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교관과 던전에서 (4)
11화
1.
숨 막히는 긴장감.
심장소리가 이리 클 수가 있나?
문제 생긴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용히 숨죽이고 때.
“던전이 왜 이렇게 길어?”
“슬슬 보스 나올 때 된 거 같은데 나오기만 해봐 아주.”
인기척의 주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둘, 여자 하나.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1조?’
방어막을 깨지 못하고 허덕이던 모습이 인상적인 조였으니까.
그런 그들의 허언에 뒤따라 걷던 이진혁 교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꿈이 크군.”
“에이, 꿈이라뇨. 제가 이래봬도…”
“잠깐. 저거 보스 아니에요?”
“흠?”
다시 한 번 허언이 시작되려는 순간, 여자가 말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처참하게 쓰러져있는 홉 고블린에게.
목이 잘려있는 놈을 보며 교관이 턱밑을 쓰다듬었다.
“제법이군. 누구지?”
“우와… 아주 도륙을 냈네요. 저희 이럼 던전 탐사 끝난 거예요?”
“뭐, 그렇게 되겠지. 출구로 가도록 하지.”
“어으… 아쉽다. 모처럼 점수 딸 수 있었는데.”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최종택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후우. 큰일 날 뻔 했다. 그쵸?”
“…읍읍.”
“응?”
한데 대답이 이상하다.
의아해서 쳐다보니 손에 얼굴 반절이 막힌 채 붉게 상기되어있는 그녀가 보였다.
그제야 입을 막고 있었다는 걸 자각한 그가 퍼뜩 손을 뗐다.
“아… 죄송합니다. 급했어서.”
“…아니에요.”
그러며 살짝 힘없이 그를 민다.
아, 그러고 보니 계속 안고 있는 상태였구나.
심지어 알몸이다.
‘오우야…’
밑에 또 힘이 들어가려는데 예나가 부끄러워하며 묻는다.
“가, 갔죠…?”
“아, 네.”
그리곤 손으로 몸을 가리더니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사람이 지나다녀도 신음소리를 내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소심한 모습이었다.
‘존나 귀엽다 진짜.’
저런 게 갭모에라는 걸까.
갤러리 얘들이 환장할 때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젠 알 거 같다.
역시 귀여운 게 최고지.
‘…근데 난 어쩌지?’
생각해보니 예나 교관보다 자신이 더 문제였다.
그녀는 다시 입을 옷이라도 있지, 그는 앞이 다 찢어져있지 않은가.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응? 저건 뭐지?’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홉 고블린이 입은 거적데기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는 게 아닌가.
조금 전엔 워낙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저거 템 아니야?’
교관에게서 들은 바로 아이템에선 희미한 빛이 나온다고 했다.
그렇다면?
“…교관님. 저거 아이템 맞죠?”
“네, 네? 아… 맞아요. 옅은 빛이 나오네요.”
혹시 몰라서 예나 교관에게도 확인을 받은 그가 곧장 홉고블린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거적데기를 확인했다.
[홉 고블린의 거적데기]
-등급 : E
-설명 : 홉 고블린이 입고 있던 거적데기.
특별한 소재는 아니지만, 홉 고블린이 오래 입고있어 그의 힘이 깃들어있다.
근력과 민첩 (10) 상승.
‘진짜 이름이 거적데기네.’
확실히 누가 봐도 거적데기라고 볼 정도로 허름하긴 하다.
그래도 효과는 제법 쓸 만했다.
겨우 (10)이지만 근력과 민첩 두 가지 스텟이 상승하는 거니까.
E등급 아이템 치곤 괜찮은 편이었다.
‘마침 가릴 게 필요했는데 이럼 개꿀이지.’
이런 게 바로 일석이조일까.
거적데기를 걸친 최종택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예의로라도 예쁘다곤 못할 거지룩이 완성되었지만 바바리맨보다는 낫지 않은가.
‘아니, 이게 더 바바리맨에 가까운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깔끔하게 옷을 갖춰 입은 예나 교관이 그의 옆을 지나쳤다.
“출구로 안내하겠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도도한 분위기였다.
전혀 흐트러짐 없이 걷는 모습을 보며 최종택은 감탄했다.
