 가능]
스켈레톤 메이지가 들고 있던 오브였다.
다른 아이템이 C등급인 것에 비해 혼자 B등급을 자랑하는 무기.
그렇다고 단순히 등급이 높아서 끌린 건 아니었다.
'마법 데미지랑 크기 증가면 고간포도 강해지는 거 아닌가?'
효과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지금도 범위와 데미지가 그 정도인데, 증가하면 얼마나 커진단 말인가.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다른 효과와 중복 적용 가능]
'크으… 지금 상태에서 추가로 커지는 거면 얼마나 쩔까?'
데미지의 10%만큼 추가 피해를 받는 건 타격이 컸지만, 충분히 감수할 만한 리스크였다.
그걸 알기에 일행들도 미련 없이 그에게 무기를 넘겨주었다.
"신성력이 내려간다는 게 아쉽네요. 대신 저는 로브를 가져갈게요."
"그래요."
백보아는 다소 아쉬운 눈치였지만, 로브를 챙긴 걸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저게 C등급 이하 상태이상 면역이랑 마나 회복 속도 증가였지?'
능력치가 낮은 그녀에게 제격인 아이템이었다.
그렇게 두 명이 아이템을 고르자 자연스레 남은 아이템이 배분되었다.
무거운 갑옷은 아리아, 다소 가벼운 견갑은 예나였다.
"마침 견갑은 없었는데 다행이군요."
"흐음, 좀 답답하긴 한데 튼튼하긴 하네요."
다행히 그녀들도 만족스러워했다.
아이템 분배를 마치고, 각자 장비를 교체하고 있을 때.
최종택의 시선은 복도 너머에 머물렀다.
정확히는, 그곳에 있는 보스 방에.
스으으-
흘러나오는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그에 장비를 교체한 세 여자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쪽을 향했다.
"느껴지는 기운이 상당하네요."
"리치면 상위종이니까요. 흑마법사라 까다롭기도 하고,"
그들의 대화를 듣던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치라…'
소설책에 나오는 전설적인 존재는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던전의 리치는 흑마법사였다.
그것도 제법 강한 힘을 가진 흑마법사.
언데드이면서 언데드를 부리는 군단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런 놈을 잡을 때 가장 중요한 건 하나였다.
"시간을 주면 위험하니 빠르게 처리하도록 하죠."
"그래요. 그게 좋겠네요."
시간.
흑마법은 기본적으로 주문을 외는 게 오래 걸린다.
대신, 한 번 발동이시작됐을 때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함정만 조심하면 되겠어요."
"제가 다 막아드릴게요! 혹시 모르니 보아 씨는 조금 있다가 들어와요!"
그렇게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묵묵히 듣고만 있던 최종택의 진지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들, 할 말이 있습니다."
"말해요."
"이번 보스, 저 혼자 잡겠습니다."
"…?"
최종택, 그의 주인공 병이 돋았다.
이세계를 구하기 위해 여신의 계시를 받고 지구에서 온 용사처럼 결연한 얼굴.
그 앞에서 그녀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심정을 한데 모아 입 밖으로 꺼내준 건 아리아였다.
"혹시 병신이세요? 탱커 없이 어떻게 잡아요!"
실로 타당한 말.
하나 최종택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반박했다.
"그러는 탱커가 나한테 졌잖아."
"……"
그러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아리아.
뭐라 반박하고 싶은지 연신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던 그녀가 이내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인다.
그녀 대신 말을 이어준 건 예나였다.
"위험할 겁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생각해서 한 말이에요."
하지만 최종택의 입장은 확고했다.
사실 그가 생각 없이 이러는 건 아니었다.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떠오른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디까지 통하는지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기도 하고.
"후우."
확고한 눈과 마주한 예나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대신 위험하다 느끼면 언제든 끼어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휴, 정말 고집불통이네요."
묘한 눈으로 일행들을 바라보던 백보아도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요. 리더 말에 따라야지."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이자 아리아가 끙끙 앓는 소릴 했다.
"아니… 다들 그렇게 나오면 어떡해요! 에효… 난 몰라요. 나중에 도와달라 하지나 마요!"
"그래."
결국 그녀까지 허락한 상황.
모두의 동의하에 최종택이 결연한 얼굴로 보스 방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다.'
그의 플랜대로라면 완벽했다.
설령 위험해지더라도 현재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무엇보다 언제든지 도와줄 동료도 있었다.
[풀발이 유지 중입니다.]
그녀들의 특정 부위를 슥 둘러본 최종택이 다시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사아아-
그 시선을 느낀 걸까.
조금씩 유혹하던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어서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기색이 가득한 호승적인 마력. 동시에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음침한 마력이기도 했다.
