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1 - #196_대격변(4)
#895
1.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았다.
술은 같은 브랜디지만 안주는 각기 다르다.
도로시는 길고 두꺼운 시가를 물었고 리디아는 길고 얇은 파이프 담배였다.
고요한 적막 속.
다용도 공기청정기가 내는 모터음만이 웅웅 울린다.
과거 리디아는 신시우를 빼돌리기 위해 뒷수작을 부렸다.
하지만 결국 린네에게 신시우를 탈취당한 뒤, 도로시가 합류한 탈출극마저 저지하지 못했다.
이후 헥센나흐트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동이 리디아의 간계와 연결되었다는 점이 밝혀지며 온건파의 수장에서 실각.
온건파의 체급을 불리기 위해 초빙했던 손님 ‘양자리의 마녀’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실권을 넘겼다.
프시케 티가든에게 화평을 유지할 마음 따윈 없었고.
그 결과 헥센나흐트의 온건파는 구심점을 잃어버렸다.
물론 솔리두스 상단주이며 23 위계의 대마녀인 리디아가 하루아침에 모든 권력과 힘을 잃을 리는 없다.
허나 고상한 자존심에 생긴 생채기는 곪은 상처처럼 욱신거리며 복수를 재촉했다.
그럼에도 곧장 설욕의 일격을 가하지 않고 마지막 술 한잔을 허락하는 건 역시 정보 때문이다.
대마녀의 싸움은 생포를 장담할 수 없다.
애석하게도 죽여버리게 된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정다운 술자리를 빙자한 눈치싸움을 이어가는 수밖에.
“살로메는 저대로 보내줄 거야?”
먼저 입을 연 쪽은 도로시였다.
“물론. 난 먼저 개짓거리한 상대가 아니라면 계약은 지키는 편이라서. 상관을 배신한 보답으로 얼굴 반반한 남자 애인과 함께 짧고 강렬한 사랑을 나누겠지. 배신당한 소감은?”
“나야 워~낙에 사람을 믿지 않는 편이라.”
“사실 함정인 걸 알았다?”
“뭐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의심이야 했지.”
리디아는 피식 웃더니 연기를 길게 뿜었다.
“재밌네.”
공적답지 않은 선택을 한 도로시에 대한 조소라기보다는 순수한 흥미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네 기억 속에 넌 나와 닮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트레이드 마크인 긴 흰 장갑으로 쥔 잔을 호쾌하게 털어내는 리디아.
도로시는 기꺼이 빈 잔을 채워주는 동안 리디아는 다리를 꼬며 키득거렸다.
“설마하니 정말 남자 하나 구하려고 헥센나흐트에서 그 난동을 피웠을 줄이야. 보기보다 로맨티스트였잖아?”
“흐음~ 이 나이 먹고 낭만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
리디아의 감상은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냉정한 채점이었다.
도로시는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실로 사업가적인 마인드를 지니고 있는 공적이었다.
진또배기 미친년들처럼 위아래 분간 못 하고 날뛰는 것도 아니고.
영향력 있는 거물인 척하고 싶어하는 풋내기도 아니었다.
냉담하고 냉철하다.
손익 계산은 깔끔했고 무엇보다 맺고 끊어야 하는 감각이 기가 막혔다.
그 덕분에 몇몇 프로젝트에선 훌륭한 비지니스 파트너가 됐던 적도 있다.
“늦바람에 로맨티스트가 된 네 덕에 골머리 좀 썩였어. 천하의 리디아 마그누스가 아주 꼴이 우습게 됐지.”
“그 점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해. 고의는 아니었어. 그래서 이런 깡촌에 유배라도 당한 거야?”
“유감스러워할 것 없어. 난 빚은 이자까지 받아내야 직성이 풀리거든.”
“그래? 절~대 쉽진 않을걸?”
역사상 가장 많은 마녀를 팔아치워 왔을 리디아의 엄포에도 도로시는 대담하게 웃었다.
“아무리 분에 겨웠다지만~ 릴리스와 손을 잡는다니. 걘 너보다 지독한 악성 채권자야. 곱게 못 죽을텐데?”
도로시는 이미 일련의 사건을 릴리스와 연결짓고 있었다.