‘다시 돌아왔네. 역시 비급 헌터는 다른 건가?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역시 엘리트는 엘리트인 걸까.
남녀간의 관계를 맺은 직후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이었다.
이건 좀 본 받아야겠는데.
내심 감탄하고 있는데 문득 그녀의 귀가 빨개진 게 보인다.
빨갛다 못해 아주 시뻘겋다.
자두도 저것보단 덜 빨갛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음. 역시 귀여워.’
품위를 유지하고 싶은 그녀를 위해 애써 모른척한 최종택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 맞다. 아깐 급해서 못 봤는데 이번엔 무슨 스킬 얻은 거지?’
2.
[샤프아이]
-등급 : B
-설명 : 상대의 급소를 파악한다.
“크…”
집으로 가는 길에 스킬을 확인한 최종택이 손뼉을 쳤다.
‘내가 B등급 스킬을 얻는 날이 오다니.’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었다.
B등급 헌터가 얼마나 대우받는지는 예나 교관만 봐도 알 수 있다.
2년 만에 교관까지 다이렉트로 가지 않았는가.
길드의 경우 B등급 헌터면 유망주로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육성한다고 하니 말 다한 셈.
‘월에 억 단위로 벌어들인다고 한 거 같은데…’
그야말로 다른 세상 이야기다.
물론 B등급 스킬을 얻었다고 해서 B등급 헌터가 되는 건 아니다.
헌터의 등급을 나누는 기준 중 한 가지일 뿐.
능력치와 실전 경험, 그리고 승급 시험 등.
여러 가지 기준을 통과해야지만 B등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세계에 첫 발을 내딛은 셈이지.’
이대로 A등급, 그리고 S등급 스킬을 얻는다면?
월 억 이상도 꿈은 아니었다.
‘스킬도 좋은 거 같고.’
상대의 급소를 파악하는 능력.
얼핏 보면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범용성이 넘사벽이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약점은 있는 법.
그 약점을 공격하면 제아무리 강철 같은 몬스터라도 큰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예나 교관이 엘리트라 불리는 이유도 샤프 아이 때문이었다.
‘궁수한테 급소를 보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겠지.’
그런 면에서 그는 운이 좋았다.
‘다른 스킬 말고 이걸 가져온 게 진짜 대박이다.’
자박꼼의 특성상 한 사람당 랜덤으로 하나의 스킬만을 가져온다.
그 가챠뽑기에서 샤프아이가 걸린 것이다.
이건 운이 좋았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이번 소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름 : 최종택]
[레벨 : 7]
[능력치]
[근력 : D (40 / 100)], [민첩 : D (40 / 100)]
[체력 : D (20 / 100)], [마력 : D (80 / 100)]
‘크. 한 번 했다고 이 정도라니. 진짜 최고다.’
던전 탐사와 관계 후 무려 모든 능력치가 D등급이 되었다.
경이로운 성장 속도.
아이템이나 레벨이 오른 것도 한 몫 하지만, 그보다는 역시 자박꼼 능력의 영향이 컸다.
여기에 풀발까지 더하면?
‘사실상 C등급 정도 위력이 나오겠네.’
발기가 유지되는 한 그는 그 어떤 훈련생보다 강해질 수 있었다.
스스로의 성장속도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빅뱅 패치 전 단풍잎스토리를 하다가 프리 단풍잎스토리를 하는 느낌.
짜릿한 쾌감에 그가 몸을 떨었다.
‘하. 오늘도 좋았다.’
소득도 좋고, 예나 교관도 좋고.
참 보람찬 하루다.
3.
“이번 던전 탐사는 대체적으로 성적이 좋네요.”
보고서를 읽던 머리가 훤한 남자가 인자한 미소를 띠우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훈련생들은 뛰어난 편이었다.
초창기 헌터를 제외하면 갈수록 헌터들이 뛰어나지는 추세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수순이다.
“24조, 38조가 가장 먼저 클리어 했더군요. 두 조를 맡은 교관이 누구죠?”
흥미롭다는 듯이 묻자 교관 두 명이 손을 들었다.
발랄한 인상의 젊은 여교관과 곰 같은 몸집이 인상적인 중년 남교관이었다.
