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2 - #196_대격변(5)
#896
1.
위계의 차이.
일생을 마도를 위해 쏟아붓는 마녀라면 단 하나의 숫자가 얼마나 큰 격차를 이끄는지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예언기관에 의해 선택된 탁월한 오성과 재능을 지닌 견습마녀가 낙인을 물려받고.
한 세기를 모조리 마법을 위해 투자해야 위계 하나를 올린다.
위계가 올라갈수록 격차는 더욱 길고 넓어진다.
20위계와 21위계의 차이보다는 21위계와 22위계의 차이가.
21위계와 22위계의 차이보다는 22위계와 23위계의 차이가 더 큰 간극을 둔다.
산술적으로 계산한다면 22 위계와 23위계가 붙었을 때 언더독의 승산은 없으나 마찬가지라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 언더독 매치를 업셋으로 이끌만한 경우의 수가 있다.
하나, 언더독이 탑독보다 전투에 어울리는 자성마법을 지녔을 경우.
둘, 언더독이 탑독보다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녔을 경우.
셋, 언더독의 마법이 탑독의 마법에 상성 상 우위를 점할 경우.
“……!”
황금색과 백색의 마력이 격렬하게 맞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도로시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날개를 뻗어 몸을 감쌌다.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턱 끝까지 치민다.
“유난 떨던 것치고는 흐음, 재미없네.”
벌써 5차례에 걸친 격돌.
새파랗게 질린 도로시의 안색과는 달리 리디아는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이것만으로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도로시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현재 상황을 점검했다.
열세를 뒤집을 만한 기책을 짜내기 위해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검토한다.
하나, 도로시의 마법이 리디아보다 전투에 어울리는 자성마법인가?
그렇지 않다.
리디아는 한평생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마법을 연구하던 샌님이 아니다.
도로시보다 오랫동안 공적의 신분으로 경쟁자를 쳐죽이며 제 입지를 닦아낸 마녀이다.
둘, 도로시가 리디아보다 풍부한 전투 경험을 지녔는가?
그렇지 않다.
가능한 분쟁을 회피하며 유유자적 살아온 도로시와 다르게 리디아는 기꺼이 전장에 발을 담그던 호전적인 마녀였다.
리디아의 손에 죽었다고 알려진 굵직한 이름의 대마녀만 다섯이 넘어간다.
셋, 도로시의 마법이 리디아의 마법에 상성상 우위를 점하는가?
모든 여건 중 가장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리디아와 도로시의 궁합은 최악 중 최악이었다.
극도의 마력을 소모하며 느껴지는 피로감.
천사의 고리에 의해 번번이 과부하에 시달려 작열 통이 느껴지는 마력회로를 느끼며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
먼저 리디아가 선보인 ‘무가치의 독나방’.
속도 자체는 별 볼 일 없고, 딱히 주변에 떠다닌다 해서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도로시의 절대력 이상으로 절대적이다.
맞닿은 모든 것의 가치를 부식시켜 어떠한 방어도 공격도 무력하게 만드는 비현실적인 능력.
하나라도 직접 맞닿는다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지키는 두 사람의 체급 차를 까마득히 벌려버릴 것이다.
따라서 도로시는 깃털을 사출해 요격하거나, 바람으로 일소하는 것으로 대응해야만 했다.
허나 독나방의 진짜 무서운 점은 달리 있다.
“그렇게 벌레만 잡다가 끝내려고?”
리디아가 재차 금화를 튕기자 언제 사라졌냐는 듯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부유하기 시작한 독나방 무리.
이렇듯 독나방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이 생성된다.
최적화가 얼마나 잘 돼 있는 것인지, 토템으로 금화를 사용하기 때문인지 마력의 소모는 없다시피 하다.
리디아에겐 로우 코스트 견제기나 다름없지만,
도로시에겐 하나라도 빈틈을 허용한다면 그대로 결판나는 실로 기울어진 전장.
이마저도 리디아를 난적으로 만드는 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안 오면 내가 간다?”
리디아의 손이 지휘하듯 허공을 휘젓는다.
성당의 바닥을 불태우며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금빛의 화염.
리디아가 직접 ‘부멸(否滅)의 불길’이라고 밝힌 해당 마법은 최초 절대력이 실린 도로시의 일격을 막아냈던 마법이기도 하다.
-펄럭!
도로시는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절대력을 구사하기 위한 ‘강림’의 조건을 제 손으로 깨고 회피기동을 취한 것이다.
극한의 방어력을 활용해 방패로 때려죽이거나 카운터하는 전투방식을 구사하는 도로시.
기교를 부린 것도 아닌 정직한 정면 공격에 등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불길이라기보다는 세세한 금빛 입자의 일렁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부멸의 불길’의 효과는 실로 단순 명쾌했다.
오랜 역사와 공통된 심상이 그려낸 마법의 상징체계를 부정하고 멸한다.
이면 결계와 예장까지 상징 체계를 빌려 와 천사의 힘을 사용하는 도로시에게는 실로 천적과도 같은 마법인 것이다.
모든 채점표가 절망을 가리키는 가운데….
도로시는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절망도 느껴봤다.
무가치한 삶을 목적 없이 연명하던 매 순간은 이 전투보다 괴로웠다.
그 어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서라도 돌아가고 싶은 품이 생긴 지금 도로시의 전의는 꺾이지 않는다.
“하압!”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리디아의 주위를 맴돌던 도로시는 실낱같은 빈틈을 찾았다.
사방에서 일렁이며 리디아의 본체까지 커버하는 공방 일체의 불길.
그러나 아무리 부멸의 불길이라도 절대력 자체를 증발하듯 날려버릴 순 없었다.
