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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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0.
웅장한 전장.
수백의 시체들 사이에서 여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녀의 정체는 뱀파이어 퀸.
SS급 몬스터인 그녀는 태생부터가 왕이었다.
적수 따위 있을 리 없는 몸.
실제로 그녀를 처치하기 위해 수백 명의 정예 헌터들이 나섰으나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됐지 않은가.
분명 그랬는데…
저벅, 저벅.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저 남자는 뭐란 말인가?
인간 따위는 닿기만 해도 죽는 피의 안개 속에서 너무도 태연하게 걸어 다니고 있다.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그 모습에 화가 난 뱀파이어 퀸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네 이놈!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대답하지 못할까!”
“어떤 여자가 나한테 이리 시끄러운 거야?”
그러자 남자가 눈썹을 찌푸리더니 슥 고개를 돌린다.
시선이 마주친 뱀파이어 퀸의 몸이 굳었다.
압도적인 기운이 느껴진 것이다.
포식자의 앞에 선 것 같은 그런 기운이.
‘내가 압도당했다고?’
왕인 자신이?
저런 한낱 인간 따위에게?
‘그럴 리 없다!’
현실을 부정한 뱀파이어 퀸이 발악하듯 소리 질렀다.
짐승이 겁에 질리지 않으려 소리 지르는 것처럼.
얼마나 소리 질렀을까.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말을 끊고 엄지를 들며 말했다.
“당신이 최고야?”
“…뭐라?”
그러더니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는다.
“너는 내가 박아주면 꼼짝도 못해.”
“…?”
수백 년을 살았지만 저런 말은 처음 듣는다.
어느 누가 뱀파이어들의 여왕인 그녀에게 저딴 성희롱을 하겠는가.
뒤늦게 뜻을 파악한 그녀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어딜 감히…! 그딴 저급한 소리를! 미개한 놈, 가만두지 않…”
그녀가 울분을 토해내려는 찰나.
턱.
남자의 손이 움직였다.
마치 권총의 안전장치를 열고 방아쇠를 잡듯.
빠르게 지퍼를 내리고 두툼한 물건을 부여잡은 남자가 진지한 얼굴로 외쳤다.
“꼼짝 마!”
“…!?”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남자도 아는 걸까?
밑에를 만지며 서서히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1.
탁.
탁, 탁, 탁!
“으음…”
3평짜리 하얀 방 안에서 묘한 소리와 함께 남성의 침음성이 들려왔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손이 빠르게 움직인다.
“윽, 으윽…”
그럴수록 침음도 점점 커졌고,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차츰 구겨졌다.
긴박한 얼굴이 된 그가 중얼거렸다.
“크윽, 역시 뱀파이어 퀸인가… 흡혈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잘 빠는군.”
무슨 상상을 하는 걸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 않다.
대사만 듣고도 한심하기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걸 해낸 남자의 이름은 최종택.
포스 있는 이름과 달리 한없이 가벼운 24세 남자다.
전역하고 백수 생활도 모자라 연애도 못하는 신세가 처량해 자기 위로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탁탁! 탁!
“어흑… 이 요망한 년! 더 빨리…”
……그렇다고 자기 위로를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흔치는 않은데.
이름처럼 남들과는 다른 범상함을 지닌 듯하다.
그렇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길 한창.
끝이 보이는지 점점 속도를 높여가던 그가 어느 순간 손을 멈추며 축 늘어졌다.
팟! 푸슉-
띠링!
동시에 들리는 소리.
한데 그 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잉? 띠링?”
잘못 들었나?
도저히 그곳에서 났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였다.
물건이 기계로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당황해서 눈을 뜨니 웬 이상한 반투명한 창이 그를 반겼다.
[헌터로 각성하셨습니다.]
“…?”
어안이 벙벙하다는 게 이런 걸까.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
그저 평소와 조금 다른 딸을 쳤을 뿐인데, 갑자기 웬 각성이란 말인가.
흔히 겪기 힘든 상황에 멍하니 창을 바라보고 있는데 알림이 울렸다.
띠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그에 최종택이 홀린 듯 스킬 창을 열어보았다.
그리고…
“엥?”
이상하다는 듯 양손으로 눈을 비빈 그가 다시 스킬을 확인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윽고 현실을 자각한 최종택이 황당함과 자괴감이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씨발 이게 뭔 좆같은 스킬이야?”
2.
헌터.
이 시국에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초능력을 사용하여 몬스터를 처치하는 모습은 영웅 그 자체로 보이니까.
어디 그뿐인가?
돈도 일개 회사원은 발끝으로 둘 정도로 많이 번다.
일등 사윗감이 공무원에서 헌터로 바뀌었다는 기사가 뜬 지도 한참 됐다.
거기다 얼굴까지 잘생겨진다하니 말 다한 셈.
“나도 헌터나 됐으면 소원이 없겠네.”
누구나 그렇듯 최종택도 그런 헌터를 꿈꿨었다.
물론 진지하게 꿈 꾼 건 아니었다.
헌터가 되는 건 통계상 지극히 낮은 확률이니까.
그저 사람들이 복권 당첨이나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딱 그 정도의 바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헌터가 되는 걸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한데 오늘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딸 치다가 각성이라니… 이건 DC에 올려도 아무도 안 믿겠지.’
자위를 하다 각성하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당장 최종택, 본인도 그런 글을 보면 욕부터 달았을 것이다.
‘진짜 이렇게 각성할 수도 있는 건가?’
어이없긴 한데 막상 생각해보면 또 납득이 되긴 한다.
각성하는 이유야 다 제각각이니까.
