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쥬지로 조교해 쥬지 (1)
51화
4.
어두컴컴한 방.
값비싼 장식품들조차 음침해 보이는 곳에 두 남녀가 들어왔다.
붉은 머리가 탁 트인 옷차림이 인상적인 여자와 날카로운 눈만을 드러낸 두건을 쓴 남자였다.
척 봐도 포스가 흐르는 모습.
누군가 그들을 본다면 그리 말할 것이다.
"천랑조의 사냥개다!"
천랑 직속 암살부대.
천랑조의 사냥개는 그 이름 자체에 힘이 있었다.
임무 성공률97%.
한 번 마음 먹은 먹잇감은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잡아낸다는 독종들.
그런 그들은일원 대부분이 B~A등급이었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카지스, 카타리나."
무려 A등급의 헌터들.
어디 가서 고개 한 번 숙이기 힘든 위인들이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부르셨습니까. 비서실장님."
"카지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자세.
그런 그들의 태도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 앉은 채 다리를 꼰 남자가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이 주시하고 있는 유망주가 있다."
"…혹시 드락사르를 잡은 남자입니까."
"그렇다."
비서실장의 대답에 카지스는 대략 감이 왔다.
'참기 힘들어지셨구나.'
수왕 채유린.
천랑의 길드장인 그녀의 욕구가 한계에 달했으리라고.
그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길드장님이 아직 참을 수 있을 때 나서야한다."
"……"
카지스는 저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직접 나선다는 건이성을 잃었다는 소리니까.
S등급 헌터인 그녀를 막을 수 있는 헌터는 없다 봐야 했다.
사실 평소라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5대 길드의 이름으로 적당히 스카웃한 후에 바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필 상대가 S등급 유망주라니…'
하지만 섬의 보스를 잡은 남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를 섣불리 건드렸다간 공공의 적이 될 수가 있다.
'그걸 알기에 길드장님도 참고 계시는 거겠지만…'
폭주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녀의 폭주는 '이성'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분이 직접 나설 일 없게 잘 모셔와라."
결연한 얼굴이 된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비서실장의 눈을 마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거부하면… 같은 방식으로 데려오는 겁니까?"
"그러니 너를 불렀지."
"알겠습니다."
"조심해라. S등급 유망주이니. A등급인 너희라도 방심하면 위험할 수 있다."
원하는 대답에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카타리나가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 출발할까요?"
그 물음에 비서실장이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턱을 괸 그가 허리를 숙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시야 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알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5.
집에 돌아온 최종택은 곧장 침대에 몸을 눕혔다.
다소 뻐근한 몸을 이불이 부드럽게 감싸는 게 썩 기분이 좋았다.
몸을 돌린 그가 다소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봤다.
"뭐하는 년이었지."
뭔가 순식간에 지나간 기분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결코 정상적인 여자는 아니었다.
능력 면에서나 행동거지나 외관적인 부분까지.
특히 그 가터벨트가 잊히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몸을 일으키며 휴지를 챙겼다.
"음… 오늘은 체력훈련이나 할까."
역시 바뀌지 않은 최종택이었다.
새로운 소재를 떠올리며 컴퓨터로 향하려던 순간.
띠링-
"어?"
익숙한 알림이 들려왔다.
그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하반신을 향했다.
'아닌데.'
놀랍게도 이번엔 범인이 아니었다.
잠잠한 하반신을 보며 의문을 표했을 때였다.
[당신은 속박당하였습니다.]
'씨발, 이건 뭐야?'
당황한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속박당했다는 말대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
갑작스런 상황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보고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
"순순히 따라와라."
그에 최종택이 대답했다.
"…?"
정확히는, 대답하려 했다.
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입을 열려 해도 열리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놈들이 그를 닦달했다.
"대답이 없군. 거부한다는 뜻인가?"
"역시 거부할 줄 알았어. 하지만 너에겐 거부권이 없다."
저들끼리 떠드는 두 남녀를 보는 최종택은 황당한 심정이었다.
'병신들인가?'
지들이 속박시켜놓고 왜 대답이 없냐니.
야생의 포니테일 덕에 쌉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이런 종류의 쌉소리는 또 처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진지했다.
"어쩔 수 없네. 최대한 좋게 데려가려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힘을 쓸 수밖에."
"방심하지 마라. 숨겨둔 한 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나도 안다고, 카지스."
