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고요 속의 박힘 (1)
26화 : 고요 속의 박힘
4.
시간이 흘러 약속 날.
편한 마음으로 카페에 나온 최종택은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웬 모르는 여자가 그를 부른 것이다.
얼 타고 있는 사이 앞에 앉은 그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게 뭔 상황이지?’
도를 아시나요 같은 건가?
요즘 세대가 발전했다고는 들었는데 이렇게 호구 잡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데 계속 보다보니까…
‘…왜 이리 예뻐?’
흔히 똥 머리라 부르는 올림머리를 하고 비녀를 꽂고 있는데 저 스타일을 저렇게 잘 소화한 사람은 처음 본다.
날카로운 눈매와 슬림한 몸매가 돋보인다.
보라색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 흔치 않은데 여러모로 개성적인 미인이었다.
‘이건 남자라면 못 참지.’
이 정도면 웬만한남자들 다 도 믿으러 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가.
무려 한지수와 예나 교관과 했던 남자다.
이 정도론 어림도 없었다.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서리 길드 D급 헌터 유연이라고 합니다.”
“아… 예?”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서리 길드.
한지수가 있는 그 길드였다.
최종택이 도로 자리에 앉자 자신을 유연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말을 이었다.
“같이 던전에 가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다만… 다른 분들은…?”
“저희 둘만 들어갑니다.”
“…?”
아닌데.
분명 4인 파티라고 했는데.
한지수에게 들었던 것과 말이 달라서 최종택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지수는…?”
“아직 치료가 덜 끝나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
같이 가자한 게 그 한지수인데?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유연은 당당하게 제 할 말을 할 뿐이었다.
“길드 사항이라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습니다만…. 최종택 씨와는 이미 약속이 된 거기 때문에 같이 가기 위해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아… 예.”
“그럼가시죠.”
“어딜…?”
눈 뜨고 코 베인다는 게 이런 건가.
너무 스무스한 진행에 되묻자 유연이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한다.
“던전이죠.”
“아… 예.”
그렇게 최종택은 유연과 함께 던전으로 향했다.
5.
쿠어어어!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크가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며 다가온다.
아이가 장난감을 휘두르듯 마구잡인 움직이었지만, 쉬이 간과할 수 없었다.
후웅!
후웅-!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조금이라도 닿았다간 그대로 사지가 썰려나갈 것 같은 위력.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이 꼭 철물을 갈기 위해 다가오는 분쇄기 같다.
기겁할 법한 상황임에도 유연은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타앗!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순식간에 오크의 뒤로 넘어간 그녀가 뒷목에 단도를 찔러 넣으려는 순간.
픽-!
단도가 목을 스쳐 지나갔다.
뒤늦게 급소를 찔릴 뻔한 걸 자각한 오크가 더욱 미쳐 날뛰었다.
크아아아!
‘…오늘 움직임이 좀 이상하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서두르지 않았다.
오크의 몸 곳곳에 난 상처가 누가 우위인지 보여주었으니까.
지금처럼 조금씩 상처를 주는 것.
그건 그녀에게 있어 아주 쉬운일이었다.
팟! 촤악-!
푹!
연신 도끼를 휘두름에도 그녀는 아랑곳 않고 오크에게 유효타를 꽂아 넣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마치 그녀가 찌를 때마다 오크가 일부러 공격을 멈추는 것 같았다.
하나 유연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결정타를 못 넣겠어.’
평소라면 미세한 빈틈을 노리고 들어가겠는데, 이상하게 몸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잔챙이처럼 야금야금 갉아먹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크아아아!
그에 육중한 덩치를 자랑하던 놈이 분노를 터트렸을 때.
무언가 번쩍였다.
서걱-!
뭔가 지나간다 싶더니 놈의 목에 하얀 선이 그어졌다.
그러다 이내 피분수가 쏟아진다.
시선을 돌리니 검을 휙휙 털어낸 최종택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몬스터가 생각보다 세네요?”
“그런데도 무난하게 잡으시네요.”
“아니 뭐…”
담담한 대답에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긴 한데 여긴 결코 D등급 던전의 수준이 아니었다.
풀발로 B등급이 된 그조차 한 방에 쓰러트릴 순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D등급 던전에 오크가 나온다는 것부터가 이상하다.
‘오크면 최소 C등급 던전에 나오는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이상해서 물었다.
“여기 D급 맞아요?”
그러자 유연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뇨. C급인데요.”
“…?”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그러는 님은 인성에 문제 있습니까?
“분명 D급 던전에 간다고 들었는… 아니, 그 이전에 둘 다 D급인데 이렇게 들어오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D급 헌터가 C급 던전에 가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있다.
예외적인 경우야 있다.
C급 이상의 헌터들 사이에 D급 헌터가 한 명 끼었을 때. 혹은 B급 이상의 헌터와 동행하는 경우.
‘그 외에 경우도 있다곤 하는데… 사실상 저 외엔 없다 봐야지.’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가 수업 때 들었던 내용이기도 했고.
한데 이어진 그녀의 대답이 쇼킹스럽다.
“저희 길드는 됩니다.”
“아……”
순간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멈칫하더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쉬발, 불법이라는 거잖아.’
헌터도 권력이 갑인 건가.
연예계의 더러운 뒷거래 현장을 본 것처럼 쓰디 쓴 현실의 일부를 본 기분이다.
어째 길드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근데 저 여자도 되게 잘 잡네.’
아닌 게 아니라 상당히 숙련된 움직임이다.
