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910화 (916/917)

#910

1.

곧이곧대로 티페레트 공작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용건은 전부 전했다.

“실로 교활하군.”

“공적의 삶이지.”

“편리해서 좋겠군. 어떤 짓을 벌여도 공적이니까 라는 변명으로 합리화할 수 있으니.”

“어머 공작님도 참. 내가 동료라도 배신한 것처럼 말하네.”

작금의 헥센나흐트는 사실상 강경파인 클리포트가 실권을 잡았다.

온건파의 거두였던 리디아의 실책, 그에 따른 실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경파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리디아에게서 많은 걸 빼앗아 갔으며 명예를 더럽혔다.

그런 걸 동료라고 불러야 한다면 글쎄?

“정리하겠네. 그대가 원하는 건 강경파 소속의 두 공적이 갑문을 손에 넣지 못하게 하는 것.”

“그래, 맞아.”

“반드시 싸워야 할 의무는 없지만 무력 충돌 발생 시 둘을 내가 토벌할 것.”

“그것도 맞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여주는 편이 깔끔하지.”

이번 사태가 클리포트의 총의가 아닌 우르쉬라의 독단인 건 거의 확실하다.

갑문을 손에 얻기 전까지 기밀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까닭에 클리포트에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첩보를 받았다.

그러나 우르쉬라가 보고를 하고말고 와는 별개로 그녀가 갑문을 손에 넣는다면 이는 곧 강경파의 전력 강화로 이어진다.

우르쉬라는 클리포트 소속이며 모종의 대가를 받고 강경파를 위해 그것을 운용할 테니까.

헥센나흐트의 실권도 모자라 범람의 통제권까지 쥔 클리포트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다.

온건파의 수장을 표방해왔던 리디아의 입지는 지금보다 위축될 것이고, 난장판이 된 세상에서 양지 사업을 힘겹게 이끌어가던 솔리두스 상단 역시 크게 주춤할 것이다.

경쟁자를 배제하고 모든 걸 손에 쥔 클리포트가 할 짓은 뻔했다.

세계를 정복하겠답시고 게헨나가 예의주시 중인 레드라인을 넘어버리거나, 어쩌면 아예 게헨나에게 선전포고를 해버릴 수도 있다.

“난 전쟁을 바라지 않아. 게헨나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결국 헥센나흐트가 패배할 테니까.”

이미 많은 공적이 폭발적인 성장세와 화려한 현세 데뷔에 현혹되어 있을 테지만 리디아는 달랐다.

게헨나의 저력을 누구보다 냉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적자생존의 땅에서 살기 위해 마법을 갈고 닦은 공적도 물론 강력하다.

하지만 최고의 마녀들이 모여 끝없는 논의와 연구 교류를 해온 게헨나는 지난 1차 대 전쟁 때와는 격이 다른 수준까지 전력을 끌어올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게헨나는 게으른 용의 둥지다.

헥센나흐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게헨나의 마녀를 온실 속 샌님이라고 비웃고 경멸해도.

수장인 케테르 공작이 없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그림은. 헥센나흐트가 그냥 적당한 위협이 되는 수준으로 존재하는 거야.”

게헨나가 쉽사리 전면전을 결심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동시에 게헨나가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준까지만 강하게 존재하는 것.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밸런스이다.

그러니 리디아의 요구에 정의 따위가 개입할 여지는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이득을 좇을 뿐이다.

“이 정도면 일단 같은 배를 탔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엘로아는 갑문을 손에 넣어 범람을 저지할 수 있다.

리디아는 강경파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고 개인적인 복수를 이행할 수 있다.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느냐, 라고 리디아는 말한다.

엘로아는 눈을 감았다.

금화의 마녀가 원하는 바는 모두 이해했다.

그저 미끼라고 치부하기엔 제법 합리적이라고도 생각 중이다.

“도로시는?”

“모든 일이 끝나면 무사히 돌려보내 줄게. 마그누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

리디아는 마녀 명을 걸었다.

공적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건 엘로아도 알 수 없다.

그저 꿰뚫어보았다고 믿기 위해 한가지 확답이 더 필요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네. 무엇을 바라는가?”

칼날처럼 곧은 시선이 리디아를 향했다.

리디아는 어깨를 으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너스레를 떨었다.

“항상 그랬어. 난 당한 건 이자까지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것이 리디아의 삶을 관통하는 철학의 근원이다.

2.

본래 시우와 엘로아는 조만간 출현한 갑문에 대해 미온적인 대처를 할 예정이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전력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치를 취할 예정이긴 했어도, 그게 주머니 차원이 열리자마자 돌입한다는 과격한 해결책을 의미하진 않았다.

하지만 리디아가 도로시를 인질로 내세운 이상 선택지가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어쨌거나 도로시 님이 무사하시다는 거죠?”

“그렇다네.”

샤론에 의해 불려 오고 엘로아의 통신이 끝나길 기다린 시우.

“그럼 구하러 가야죠.”

사정을 전해 드린 시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엘로아도, 아멜리아도, 샤론도 그가 그렇게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의외인 건 시우가 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확실히 수상쩍긴 한데…. 그래도 별수 있을까요? 리디아가 요구한 게 갑문을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저희 측에서 통제권을 손에 넣는 거잖아요?”

“그러네.”

“그러면 범람을 정지하고 도로시 님을 데려와야죠.”

“시우, 하지만….”

“제가 직접 갈 겁니다.”

물론 시우가 움직이는 건 위험하다.