북치고 장구 치고 아주 난리가 났다.
이쯤 되자 최종택도 포기했다.
그저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납치를 당할 줄이야…어라? 납치?'
그 순간.
띠링-
[풀발이 발동되었습니다.]
[자박꼼의 영향으로 속박에서 풀려납니다.]
"어라?"
익숙한 알림이 들리며 몸의 통제가 풀렸다.
'자박꼼에 이런 효과가 있었나?'
의아한 상황이었지만, 머리보다는 몸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본능적으로 옆을 곁눈질했다.
"그런데 이렇게 데려가도 되나?"
"상관 없겠지. 일단 속박이 풀리기 전에 일을 끝내놓자고."
그들은 아직 속박이 풀린 걸 모르는 눈치였다.
'좋아.'
최종택의 판단은 빨랐다.
짧게 심호흡한 그가 벌떡 일어나 여자에게 도발을 걸었다.
"…!"
"뭐, 뭐야. 어떻게 벗어난 거지?"
여자가 돌연 움직임을 멈추자 깜짝 놀란 남자가 최종택을 바라봤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자식… 뭘 한 거냐!"
그가카타리나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것을.
그게 이유였다.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경계하며 간을 보는 이유.
-S등급 유망주다. 숨겨둔 한 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
자연스레 비서실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젠장, 너무 방심했다.'
주의했어야 하는데 속박에 꼼짝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방심하고 말았다.
'노린 건가…?'
그렇다면 보통이 아닌 놈이었다.
다소 긴장한 채 눈치를 보는 사이 최종택도 그의 정보를 파악했다.
그처럼 추측이 아닌, 객관적인 정보였다.
[카지스]
[성별 : 남]
[나이 : 31]
[등급 : A]
[레벨 : 37]
[능력치]
[근력 : B (20 / 100)], [민첩 : B (70 / 100)]
[체력 : B (0 / 100)], [마력 : C (50 / 100)]
[상태 : 당황함]
[몹시 긴장 중]
[특이사항]
[천랑의 사냥개]
[천랑조의 일원]
[A등급 스킬 ‘뒤밟기’ 보유.]
[A등급 스킬 ‘카탈 단도술’ 보유.]
[B등급 스킬 ‘속박’ 보유.]
[D등급 스킬 '단도 투척' 보유.]
'이 새끼가 속박 건 새끼네.'
딱 걸렸다.
전체적인 능력을 확인한 최종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해.'
A등급이라 긴장했는데 다행히 능력치는 B등급 헌터 수준이었다.
경력과 스킬 등급으로 인정받은 느낌.
아마 A등급 헌터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할 것이다.
'A등급은 같은 등급끼리도 격차가 크다했으니까.'
그건 달리 말하면 최종택에게도 승산이 있단 소리였다.
[이름 : 최종택]
[레벨 : 27]
[능력치]
[근력 : B (72 / 100)], [민첩 : B (66 / 100)]
[체력 : B (50 / 100)], [마력 : B (75 / 100)]
[풀발 효과가 적용된 상태입니다]
'지금은 내가 더 높다.'
판단을 마친 최종택이 카탈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표정이 야릇하다.
'저 새낀 표정이 왜 저래?'
몸을 배배 꼬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로선 좋은 일이었다.
띠링-
[풀발이 발동되었습니다.]
덕분에 쉽게 발동시킬 수 있었으니까.
"…!"
갑자기 느껴지는 기운이 달라지자 카지스가 눈을 부릅떴다.
한치도 느껴지지 않던 기운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치솟아올랐다.
당황한 그가 뒤로 물러나려는 찰나.
파앗!
최종택이 움직였다.
순식간이었다.
5M 거리에서 둘이 마주 보고 있게 된 것은.
그런 최종택의 손에는 어느새 침대 옆에있던 검이 들려있었다.
"크윽…"
하나 카지스도 A등급 헌터.
높은 민첩을 기반으로 그가 빠르게 반응했다. 횡단으로 휘둘러지는 검을 가까스로 피해낸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광경.
마술과도 같은 상황에도 최종택은 당황하지 않았다.
'뒤밟기군.'
갓보기 구멍으로 이미 확인했으니까.
최종택이 뒤도 안 돌아보고 몸을 회전시켰다.
그의 주위로 한차례 원을 그리며 휘둘러진 검에 카지스가 비명을 터트렸다.