커다란 각설탕은 커피에 넣어도 잠시나마 형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잠시 맞닿은 것뿐이라면 도로시의 상징은 유지된다.
천사의 고리를 활용해 상징이 뜨거운 불길에 완전히 녹아내리기 전 한 방 먹일 수만 있다면….
-키이이이잉!
천사의 고리가 미친 듯이 회전하며 주위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뚜렷해진 날갯짓으로 2회에 걸친 재가속.
평소 방어에 할애하는 수녀복의 마력까지 검에 담아 극한으로 코팅한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2초가량은 부멸의 불길을 버텨낼 것이다.
동시에 중력 자체에 가중치를 둬 해파리처럼 펄럭이는 독나방을 찍어누르고 고스란히 드러난 리디아의 빈틈을 향해 칼을 내려쳤다.
이제껏 고수해왔던 전법이 전혀 먹히지 않게 되었음에도 당황하지 않는 임기응변 능력.
동시에 두 가지,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구사하는 섬세한 마법적 능력.
도로시 역시 고분고분하게 세상을 살아남아 온 건 아니었다.
이제껏 제자리에서 도로시를 상대하던 리디아는 처음으로 놀란 듯한 시선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증명하라.”
또 하나의 금화를 튕긴 리디아의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며 길쭉한 단창이 생성되었다.
1M 남짓한 길이 탓에 창이라기보단 커다란 말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병기.
창날 끝에 맺힌 형용할 수 없는 비틀림에 도로시는 일순 주저하고 말았다.
어떤 효과를 지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허나 요사스러우리만치 찬란한 빛을 내뿜는 단창의 날 끝이 빙그르르 돌며 도로시를 조준하자 숨이 막힐 듯한 압박을 느꼈다.
죽음이 눈앞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한 환시에 호흡이 흐트러진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직감이었다.
“칫….”
공격을 중단한다.
스쳐 지나가듯 리디아에게 위협 정도만 주며 단창의 조준에서 벗어난 도로시는 이를 꽉 물었다.
으레 모든 전투가 그렇듯 마법 전투에서 무리한 공수 전환은 필연적으로 빈틈을 동반한다.
도로시가 자각하고 있을 빈틈을 노련한 리디아가 놓쳤을 리 없다.
만약 지금 이 빈틈으로 추격타가 들어온다면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리라.
“눈치 좋네.”
하지만 리디아는 팔짱을 끼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추가타를 가해오지 않았다.
도로시에게 위기감을 주고 공수 전환을 강요한 단창조차 잠잠하다.
“진짜~ 열받게 싸우네.”
“아부 고마워. 그래도 항복은 늦은 거 알지?”
리디아는 도로시의 빈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분명 인식했고 하고자 한다면 집요한 추적으로 승부수를 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승부수를 던지는 건 그만한 빈틈을 보인다는 말과 같다.
이미 도로시를 압도하고 있음에도 아주 미세하게나마 생겨날 변수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인기 없는 웰라운더 챔피언처럼 KO를 노리는 대신 자신이 지지 않는 전장으로 상대를 끌고 들어간다.
리디아는 호전적인 말투와 달리 전투에서마저 냉정하고 철저한 사업가 마인드로 임했다.
“후우….”
그 결과 도로시가 느끼는 건 초조함과 심리적인 압박감이다.
제 밑천을 끝끝내 드러내지 않고 잠잠해진 단창.
아무리 격차를 좁히려고 발악해도 어울려주지 않은 채 전법을 고수하는 굳건함.
‘말라죽는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실감 난다.
이렇게 압박받는 시간이 흐를수록 승리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지겠지.
리디아는 아직 두 가지의 패밖에 보여주지 않은 데 비해, 도로시는 꽤 여러 장의 패를 오픈해버렸으니 말이다.
결국 리디아의 철저한 판짜기 아래, 그녀의 의도대로 도박적인 한 수를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키이이이이잉!!!!
도로시는 남아있는 모든 마력을 긁어모았다.
그녀가 지닌 최고의 일격 ‘심판’을 준비한다.
-쿠구구구궁
예배당 전체에 지진이 일어난 듯한 진동이 퍼진다.
대기는 삐걱삐걱 비명을 지르며 예배당을 받들고 있는 기둥에 잎맥처럼 번져나가는 마법식이 번져간다.
이 예배당 또한 도로시의 마법 그 자체.
오르간을 반주 삼는 성가처럼 아름다운 선율이 천둥처럼 예배당에 메아리 쳤다.
리디아는 드높은 천장을 올려 보았다.
아래 서 있는 것만으로 다리가 풀려버릴 것 같은 무지막지한 중압감.
폭거나 다름없는 힘에서 기인한 신성함.
“이건 좀 무섭네.”
하얀 광채로 이루어진 거대한 왕관과 한 자루의 검이 보인다.
직경 약 50M에 달하는 거대한 왕관의 가운데는 거대한 검이 수직으로 우뚝 선 채 리디아를 겨냥하고 있다.
“왕관으로 가두고, 검으로 죽인다 이거지?”
천사의 상징으로 등장하곤 하는 불의 검은 실제로는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의 뜻을 대행하기 위한 신성한 힘이 인간의 눈에는 일렁이는 불꽃처럼 비칠 뿐.
-후우우우웅!
그 힘에 짓눌려 터져나가는 대기만으로 독나방은 터져나가고 부멸의 불길은 곧 꺼질 촛불처럼 위태롭게 휘청인다.
이윽고.
————!!!!!!!
찬란한 빛의 검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떨어지며 거대한 예배당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성소가 성소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건 심판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천상과 지상이 연결되고 신의 뜻이 대지에 울린다면 성소 역시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