어떤 수작을 벌여놓았을지 모르는 사지로 발을 들이는 것은 단순히 현세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과는 비교 불가한 위험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시가 구류되었다.

도로시는 시우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헥센나흐트를 배반했다.

그 반대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한다.

“준비하겠습니다.”

그제야 시우가 결코 평소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

염려와 만류의 시선을 뿌리치고 시우는 엘로아의 방을 나섰다.

손에는 어느샌가 위성전화기가 들려 있었다.

연락이 닿지 않는 도로시에게 하루에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던 시우.

통신번호는 눈감고 칠 수 있을 만큼 익숙하다.

수신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수화기 반대편에서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리디아는 연락 방법을 남겨두었다.

교섭에 대한 답변도 전해줘야 하고 변수에 대비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할 장치가 필요했던 까닭이다.

이는 곧 역추적을 해와도 언제든지 몸을 뺄 수 있다는 리디아의 자신감을 나타내는 장치기도 했다.

“여보세요?”

[아, 너구나? 오랜만이네. 시순 양]

“네, 접니다. 잘 지내시죠?”

리디아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특유의 짤랑거리는 웃음소리로 크게 웃었다.

리디아가 말하길 마녀들이 시우를 다소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는 이유.

단순히 성별을 떠나 어린 마녀인 시우가 어른인 척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었지.

리디아가 저렇게 웃는 이유도 여유로운 척 개별 연락을 취한 시우가 어른인 척하고 싶어하는 어린애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야 잘 지내지. 최고급 호텔방에서 샴페인도 마시고, 연극도 보러 다니고, 가끔 시순이 양이랑 침대에서 아쉽게 끝난 기억에 자기 위로도 하고. 그때 우리 참 뜨거웠잖아?]

“뭐, 그랬죠.”

[그래서 그런지 엄청 반갑네. 그나저나 왜 연락한 거야? 티페레트 공작이 시켰어?]

“아닙니다. 개별적으로 연락한 겁니다.”

시답잖은 소리를 흘리던 리디아가 조용해졌다.

그녀가 알기로 시우는 티페레트 공작의 보호를 받는 제자.

그런데 그의 연인인 도로시가 납치당한 가운데 개별적인 연락을 취해왔다?

아마 지금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가장 합리적인 추측을 내놓았다.

[인질교환을 하자는 건가?]

즉, 연인이 붙잡혀 있는 걸 두고 볼 수 없던 신시우가 대신 볼모로 잡혀있길 택했다는 추측을.

또한 그건 리디아가 쌍수를 들고 수락할 만큼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22위계 마녀와 세계 유일의 남자 마녀의 교환.

설령 갑문이 헥센나흐트 강경파 손에 넘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일 교환비다.

“설마, 그럴 리가요.”

[뭐야 김 새네]

그런 추측에 숨기지 않는 비웃음을 날리는 시우.

[그럼 왜 전화한 건데? 도로시 바꿔달라고?]

“그것도 아닙니다.”

[……?]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하려고요. 그리고 그 김에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서.”

[들어줄게. 해 봐]

빈정상한 듯한 리디아의 싸늘한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게헨나의 노예 출신이었습니다. 5년 동안 마법만 깨작깨작 익히면서 탈출하려고 애를 썼죠. 마녀가 된 이후에도 그다지 평탄하진 않았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을 것 같던 위기도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살아남아서 어찌저찌 대마녀급까지 올라왔습니다.”

[아하, 그렇구나. 자소서는 이메일로 보내줘]

흥미가 떨어졌음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리디아 앞에 시우는 묵묵히 할 말을 이었다.

“리디아 님이 무슨 꿍꿍이인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함정을 파놨을 것 같기도 하고, 액면 그대로의 조건인 것 같기도 하고…. 참 어렵네요. 근데, 이거 하나는 말해야겠네요.”

비앙카는 말했다.

인간을 초월했다면 그 굴레를 벗어야 한다고.

내뱉긴 쉽지만 따라 하기엔 참 어려운 말이다.

저 스스로 생각하기 신시우는 참 유약한 사람인 까닭이다.

원한은 소인배마냥 끝까지 품고 가고, 용서는 좀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기쁘면 이가 보일 정도로 웃고, 슬프면 질질 짜면서 운다.

특별한 힘을 가졌다고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의로운 의무감은 막연함에 그치고, 그렇다고 남을 깔보고 멸시할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도로시가 지적했듯 벗어던질 수 없는 태생적인 유약함인 셈이다.

하지만 내 사람이 걸린 문제라면 다르다.

“만약 이번 일이 함정이고. 그로 인해서 내 연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당신을 찾아갈 거야.”

기꺼이 유약함을 쥐어 뜯어내고 손을 더럽힐 준비가 되어있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위험과 위기가 있어도 아득바득 살아남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의 가장 두려운 적이 되어 다시 나타날 거야. 난 반드시 그렇게 해. 그러니까….”

수화기 너머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으로 만든 옥좌 위에 앉아 무수한 공적을 통솔하는 여왕이 풋내기의 협박에 일순이나마 위협을 느낀다.

지금 그의 말에는 얼토당토 없는 위협에도 위기감을 갖게 하는 기묘한 기백이 있다.

“처신 잘해.”

[하아…. 하하]

그 사실이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 섞인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리디아는 여왕이었고, 신시우는 공주님을 인질로 잡힌 풋내기였다.

기백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럼에도 리디아는 몹시 만족스럽게 답했다.

[행운을 빌게. 용사님]

통신은 끊겼다.

시우는 붉은가지를 챙겨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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