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0 - #196_대격변(3)
#894
1.
문을 통한 외부 통신이 복구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탁상공론에 불과한 지금.
8시간가량 이어지던 대회의는 명확한 지침이나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났다.
모두가 에렐림 공작의 말에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코하브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인이라고 해서 모든 걸 솔직히 털어놓아야 할 의무는 없다.
더군다나 이본느 코하브 백작과 블랑쉬 에렐림 공작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나이도, 마녀 사회에서의 배분도, 위계도.
“블랑쉬.”
“왜 그러죠?”
“저는 블랑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어요.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걸 알고 있다 해도 충격에 이어 섭섭함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에도 말해주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때는 농담인 줄 알았는걸요.”
“제 잘못은 없는 것 같네요.”
대회의가 끝나자마자 ‘문’의 재설정을 위해 연구자료를 한가득 들고 온 블랑쉬는 가볍게 답했다.
더 깊은 언급은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엿보였다.
하지만 코하브 백작은 몹시 드물게 블랑쉬가 보내는 암묵적인 신호를 무시했다.
“…그래서, 예언을 숨기신 건가요?”
“…….”
“이 사태를 바로잡을 방법이 있잖아요. 그것도 둘이나.”
사실상 블랑쉬의 비서직을 수행하는 이본느다.
모든 일을 도맡는 만큼 에렐림 공작이 예언기관에서 빼돌린 예언의 내용 또한 알고 있었다.
그건 케테르가 만들어낸 규율이 무너져내리는 지금,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두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블랑쉬는 대회의에서 그 예언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유라면 들었다.
블랑쉬는 인간의 발전을 두려워한다고 하니까.
이번 사건이 인간의 발전을 크게 억제하고 그들을 지배할 구실이 되어줄 테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네요.”
펜을 내려놓은 에렐림 공작의 어조는 평이했지만 그녀와 오랜 시간을 보낸 이본느는 알고 있다.
블랑쉬가 무척이나 불편해하고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음을.
“블랑쉬의 생각은 알겠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렇게까지?”
“인간뿐만이 아니라 마녀도 죽게 될 거에요. 저는….”
“이본느.”
두 연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우위인지는 알고 있었다.
연애에서도 권력 차는 발생하니 말이다.
하지만 블랑쉬가 그런 권력 차를 의식하듯 단호하게 말허리를 끊은 적은 처음이었다.
“두 예언은 폐기해주세요. 암호를 해독한 자료도 전부.”
“…….”
“날 위해서라면. 그렇게 해줄 거죠?”
사무적인 명령을 뒤따르는 부드러운 부탁에 코하브는 눈을 감고, 떴다.
“알겠어요.”
2.
한 번도 자신이 선한 마녀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악역으로 태어나 되는대로 살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죽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저 목숨을 연명하던 너절한 삶.
따라서 도로시에게 인생이란 관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역시 한 명의 남자 때문이겠지.
최소한의 관리만으로 해마다 막대한 자산 증식 수단이 되어주던 사업체를 정리하는 것이나, 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이게 된 것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호문쿨루스의 왕을 조사하러 나온 것이나.
하나 같이 어울리지 않는 행동들은 역시 ‘달라지고 싶다’라는 마음에서 나온 행위일 터이다.
[그게 그대의 뜻이라면 말리지는 않겠네만….]
“알겠어~ 공작님,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할게.”
[부디 조심하게나]
그러니까 위기에 처한 부하직원 살로메를 구하기 위해 귀여운 분홍 공작님께 위험한 서브퀘스트를 수락받은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도로시는 국제적인 규모의 무기 밀매 조직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아무리 유능한 도로시라해도 그만한 비지니스를 홀로 이끄는 건 불가능하다.
신뢰할만한 인간이나 추방자를 중간 관리자로 두고 관리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살로메는 유능한 비서였다.
성적 취향이 확고하게 달라 침대에서 살을 맞댄 적은 없었지만 120년 넘게 알고 지냈다.
꽤 자주 술자리를 함께한 친근한 보스와 충직한 부하직원의 관계랄까.
