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909화 (915/917)

#909

1.

사태를 얼추 파악한 즉시 엘로아는 재빠르게 샤론에게 손짓했다.

일전 상황을 전달받았던 지라 즉각 의도를 파악하고 시우가 누워있는 방으로 달려가는 샤론.

[여보세요?]

“듣고 있네. 금화의 마녀.”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물려주면 좋겠어. 전설적인 공적 슬레이어 티페레트 공작과 전화데이트인데 음험하게 엿듣는 녀석이 있는 건 내 섬세한 감수성의 허용 범위 외이니 말이야]

“혼자일세.”

엘로아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당황해 허둥지둥하다가는 얻어갈 수 있는 정보도 놓칠 가능성이 있다.

도로시의 연락이 뚝 끊긴 시점에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부분이지 않던가?

그나마 기대를 걸었던 ‘현세에 범람이 창궐해 도로시가 먼저 연락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라는 낙관이 어긋났을 뿐이다.

[흐음, 말로는 못 믿겠네. 공작님도 알잖아? 장사치란 자기 견습마녀도 믿지 않는 족속이라는 걸]

“도로시는 지금 살아 있나?”

[난 마녀를 팔지 시체를 팔진 않아. 원격 수정구를 준비해 줘. 모드는 티타임으로. 내 개인 코드는 말해줄 테니까. 30초 줄게 시간이 지나면 끊을 거야. 근처에 없다는 변명은 않겠지? 제대로된 대화는 거기서 하자고?]

“알겠네.”

리디아의 요구는 간결했고 또한 촉박했다.

의도적으로 피해자의 주의를 돌리며 압박을 넣는 보이스피싱처럼 허튼짓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한 독촉이리라.

엘로아는 수화기를 든 채 원격수정구를 준비했다.

이미 천 년도 전부터 마녀의 통신수단으로 애용돼온 수정구는 발전을 거듭해 다양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었다.

‘티타임’ 역시 그중 하나였다.

“준비됐네.”

[좋아]

엘로아는 눈을 감고 수정구에 손을 얹은 채 약간의 마력을 흘려 넣었다.

캄캄하게 변한 시야가 환하게 트이며 어스름했던 호텔 객실의 정경이 산들바람이 살랑이는 정원으로 변한다.

장미 덩굴을 병풍처럼 두르고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의 정중앙엔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이처럼 티타임이란 연락자간 심상을 이어붙여 가상의 대화 공간을 조성하는 기능을 의미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VR채팅과 비슷한 셈이다.

서로 전신을 보며 대화할 수 있고, 결국 환상이기에 안전을 보장받으며, 무엇보다 참가자 이외에는 통신 내용을 엿들을 수 없기에 보안상으로 우수하다.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대화가 오갈 때 선호되는 옵션이다.

“생각보다 작네? 사진으로 봤을 땐 170은 될 줄 알았는데.”

테이블 너머 여유롭게 다리를 꼰 리디아의 상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엘로아는 말없이 리디아를 노려보며 맞은 편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수다스럽게 떠들던 리디아는 엘로아가 착석하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으레 협상가들이 내보이는 전략적 침묵이다.

결국 아쉬운 쪽이 먼저 입을 열기 마련.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 본론에 들어가기 전부터 확실히 하겠다는 의도다.

“…….”

다소 놀아나는 건 피할 수 없다.

아마 입을 먼저 여는 건 엘로아겠지.

엘로아는 차라리 그 시간 동안 복잡하게 얽힌 사고를 정리하길 택했다.

마녀 사회에서는 흔히 공적을 두 부류로 나눈다.

선천적인 공적과 후천적인 공적.

전자는 낙인을 물려받자마자 공적이 된 케이스고, 후자는 자신의 대에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케이스다.

하지만 엘로아가 나누는 기준은 조금 달랐다.

토벌의 우선순위로 삼을 공적과 그렇지 않은 공적.

이러한 관점에 비추어 봤을 때 리디아는 모든 기준의 중간선에 애매하게 걸친 공적이었다.

먼저 리디아는 선천적인 공적이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견습마녀가 된 순간부터 선대가 지은 죄를 숙명처럼 지어야 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녀가 된 즉시 리디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대보다 악랄한 짓을 거듭했다.

마녀를 갈아 넣어 마법을 완성하거나 마녀 그 자체를 매매했다.

그렇게 만든 자신의 기반을 바탕으로 공적과 추방자를 규합해 솔리두스 상단이라는 세력을 만들었다.

여기까지였다면 주저할 것 없이 엘로아의 토벌 최우선 순위에 랭크 됐을 것이다.

그러나 리디아는 악행과는 대척점에 놓인 모순된 행보 또한 보여왔다.

먼저 위치포인트의 입김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호문쿨루스를 집중적으로 토벌했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법하다.

호문쿨루스가 남기는 전리품은 마녀에게도 유용하고 솔리두스 상단의 안정적인 가치존속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였을 테니.

하지만 리디아는 동시에 전세계에 빈민국을 위한 구호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비극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설립했으며, 제법 건실하게 운영했다.

이 건실한 운영이란 비단 자선사업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솔리두스 상단 역시 번듯하게 기업체 여럿을 일구고 각종 분야에 투자한다.

상단의 현세 사업 건전성은 따지자면 제머나이 백작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위의 일들이 선의나 정의감의 발로는 아닐 터다.

악으로 남는 것이 훨씬 편하고 간단한 일임에도 필요악을 자처했다.

힘과 폭력만으로 부하를 통솔하여 독고다이의 노선을 걷는 여타 공적과는 다르게 여러 추방자와도 온건한 교류를 이어가며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자신을 남겨둘 수 있었다.

선악의 개념에 구애받지 않는 곤충처럼 언제나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지를 고르는 철저한 사업가.