몬스터에게 죽기 전이나 재난 사고에서 각성하는 사람도 있고, 잠자다 일어나니까 각성하는 사람도 있다.
술 마시는 도중 각성한 사람도 있다는데 딸 치다가 각성하는 것도 그럴 법하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다른 게 걱정이었다.
‘뭐하다 각성했는지 물어보거나 하진 않겠지?’
만약 모두가 그 사연을 알게 된다면…….
‘상상만 해도 소름 돋네.’
그게 이유였다.
최종택이 헌터 협회 대기실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며 다리를 달달 떠는 이유.
‘만약 물어보면 이걸 뭐라 설명해야하냐.’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갈수록 다리의 떨림도 심해진다.
그렇게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최종택 씨. 최종택 씨 계세요?”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안내원으로 보이는 남자의 말에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네.”
안내하는 남자를 따라가자 그가 이동하며 전체적인 테스트 방식을 설명했다.
“헌터 시험은 간단하게 3종류로 나뉩니다.”
“아하.”
역시 인생은 삼세판인가.
그리 생각하며 얘기를 듣는데 첫 번째부터 난관이었다.
“…스킬 테스트요?”
첫 번째 테스트가 스킬 테스트란다.
“네. 진짜 각성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이유도 참 정당하다.
대답하는 최종택의 속이 타들어갈 정도로.
‘좆 됐네.’
이걸 생각 못했다.
그저 헌터가 되면 헌터증 보유가 필수라서 온 것이었는데.
좀 더 머리를 굴리고 왔어야했다.
이렇게 이상한 헌터로 소문이 날 수는 없었다.
‘아니, 근데 이거 테스트 할 수 있는 능력이긴 한가?’
자신이 봤을 때는 절대 그런 종류의 내용이 아니었는데.
혹시나 해서 다시 스킬 창을 열어보는데 안내원이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어차피 테스트할 거니까 묻는 건데, 혹시 스킬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스킬이요?”
그런 그의 시선이 슬쩍 옆을 향했다.
[자박꼼]
-등급 : F (성장)
-설명 : 레벨이 부족하십니까? 스텟이 부족하시다구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으면 해결됩니다!
다시 봐도 해괴한 스킬을 보며 최종택이 마른 입술을 뻐끔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강해져요.”
“네?”
“그, 박으면… 강해져요.”
“네??”
이해하지 못했는지 눈을 끔뻑이던 그가 돌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성장형 스킬이신가요?”
“어어…”
“박으면 강해지는 거면… 돌진 타입이신가?”
“어… 뭐, 대충 그렇죠?”
성장이라고 적혀있긴 하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돌진도… 어찌 보면 일맥상통하고.
냅다 수긍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좆 될 뻔했네.’
어릴 적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들었을 때보다 지금이 더 대답하기 힘들었다.
안방에서 놀다 콘돔을 줍고 부모님에게 이거 먹는 거냐고 물었을 때 느끼셨던 기분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그렇게 작은 헤프닝을 넘긴 후.
최종택은 한동안 말없이 안내원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옆길이 나와 그쪽으로 꺾으려는 찰나.
“아!”
“윽?”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옆에서 튀어나온 여자와 몸이 부딪혔다.
한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아무리 여자라곤 해도 부딪히면 타격감이 느껴질 법도 한데 툭 친 느낌이랄까.
‘이것도 각성한 효과인가?’
아무래도 능력치가 상승해서 그런 것 같다.
…아참.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단 부딪혔으니 사과할 생각으로 최종택이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는 시야가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
그 왜 영화에서 보면 여배우가 등장할 때 등 뒤로 후광을 줘서 힘을 빡 주는 장면 있지 않은가.
시선을 집중시키려는 감독의 고의적인 연출.
지금 그 장면이 보인다.
‘진짜 존나 예쁘다.’
어깨에서 허리 사이까지 기른 흑발.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작은 얼굴, 그리고 볼륨감 있는 몸매.
저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는 것도 놀라운데 엄청 예쁘다.
다소 귀여운 이미지 같으면서도 묘하게 도도해 보이는 게 꼭 고양이 같기도 하고.
아픈지 어깨를 문지르는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생기지?’
비현실적인 외모에 벙 쪄있는데 여자가 꾸벅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아.”
누군가 수면 위로 머리를 끄집어 올린 것 같다.
정신이 퍼뜩 든 최종택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미처 못 피해서 죄송합니다.”
“네?”
“아니… 그, 죄송합니다.”
“아….”
평생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티가 난 걸까.
횡설수설하는 그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인 여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아, 안녕히 가세요!”
이미 뒤돌아선 그녀를 향해 최종택이 뒤늦게 인사를 건넸다.
누군가 보면 모솔인 거 티 내냐고 할 법한 모습.
실제로 안내원의 눈빛에 잠시 안쓰러움이 비췄다 사라졌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최종택은 그저 설렐 따름이었다.
‘와… 저 사람도 헌터 시험 보고 돌아가는 길인가? 헌터가 외모가 그렇게 예쁘다고 하던데…’
생각 이상이었다.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나.
헌터나 연예인들 보고 그들만의 리그라고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잠깐, 헌터?’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 자신도 헌터가 됐으니 외모가 잘생겨졌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든 것은.
‘그럼 저 사람도 교육받는 사람인가? 그럼 같이 교육 받을 수도 있겠네?’
설레발이었다.
교육 같이 듣는 게 좋다고 흐흐, 웃음을 흘려댄다.
아주 손잡으면 돌잔치 누구 초대할지 고민하게 생긴 모습에 안내원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