도로시가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걸려온 무전.
살로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로시 님이 헥센나흐트에서 남자 마녀를 빼돌린 이후부터 헥센나흐트의 보복이 시작됐어요]
[물론 원망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는 B-32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추적망이 점점 조여오더니 결국 발각됐어요]
[다행히 추적을 뿌리치고 다른 은신처로 숨어들었지만 부상을 입어서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상황이에요….]
[언제 발각될지도 모르고, 만약 발각된다면…. 지금 부탁할 사람은 도로시님밖에 없어요….]
비록 마녀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다 말하기 어려웠지만 살로메는 유능했고, 충직했다.
추방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실함을 보유하기도 했고 말이다.
괜히 도로시가 사업 정리의 전권을 맡기고 유유자적 휴가를 보내던 것이 아니다.
그런 살로메가 궁지에 몰릴 정도라면 경우는 셋 중 하나다.
어지간히도 운이 좋지 않았던가.
헥센나흐트에서 그만큼 꼼꼼히 개를 풀었던가.
이 자체가 함정이던가.
도로시는 간단한 확인질문 몇 가지를 끝낸 이후 마음을 정리했다.
이미 귀여운 분홍 공작님께도 임무가 다소 길어질 수 있음을 전달했고 확인도 받았다.
“하아~ 바보 다됐네~”
몇 번을 곱씹어보아도 어리석은 일이었다.
정보도, 추가적인 정보를 얻을 시간도, 기존 정보로부터 얻을 수 있는 확증도 부족하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는 분명 ‘모른 척하기’일 것이다.
하지만 살로메를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시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가 여기 함께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헥센나흐트에 잡혀가서도 기어이 세 개의 짐덩이를 끌고 탈출했던 시우다.
구해야 할 대상이 도로시에게 평생을 충성을 바쳐온 충직한 부하직원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말할 것도 없다.
“뭐~ 바보같이 정직한 얼굴로 일단은 구해보죠라고 말하겠지….”
사랑을 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사람과 닮고 싶다’라는 마음이 강해지기에 변해가는 것이다.
도로시는 감시의 눈길을 경계하며 스며들듯 옛 스페인 건축 양식으로 건축된 건물 사이를 누볐다.
얼마전 군단에 의해 남미 전역이 홍역을 앓았다지만 콜롬비아의 수도이자 은신처가 있는 보고타는 그 환난에서 빗겨간 듯했다.
길거리는 활기찼고, 거리의 한쪽의 노점에선 다양한 피부색을 지닌 현지민들이 신선한 과일과 채소, 딱 봐도 매워 보이는 매운 고추가 들어간 음식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만 바가지를 쓰고 사는 전통적인 손뜨개 공예품이나 수제품들이 눈길을 끈다.
다채로운 색상의 벽돌로 쌓아올린 주택과 높다란 빌딩 사이를 지나쳐 지하터널로 향했다.
채광이 전혀 되지 않는 터널은 며칠 전에 내린 건지도 모를 빗물이 고여 썩어가고 있었다.
여느 남미 대도시가 그렇듯 화려한 부로 쌓아올린 마천루 옆엔 인간의 최소 욕구만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슬럼이 있기 마련이다.
살로메가 숨어들었다던 B-32 은신처 역시 오래된 지하터널에 생성된 슬럼가 안에 있었다.
마녀는 그 고매한 성향 덕에 은신처에서마저 퀄리티를 따진다.
당장 도로시의 별장만 해도 호화별장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어지간히 절박하지 않은 이상 쥐와 바퀴벌레가 들끓는 반지하를 은신처로 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좋은 눈속임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위를 살피고 굳게 잠겨 있는 듯 보이는 슬레이트 문을 열자 다 쓰러져가는 것처럼 위장된 은신처가 드러난다.
“살로메~ 나 왔는데?”
구두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들기며 인기척을 내자 낡아빠진 마룻바닥이 들썩였다.
“도로시 님? 정말 도로시 님이세요?”