“어땠나요? 싹수가 보여요?”
먼저 대답한 건 24조를 맡은 여교관이었다.
“최근 몇 년간 맡은 훈련생 중 가장 뛰어났습니다. 이 정도면 이번 승급 시험에 참가할 수도 있겠어요.”
“호오. 그 정도란 말이죠?”
“승급 시험은 좀 너무 간 거 아닌가? 승급 시험이 개나 소나 통과하는 것도 아니고.”
몸이 비쩍 마른 남교관이 비아냥대자 여교관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다.
“하기야, 승급 시험을 2번이나 연속으로 탈락하신 경험이 있는 김우진 교관님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겠네요.”
“뭐라고? 그때는 유망주가 유독 많았던 때라고 몇 번을 말해? 성질이 그리 고약하니 아직도 남자가 없지.”
“어머, 누가 그래요? 제가 남자가 없다고? 그러는 김우진 씨는 모솔 아니에요?”
“이 여자가 진짜…!”
소란스러워지자 머리가 훤한 교관이 보고서를 내리쳤다.
“그만! 지금 이 자리는 유망주들 평가하기 위한 자리지 교관님들 사적인 얘기하라고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교장님.”
그 한 마디에 시끄럽던 둘이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인상을 푼 교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승급 시험 얘기가 나올 정도면 유망주라고 봐야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흐음, 3반이었죠? 그 훈련생 이름이 뭐죠?”
“네. 정성욱입니다.”
“정성욱… 알겠습니다. 자, 그럼…”
암기하듯 정성욱이라는 이름을 몇 번 되뇌인 교장이 이번엔 남교관을 바라봤다.
“38조는 어땠죠?”
“김인호 훈련생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특출한 능력을 타고난 건 아니지만, 임기응변 능력과 전투 능력이 쓸 만합니다. 성격 또한 원칙을 준수하는 편이라 무난하게 성장한다면 훗날 교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호오. 박태혁 교관님이 그리 말할 정도면 제법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교장의 말에 다들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웬만하면 말을 아끼는 그의 과묵함은 꽤나 유명했다.
그런 그가 저리 말이 긴 걸 보면 상당히 특출 난 훈련생이리라.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인 교장이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이진혁 교관이었다.
“1반은 뭐 없나요?”
그 말에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한 명… 신경 쓰이는 놈이 있기는 합니다.”
“호오, 이진혁 교관님이 말이죠. 누군가요? 그게.”
“최종택이라는 훈련생입니다.”
“아, 저번에 D급 베리어를 한 번에 깼다는?”
교장의 말에 여교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훈련생이 D급 베리어를 한 번에 깼다고요? 그때면 겨우 2일차였을텐데…”
“유지아 교관님은 반이 달라서 몰랐나보군요. 저도 보고를 듣고 꽤나 놀랐습니다. 위기대처 능력을 보려고 만든 대련이었는데 말이죠.”
베리어를 한 방에 깼다는 게 충격이 컸던 걸까.
교관들의 쑥덕거림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게 여태껏 베리어를 한 방에 깬 훈련생은 한국에 4명밖에 없던 탓이다.
“사신 이설, 불사신 지크… 그들과 같은 업적을 냈단 말이지.”
그리고 그들은 모두 거인이 되었다.
침음을 흘리던 유지아 교관이 물었다.
“그렇다면 1반에서 보스를 잡은 것도 그인가요?”
“흠. 제가 담당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그러며 자기도 궁금하다는 듯 예나를 바라본다.
순식간에 그녀에게 이목이 쏠렸다.
“김예나 교관님이 맡으셨군요.”
“어땠나요?”
그 물음에 예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를 회상하듯 말했다.
“…그런 건 처음이었어요.”
“예?”
“아, 아니요. 저희 팀에서 보스를 잡았습니다.”
그 말에 교관들이 속닥거린다.
“아… 대단한가보네요. 김예나 교관이 그런 건 처음이었다고 할 정도라니…”
“전 김예나 교관님이 저러는 거 처음 봤어요.”
“얼마나 대단한 거야?”
작게 속삭인다고는 하지만, 궁수 쪽으로 특화된 그녀의 귀에는 생생하게 들렸다.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