"커헉! 어, 어떻게…!"
옆구리를 움켜쥔 그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A등급 헌터들도 당하는 스킬이 뒤밟기다.
설령 S등급에 근접하는 헌터라 할지언정 처음 마주치면 한 번은 당하는 스킬이 뒤밟기이건만.
"아직 신입이 벌써 이 정도의 힘을…"
저놈은 위험했다.
이대로 두면 더욱 강해질 터.
'훗날 천랑에게 큰 적이 된다. 여기서 싹을 밟아야…'
한 번 적대감을 드러낸 천랑과의 관계는 이미 무너진 바.
그렇다면 여기서 처리해야 했다.
그가 조심스레 품 안을 매만졌을 때였다.
휙.
"…?"
최종택의 신형이 사라졌다.
이윽고 그의 위치를 파악했을 땐, 이미 뒤를 내준 후였다.
퍽-!
"커헉."
뒷 목을 가격당한 놈이 힘없이 쓰러졌다.
놈을 살펴보듯 내려다보던 최종택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얕게 베였네."
그걸 또 피했는지 옆구리의 상처가 깊진 않았다.
저 정도면 놔둬도 괜찮으리라.
'자, 그럼 정보를 캐내볼까.'
최종택이 혼자남은 여자를 바라봤다.
움찔거리던 그녀는 최종택이 다가오자 거의 기어오다시피 하며 움직였다. 이윽고 다리 앞까지 온 그녀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매달렸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빠, 빨리… 빨리 해소시켜줘…!"
간절한 외침.
붉게 상기된 몸과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몸.
흡사 발정제를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와, 시너지 효과 장난 없네.'
도발이 극도의 공격성을 느끼는 거라면, 시너지 효과는 대상에게 극도의 쾌락을 느끼는 거라 할 수 있었다.
쾌락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상태.
거의 준 최면에 가까운 효과다.
당장 해소하지 않으면 죽을 듯 구는 여자를 보며 최종택이 씨익 웃었다.
'이거… 생각보다 유용하겠는데?'
그러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댄 그가 그녀의 머리 끄댕이를 잡으며 말했다.
"완전히 맛이 갔군."
"아아… 마, 맞아. 그러니 제발…"
애원하는 그녀를 밀쳐낸 최종택이 단호하게 말했다.
"넣고 싶다면 불어라!"
"다, 다 말할게!"
그러자 그녀가 눈이 뒤집혀서 정보를 불었다.
마약중독자가 광기에 휩싸인 듯한 모습에 최종택이 움찔할 정도.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열심히 정보를 토해냈다.
"천랑 길드에서 시켰어요! 마스터가 성욕을 더는 참지 못할 정도가 되어서 비서실장이 대신 명령을……"
"그 암캐 새끼는 남자 유망주들 불러서 따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어…!그게 널 데리고 가야 하는 이유고…!"
한데 그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입이 점점 거칠어진다.
"그 개새끼가 따먹은 남자들의 이름은 박종우, 강건하……"
'아니, 그런 것까진 필요 없는데.'
급기야 명단까지 만들어버린 카타리나.
처음엔 황당해하던 최종택도 듣다 보니 신기했는지 가만히 얘기를 들었다.
'몇 명을 따먹은 거야?'
카사노바의 환생이 있다면 수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살발한 수였다.
그 대단한 업적 앞에서 최종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분발해야겠네.'
그도 나름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다 생각했는데 그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아리아가 그녀를 보면 뭐라 하려나.
피식 웃고 있는데 카타리나가 다리에 매달리며 가슴을 문댄다.
"다, 다 불었잖아. 그러니까 빨리…!"
'오우야.'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지 양쪽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는 그녀.
가뜩이나 남미계로 보이는 육덕진 누님이 저러고 있으니 상당히 야릇했다.
안달이 나도 단단히 난 그녀를 보며 최종택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더 골려줄까 싶었는데 불쌍하니 이 정도로 봐줄까 싶었다.
발정 난 그녀를 보니 조금 전부터 꼴리기도 하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 최종택이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좋아, 상을 쥬지."
"아아…"
여자의 눈이 몽롱해지는 것을 보며 최종택은 내심 감탄했다.
'와씨…. 내가 생각해도 환상적인 라임이었다.'
현타올 땐 언제고 아직도 철이 없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