그런 의미에서 리디아는 누구보다 까다로운 공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엘로아는 입을 열었다.

물론 얌전히 주도권을 내줄 생각은 없다.

“단언하지 도로시의 신상에 털끝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솔리두스 상단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걸세. 티페레트의 이름을 걸고 마지막 잔당까지 없애주지.”

엘로아의 어조는 무덤덤했지만, 그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실제로 엘로아에겐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물론 중간에 저지당할 확률이 훨씬 높고 엘로아 역시 큰 위험을 부담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 쉽진 않을걸?”

“내가 못할 것 같나?”

“당신이 솔리두스 상단의 팔다리를 하나씩 잘라낼 수 있겠지. 그러다가 언젠가 내 목까지 도달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알고 있지? 게헨나가 버린 반 서방 진영의 무수한 구호단체와 고아원이 내 상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걸.”

“…….”

“솔리두스 상단이 붕괴하면 구호단체를 향하는 천문학적인 돈줄이 뚝 끊어지겠지. 가뜩이나 험난한 세상에 영문도 모르고 죽어갈 사람들이 더 늘겠네.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리디아는 특별히 도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저 일찍이 티페레트의 공격에 대비해 연간 수억 달러를 들여 마련한 보험증서를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다.

전염병과 굶주림에 죽어가는 빈민을 구제하고 부모 잃은 어린이를 돌본다는 행위 자체는 선에 가까울지라도 그 목적은 인질극과 큰 차이가 없었다.

분하지만 그 보험증서가 엘로아에게 효과적인 것도 사실이다.

입술을 씹는 엘로아를 달래듯 리디아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마. 나는 도로시를 정정당당한 결투로 생포한 것뿐이니까. 사로잡은 귀족의 몸값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내게 몸값을 치르게 하겠다는 말인가?”

“그래 맞아.”

“먼저 안전을 확인받아야겠네.”

“그쯤이야.”

리디아는 예상했다는 듯 한쪽 팔을 옆으로 벌렸다.

커튼을 걷어내듯 정원의 풍경이 접히더니 그 너머로 고급스러운 객실의 정경이 내비쳤다.

지금 리디아가 통신 중인 장소다.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운 도로시가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보다시피 손가락 하나 안댔어. 마법적으로나, 성적으로나. 그 전에 정말 놀라운걸? 기껏해야 버림 패 정도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정말 그 티페레트가 공적을 위해 협상에 응할 줄이야. 여자친구라도 돼? 공적과 티페레트 공작의 금단의 사랑이라니….”

“잡설은 그쯤 하게. 내게 무엇을 원하지?”

칼로 찌르는 듯한 엘로아의 시선에도 리디아는 거만한 졸부처럼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읽어봐.”

그러더니 장막 사이로 팔을 뻗어 두툼한 서류 뭉치를 티페레트의 앞에 툭 던졌다.

형식은 다르되 내용은 익히 알던 것과 비슷했다.

“갑문?”

“이미 알고 있었어? 이건 좀 의외인걸.”

범람을 통제할 수 있는 갑문에 관한 것.

시우와 엘로아가 조금 더 상황을 두고 지켜보는 게 좋겠다 판단을 내린 그 정보였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리디아의 요구 또한 유추할 수 있었다.

“갑문과 도로시를 교환하자는 의미인가?”

그리고 그건 들어줄 수 없는 요구다.

엘로아의 신념은 라피의 유지를 이어받아 세계의 안정을 지키는 데 있다.

리디아쯤 되는 마녀의 손에 갑문이 넘어간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거기까지 요구하면 영락없이 잡상인 취급받을 것 같아서.”

“…….”

침묵으로 긍정하는 엘로아를 앞에 두고 리디아는 또 다른 서류를 툭툭 던졌다.

“나 이외에도 갑문의 존재를 알아차린 공적이 둘 있어. 우르쉬라와 프리실라. 당신도 알지?”

“역천의 마녀와 폭식의 마녀인가?”

“맞아, 선전포고를 위해 현세에 나와 있던 신 클리포트의 첨병이지. 우르쉬라가 먼저 속삭임의 마녀에게 정보를 받았어. 프리실라는 우르쉬라에게 전해 들었고.”

놀랍게도 리디아는 헥센나흐트 측에 대한 정보를 엘로아에게 술술 넘겨주었다.

“헥센나흐트와 게헨나 양측 문이 닫혀 어수선한 지금, 우르쉬라는 갑문을 독차지할 셈이야. 프리실라는 이권을 나누는 대가로 그걸 돕기로 했고.”

리디아는 말을 뒷받침할만한 자료까지 줄줄이 내놓았다.

도청 등으로 따냈을 것이 분명한 대화록.

갑문에 대해 헥센나흐트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보고서.

심지어 요 며칠 헥센나흐트의 앞마당인 남미에서 공적들의 행적을 기록한 문서까지 넘겨주었다.

명백한 배반 행위.

“난 당신이 그걸 막아주었으면 해. 간악한 헥센나흐트 공적의 손에 갑문이 넘어가는 끔찍한 비극을 말이야. 당신이 갑문을 통제해도 좋고, 부숴도 좋아.”

내용만 듣는다면 굉장히 빈정거리는 어조지만 리디아의 말투는 진지하기 짝이 없다.

간추리자면, 리디아는 도로시의 신병을 넘겨주는 대가로 엘로아를 용역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것이다.

뜻밖의 부탁에 엘로아는 신중히 물었다.

“왜 직접 차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내게 정보를 주는 겐가?”

“난 당신처럼 명예롭진 않지만 끼어들 곳과 그렇지 않은 곳 정도는 분별해. 내가 보기에 지금의 클리포트는 주둥이에 재갈을 물 필요가 있어. 그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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