자신이야 강해진 육체와 동체시력으로 때려잡는 타입인데 그녀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효율을 뽑아낸다.
게임 속 암살자가 저러할까.
짧은 단도 하나를 들고 종횡무진 하는 모습이 아름다기까지 하다.
‘엿보기 구멍으로 봐야겠다.’
이내 유연의 상태창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유연]
[성별 : 여]
[나이 : 23]
[등급 : D]
[레벨 : 21]
[능력치]
[근력 : D (60 / 100)], [민첩 : C (80 / 100)]
[체력 : D (80 / 100)], [마력 : C (30 / 100)]
[상태 : 경계하고 있음]
[약간의 호기심도 동반한 상태]
[특이사항]
[서리 길드에 속해있음]
[헌터 이수 수석 경력이 있음]
[B등급 스킬 ‘은신’ 보유.]
[B등급 스킬 ‘꿰뚫어보는 눈’ 보유.]
[D등급 스킬 ‘단도 숙련’ 보유]
‘와씨… 은신이 있네?’
그의 눈빛이 변했다.
보물을 발견한 골룸의 마음이 이랬을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녀가 탐스럽게 느껴진다.
‘…가지고 싶다.’
미치도록 갖고 싶다.
무려 B등급 은신, 저 정도면 자박꼼과의 시너지를 기대해볼 법했다.
‘내 고질적인 문제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자박꼼의 기운을 감출 수 있지 않을까.
설령 그렇지 못한다 해도 은신이라는스킬 자체가 매력적이었다.
은신만큼 활용도가 다양한 스킬은 흔치 않으니까.
‘어떡하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은데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날부터 바로 슬기로운 감옥생활 찍는 거다.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은신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이상해.’
유연도 그런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분명 능력치가 C등급 정도 같았는데… 던전에 오고 나서 B등급 정도의 힘을 낸다.’
이상한 일이었다.
실전 타입은 여럿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능력 한에서다.
그처럼 한 단계가 껑충 뛰는 헌터는 없었다.
‘게다가 이 압박감은 뭐지?’
조금씩 몸을 옥죄는 듯한 기운.
분명그가 의도한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포식자 앞에 선 피식자처럼 몸이 굳는다.
사신의 앞에 섰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게 위압감에 몸이 짓눌리는느낌이라면 이건……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
그의 기운에 눌린 거라기엔 두려움이나 경외감이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몸이 굼떠지는 느낌이 더 크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건가?’
나쁠 건 없었다.
애초에 그걸 알아내는 게 그의 임무였으니까.
‘B등급 보스를 잡았다 들었는데… 실력은 확실하다.’
지금까지 봤던 그의 전투능력만 봐도 충분히 신빙성 있다.
전력을 다한 것을 못 봤으니 숨겨둔 한 수도 있을터.
굳이 보스까지 끌 필요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괜찮겠지.’
그 순간, 유연이 눈이 오묘해졌다.
도마뱀의 그것과 같이 동공이 좁아지더니 이내 황금빛으로 물든 것이다.
[B등급 스킬,‘꿰뚫어보는 눈’이 발동됩니다.]
그녀의 능력이었다.
상대의 성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몬스터는 물론 사람에게도 사용 가능한 이 능력은 간단했다.
악한 자라면 공포감을.
선한 자라면 포근함을.
그 중간쯤에 있다면 두 감정이 합쳐진 오묘한 느낌을.
예외로 자신에게 적의가 있다면 신경이 곤두선다.
상당히 유용한 스킬이었다.
그녀가 서리 길드에 유망주로 들어가게 해준 스킬이었으니까.
‘나한테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보여 봐라.’
길드에 해가 되는지, 아니면 이익이 되는지.
샅샅이 확인하기 위해 그녀가 도마뱀과 같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 순간.
화악-
‘뭐, 뭐지 몸이 뜨거워.’
상사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련하고 그립고 미치도록 갈망한다.
무엇을 갈망하는지도 모른 채 그녀의 감정이 점점 격해졌다.
‘이 감정은 도대체…’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
그건 그녀가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털썩.
“어어!? 괜찮아요?”
비틀대던 그녀가 무릎을 꿇자 최종택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런 그의 모습이 흐릿하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부축하는 순간.
‘아.’
뿌옇던 시야가 걷어졌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만 또렷하게 보였다.
마치 카메라를 줌 인한 것처럼 주변이 흐린 와중에도 그의 모습만은 정확했다.
‘차, 참을 수 없어….’
순간, 터질 것 같던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당장이라도 그를 안지 않으면 이상해져버릴 것만 같았다.
평소 참을성이 깊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감정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몸이 움직인 후였다.
퍽-!
“어억?”
최종택을 거칠게 밀친 그녀가 자기 옷을 풀어헤쳤다.
난데없는 상황에 저도 모르게 움직였는지 유연이 그를 몸으로 누르며 말한다.
“잠시 가만히 있으시죠.”
그러며 이번엔 그의 바지를 벗긴다.
최종택의 얼굴이 멍해졌다.
‘뭐지, 이 상황…’
은신을 어떻게 얻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뜸 옷을 벗는다.
속마음이라도 읽었나?
그에겐 아주 고마운 상황이었지만, 당혹스럽긴 했다.
‘음. 나쁘지 않지.’
그리 생각한 그는 결국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이내 팬티까지 벗긴 유연이 그의 물건을 마주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아…”
경이롭게 바라보던 유연이 천천히 물건을 손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