공적 사회에서 계략과 흉계는 숨 쉬듯 벌어지는 일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정신을 차리고 나면 온몸에 끈적한 실이 엉겨붙어 있는 느낌의 계략을 짤 수 있는 자는 유일하다.
릴리스 케테르, 속삭임의 마녀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린 리디아가 궁여지책으로 릴리스와 손을 잡았다.
여기까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확실히, 수완이 대단하긴 하더라고. 왜 그렇게 많은 마녀가 뒤통수를 맞고 나자빠지나 했는데….
일단 반신반의하면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이만한 월척이 낚였잖아.”
예상 외로 순순히 시인한 리디아.
이번엔 그녀가 도로시의 빈 술잔을 채워주었다.
“그보다, 남자 마녀랑은 무슨 사이야?”
“그냥~ 귀엽게 굴길래 만나주고 있어.”
도로시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짤랑거리는 금화처럼 화사한 웃음을 터뜨리는 리디아.
“네가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구나? 그렇게 어색한 거짓말하는 모습도 처음 보는데?”
“…….”
“뭐, 그래. 이해할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겠지. 좋은 걸 알았네.”
도로시의 얼굴에 여유가 사라졌다.
대신 모습을 드러내는 건 흉포할 정도로 진한 투지.
언제나 유들유들한 도로시의 눈가에 섬뜩한 마력반사광이 뚝뚝 흘러넘쳤다.
“그 사람 건드리면. 넌 나한테 죽어.”
“이미 건드렸어. 아주 곱상하니 귀엽게 굴던데?”
살기를 줄기줄기 흩뿌리던 도로시는 멈칫했다.
“왜, 그렇게 속상해? 니 애인 내가 따먹었다는 게?”
“…….”
“몸은 좋은데 영 힘을 못 쓰는지 내 아래 깔려서는 아주 자지러지더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두 번 모두 방해꾼이 찾아와 끝까지 하지 못했지만.
리디아로선 애인을 뺏긴 도로시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전투에 앞서 이렇게나마 앙갚음을 해야 않겠는가?
하지만 돌아온 건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아하하! 하하! 하하하하!”
도로시가 박장대소를 하며 테이블을 탕탕 내려친 것이다.
살벌하던 기색이 어디 갔는지 눈가에 글썽이는 눈물을 닦아내며 정신없이 웃는 도로시.
“뭐야?”
이게 미쳤나?
떨떠름하게 도로시를 바라보던 리디아의 입매가 비틀린다.
“신시우가? 아래 깔려서 자지러져? 재밌는 농담이네~”
어쩐지 우습게 취급하는 눈빛에 기분이 팍 상해버린 리디아.
웃음 포인트가 어디인지 종잡을 수 없었기에 더욱 기분이 나빴다.
비웃음거리가 됐다는 건 확실했으니까.
“뭐, 이쯤 하자~ 너도 바쁘잖아?”
다시금 여유를 되찾은 도로시는 온 더 록스 잔 안에 시가를 담갔다.
치지직 불똥이 꺼져가는 소리와 함께 주홍색 주정 안에 잿더미가 아지랑이처럼 번진다.
여흥과 탐색을 겸하던 술자리는 파토다.
리디아는 철저한 사업가다.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까다롭게 꼼꼼하게 모든 여건을 따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리디아 아래엔 많은 수하가 있고, 이곳은 헥센나흐트의 앞마당인 남미 북부다.
만약 이 일이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벌어진 일이었다면 굳이 리디아가 행차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수하를 대동하는 것만으로 도로시를 제압할 수 있겠지.
허나 릴리스는 공적 사이에도 신용이 없는 자.
솔리두스만한 조직이 그녀와의 협력에 동조했을 리가 있나.
“결국엔~ 너 혼자뿐이라는 거잖아?”
즉, 리디아만 잘 처리할 수 있다면 무사히 귀환해 시우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아주 꿈은 아니다.
좁디 좁은 골방의 풍경이 일렁거리며 변화했다.
높다란 천장을 바치는 하얀 대리석 기둥과 예스러운 양식의 장엄한 예배당이 현현한다.
“두려워 말라.”
도로시의 손에서 길고 뭉툭한 검이 들렸다.
절대적인 천사의 힘, 그 상징을 차용해 사용하는 도로시의 예장.