“나처럼 예~쁜 보스가 또 있었어?”
지하로 통하는 입구에서 두더지처럼 쏙 얼굴을 들이밀더니 쩔뚝거리며 나타난 건 살로메.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 건지 얼굴이 굉장히 초췌했다.
“정말 와주셨네요…. 저, 저는 솔직히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렇게 와줬는데 유치한 함정이거나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일단 들어오세요.”
살로메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거쳐 은신처로 들어섰다.
입지를 구리게 해 의심의 여지를 최소화했다 해도 일단 은신처다.
푹신한 침대, 샤워설비, 소파와 테이블, 전용 위성을 통해 회사 내부망에 접속할 수 있는 노트북이 놓여있다.
원룸이긴 했지만 다 무너져가는 주위 풍경과 달리 쉘터 내부는 그래도 1성급 유사 호텔 정도의 퀄리티는 나왔다.
“생각보다 감시는 허술하던걸?”
“그런가요?”
“응, 네가 자알 따돌렸거나. 아니면 너무 지레 겁먹고 숨어 있던 거 아니야?”
은신용 마법식이 새겨진 망토를 벗으며 한숨 돌리는 도로시.
실제로도 딱히 다른 마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입 미션을 예상했는데 너무 수월하달까?
“부상은 어때?”
“참을 만해요.”
“보여줘 봐.”
아까부터 절뚝이고 있던 것이 눈에 비친다.
“…….”
도로시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살로메는 옷을 걷자 겨우 응급처치를 끝낸 피비린내 나는 환부와 뒤틀린 채 살갗 밖으로 툭 튀어나온 허벅지 뼈가 보였다.
“어휴, 아파도 참아.”
“네… 윽!”
뼈가 튀어나온 채 아물어버린 살을 찢고 뼛조각을 염동으로 끼워맞췄다.
치유 마법을 사용하자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치료되어가는 상처.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며 도로시가 물었다.
“이제 이유나 듣자. 왜 날 팔았니?”
“네, 네…?”
반신반의하던 도로시지만 살로메와 은신처에서 마주하는 순간 확신했다.
예전부터 거짓말은 영 못하던 녀석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무전 상으로 도로시를 속여 넘긴 것부터가 굉장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네가 푼 돈이나 받자고 날 함정에 끌어들이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묻는 거야.”
살로메의 속눈썹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두 눈은 도로시 앞에서 거짓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듯싶다.
결국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배신을 토로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인질로 잡혔어요.”
머릿속에 지나쳐가는 흐릿한 남자의 얼굴.
도로시 회사의 간부 중 하나였다.
“아아~ 카를로스였던가? 통관담당이었던 것 같은데. 이래서 사내 연애를 막았어야 했는데.”
역시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새삼 그 사실을 깨달은 도로시는 살로메의 상처에서 손을 뗐다.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아물어 있었다.
“치료는 끝났어. 나가 봐.”
“정말, 정말 죄송해요 도로시 님….”
“이래서 어울리는 짓만 하고 살아야 하는 건데~”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쉘터에 홀로 남아 앉아 담배를 물었다.
“흠~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은신처마다 브랜디를 비치해 둔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온더록스 잔에 술을 따르고 쌉싸름한 배신의 맛을 음미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마녀가 내려왔다.
금궤를 녹여 만든 듯 화사한 금안과 금발.
이 꿉꿉한 지하 은신처를 궁전으로 착각하게 하는 우아한 분위기.
솔리두스 상단을 이끄는 ‘금화의 마녀’, 리디아 마그누스.
“도로시,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게~”
“소파가 이게 뭐야? 싸구려 매시잖아? 옷감 다 갈리겠네.”
도로시 맞은 편 소파에 손수건을 깔고 앉은 리디아는 잔을 채워달라는 듯 술잔을 내밀었다.
“계산해볼게. 네가 날 엿먹인 걸 갚으려면 어느 정도의 대가가 필요할까?”
“글쎄~ 술 한 잔으로는 부족하겠지?”
두 공적은 서로를 마주 보며 사납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