"후우…"
그 앞에서 최종택이 눈을감고 짧게 심호흡을 했다.
이내 눈을 뜬 순간.
'들어간다.'
그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리치의 방에 들어왔습니다.]
[리치, 아서스가 적의를 표합니다.]
경고음처럼 울리는 알림과 동시에 스산한 바람이 몸을 덮쳤다.
사아아-
캄캄해진 시야.
한 걸음 차이이건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다.
그 소름 끼치는 이질감 속에서 가뭄으로 메마른 땅처럼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내 영역을 더럽히다니……]
솜털이 설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죄……, 죽음…으로 갚아라…….]
"……"
한이 가득 서린 듯한 음색이 들리고, 곧 이질적인 장치 소리가 들려왔다.
키이잉-!
리치가 준비해둔 마법진이 발동되는 소리였다.
천장과 바닥, 그리고 벽면까지.
어둡던 방이 밝게 빛날 정도로 크고, 많은 양이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오히려 뒤에서 지켜보던 일행들이 다급해졌다.
"위, 위험한 거 아냐!?"
"어서 도와줘야…!"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난 이걸 꼭 시험해보고 싶었지."
마치 유성처럼.
드높은 천장의 마법진에서 신비로운 구체가 떨어져 내렸다.
바닥의 마법진은 그런 그의 다리를 느리게 만들었고, 양쪽 벽면의 마법진에선 악령들이 튀어나왔다.
"아아…"
세계의 종말을 보는 것만 같은 광경.
아리아가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 순간, 최종택의 근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리를 묶고… 수많은 여자를 불렀나……"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마법의 향연 앞에서.
스윽.
그는 천천히 자신의 고간을 잡았다.
동시에 선언했다.
"남자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쌀 수 있어야 한다."
그 선언에 반응하듯 물건에서 신성한 빛이 뿜어졌다.
"고간포… 연사!"
푸슉- 퓩-
푸슈슉-!
이윽고 그가 마력을 방출하는 순간.
하얀 무언가가 쉴 새 없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지면에서 하늘로 떨어지는 유성을 보는 듯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퍼엉! 펑!
퍼어엉-!
마치 불꽃놀이가 터지듯.
마법이 하얀 무언가가 부딪히며 아름답게 천장을 수놓았다.
신성력에 약한 흑마법이 버티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지는 과정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백보아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저 정도로 많이 싸면 문제 있는 거 아닌가요?"
"남자는 지치지 않죠."
그걸 또 대답해주는 최종택.
심지어 그는 명대사까지 던져주었다.
"내 모든 마력을 쏟겠어…!"
심금을 울리는 대사에 감동했는지 메시지가 나타났다.
[다음 풀발의 두 번째 실마리를 얻었습니다.]
하나, 그는 마력을 쏟는 것에 집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사로 쏘아지던 액체가 갑자기 거대한 에너지포로 바뀌자, 쓰나미에 휩쓸린 도시처럼 마법이 쓸려나갔다.
그에 리치, 아서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준비했던 마법인가!
최강이라 자부했던 자신의 마법이 저딴 더러운 거에 당하다니……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하지만 리치가 겪을 치욕은 이제 시작이었다.
푸슉-!
치이이익-
[커헉…! 크어아아아악!]
마법을 모두 쓸어버리고도 쏘아지는 하얀 무언가가 아서스의 몸을 뒤덮은 것이다.
뼈밖에 남지 않은 해골이건만.
하얀 액체에 닿을 때마다 몸이 타는 듯 고통스러웠다.
[크흐으으…! 죽인다… 꼭……]
하나 아직까진 버틸 수 있었다.
끈적하고 뜨끈한 느낌에 불쾌하긴 해도, 놈의 마력 또한 많이 줄어든 상태였던 것이다.
한데 그때.
"아직 한 발 남았다."
묵직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그에 아서스의 몸이 흠칫 떨렸다.
설마, 하는 몸짓으로 그를 바라본 순간, 아서스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콰아아아아-!!
최종택의 고간에서 튀어나온 액체가 방안을 뒤덮은 것이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생명을 느끼며 리치가 짙은 한이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는데……뜨겁…고…… 끈적…해… 더러……]
이윽고 새하얀 빛이 사라졌을 때.
아서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방 전체에 달라붙어 은은한 빛을 내는 하얀 액체를 보며 최종택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었다.
"지렸다."
홀가분한 목소리.
그 범죄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본 백보아가 물었다.
"저건 성추행인가요? 성폭행인가요?"
"……"
"아무튼 너무 잔인하네요."
"…크흠."
최종택이슬쩍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