22 위계답게 어지간한 마녀라면 대번에 기가 질릴 만큼 농밀하고 무거운 마력이 사방에서 준동했다.
수녀복에 새겨진 마법진은 높다란 천장과 드넓은 지면을 이어주는 하나의 기둥이 되고.
도로시의 몸에는 천사의 힘이 깃든다.
온갖 이도교와 이단을 지옥의 엉걸불에 처넣은 절대적인 천사의 힘이.
“그래서?”
마치 관광객처럼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던 리디아는 이내 시시하다는 듯 술잔을 휙 내던졌다.
“내가 혼자면, 뭐 달라져?”
2.
리디아 마그누스, 금화의 마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나 거의 전투를 벌이지 않지만, 그녀가 마녀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애초에 솔리두스 상단이라는 거대한 연합의 상단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리디아는 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으로 금화를 튕겼다.
“증명하라.”
맑고 청명한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튕겨 올라간 금화가 산산이 부서지며 금빛의 입자로 화한다.
리디아의 등 뒤로 둔중한 날갯짓과 함께 홀로그램처럼 퍼져 나가는 나방.
황금빛 광채를 가루처럼 흩뿌리며 퍼덕이는 날개를 퍼덕이는 수백 마리의 나방은 온통 베일에 싸인 리디아의 마법 중 그나마 인지도가 있는 마법이었다.
무가치의 독나방.
접촉한 삼라만상의 가치를 부멸시켜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케하는 저주의 마법.
기본기인 주제에 대 마녀 전투에는 대적할 자가 몇 없다던 검귀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강력한 마법이기도 하다.
“두려워 말라.”
하지만 근접전에 특화된 린네와 달리 도로시는 상당한 테크니션이었다.
‘절대력’을 어디에 부여하느냐에 따라 힘의 활용도는 무궁무진.
도로시의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뻗는다.
수만 개의 깃털로 이루어져 골격이 존재하지 않는 양 푹신거리는 날개는 순식간에 부풀어 채찍처럼 공간을 후려쳤다.
-후우우웅!
깃털 하나하나가 밀어낸 대기의 벡터는 오직 한 방향을 향한다.
절대력의 작용 하에 휘몰아치는 광풍은 단순히 거센 바람이 아니었다.
버티려는 자는 부러뜨리고, 마주하려는 자는 으스러뜨리는 신의 바람은 독나방을 모조리 터뜨리며 리디아에게 까지 닿았다.
-키이이이잉!
어느덧 생성된 천사의 고리는 무식할 정도의 마력을 뿜어내었다.
기세를 놓지 않고 바람을 타고 달리는 도로시.
하얀 날개를 돛처럼 활짝 펼쳐 독나방이 터져나간 공간을 질주하는 속도는 일전 시우를 상대하던 때와는 격이 다르다.
여러모로 사정을 봐주었던 그때와 달리 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대해 리디아의 반응은 간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천사의 고리에 도움을 받은 가속에 반응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도로시의 일격을 우습게 보고 있는 건지.
찬란한 금발을 휘날릴 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서 있던 리디아의 목에 도로시의 검이 박혀 들었다.
이 일격은 절대적이다.
반작용조차도 역방향으로 돌려내어 설사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체를 세워두었더라도 순두부처럼 으깨며 나아갈 힘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파츠츠츠츠츠!!!!
시나브로 타오른 불길이 리디아의 하얀 피부와 도로시의 검 사이를 갈라놓는다.
불꽃에 물리적인 힘 따위는 없을 진데도 아무리 힘을 주어도 검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전투경험에서 비롯된 본능이 도로시에게 경고한다.
거리를 둬야 한다고.
-화르륵!
금빛의 불꽃이 검을 타고 번지려는 낌새를 내비치자마자 도로시는 거리를 벌렸다.
경악을 숨기며 제 검을 내려보았다.
금빛 불꽃과 검이 맞닿는 순간 절대력이 마멸되었다.
예배당이 있는데도, 강림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고 있음에도.
위대한 기적의 행사를 비웃듯 신성을 소멸시켰다.
23 위계란 위계가 거저 쥐어지는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금빛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몸에 휘감은 리디아는 점잖은 가식이 벗겨진 잔인한 미소로 빙긋 웃었다.
“네 가치는 얼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