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99화 (905/917)

Chapter 899 - #196_대격변(2)

#893

1.

게헨나의 대회의는 해산한지 하루도 되지 않아 다시 소집되었다.

호문쿨루스 군단의 행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던 게헨나 마녀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쉬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생필품에 한해서는 독자적인 자급자족 체계를 갖춘 게헨나지만 사치품의 상당 부분 현세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현세에 사업체를 두고 있는 마녀도 적지 않았다.

공적들이 현세를 아주 아사리판으로 만든다면 그 피해와 불편은 고스란히 전가된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마녀의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올리게 한 원인은, 바로 보더 타운의 ‘문’이 닫혀버린 것이었다.

케테르 공작의 주도하에 게헨나가 창립된 이래 문이 닫힌 적은 없었다.

그나마 최근은 유지 보수 작업이 잦아지며 입출국에 제한이 생기긴 했으나, 그건 출입국 관리소의 주재하에 통행을 제한했던 정도니 이번과는 경우가 전혀 달랐다.

유례 없는 사태에 세피로트의 나무의 대회의장은 전에 없이 붐볐다.

게헨나 내부에 머물고 있던 귀족은 전부 집결했으며, 그 외의 여러 학파의 마녀들도 빠짐없이 자리에 착석했다.

“이 미친년들이 기어이 선을 넘네.”

“그만큼 우리가 우습게 보였다는 거겠죠.”

“그럼 호문쿨루스 군단은 양동 작전이었던 건가요? 우연이라기에는 타이밍이 공교롭네요.”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인가?”

“하…. 제 사업체도 보스턴에 있는데 별문제 없겠죠?”

“오늘 배송되기로 한 물품이 있는데 글렀네….”

“케테르 공작은 정말 죽기라도 한 거야?”

그 많은 면면 중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마녀는 하나도 없다.

언짢은 기색이 가득한 대화 소리가 회의장에 울렸다.

마녀 사회엔 불문율이 있다.

신비는 신비로 남아있을 것.

케테르 공작이 핏빛 숙청의 길을 걸으며 만들어낸 그 규율은 그녀의 유고가 전해진 지금도 지켜지고 있었다.

게헨나가 만들어진 지도 어느덧 500년이 훌쩍 넘고, 대다수의 마녀가 케테르의 방식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허나 헥센나흐트는 그것을 멋대로 깨버렸다.

게헨나의 마녀 대다수는 현세에 큰 관심이 없지만 공적을 향한 혐오와 멸시는 확연하다.

공적이 세운 도시가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것에 대해 묵과할 만큼 배려심 넘치는 존재도 아니었다.

“에렐림 공작께서 입장하십니다.”

흉흉한 분위기가 감도는 회장 속 대회의의 의장 역을 맡은 에렐림 공작이 추종자를 거느린 채 들어섰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일말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시간을 맞추지 못해 죄송합니다. 출입국 관리소 측에서 ‘문’에 관한 정보를 받아 검토하느라 참석이 지연되었습니다.”

“문을 닫은 것도 헥센나흐트의 수작인가요?”

“복구는 어느 시점까지 가능하죠?”

“현세에서 호문쿨루스들이 인간들에게 관측되었다는 보고를 마지막으로 받았습니다. 사실입니까?”

“왜 미군 함대를 공격한 거죠?”

쏟아지기 시작하는 질문들을 묵묵히 듣던 에렐림이 입을 열었다.

“하나씩 답변 드리겠습니다. 문의 기능정지는 헥센나흐트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간접적인 영향은 있다는 말인가요?”

“최초 케테르가 ‘문’을 통한 주머니 차원으로 게헨나를 만들 당시, 마녀의 ‘신비’를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작금에 이르러 마녀의 신비는 깨져버렸죠.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인간이 마녀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마법은 세계의 설정을 파헤치고 상징을 이용하는 학문이다.

하지만 이번 헥센나흐트의 습격 사건 탓에 인간과 분리되었던 마녀의 존재는 만천하에 드러났다.

‘마법이란 신비 속의 존재다’라는 전제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문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속히 복구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전례 없던 개량공사인 만큼 약 한 달에서 두 달가량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헥센나흐트에 심어두었던 정보원으로부터의 첩보에 의하면 헥센나흐트의 문 역시 폐쇄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쪽도 이와 같은 사태를 상정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에렐림 공작이 나눠 준 보고서를 유심히 살피던 제머나이 백작이 물었다.

“왜 이런 짓을 벌인 걸까요? 나 원 참….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건지.”

“케테르에 의해 억압되었던 불만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겁니다. 정해진 수순이었죠. 마녀의 힘은 일찍이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고도 남았습니다.”

대략의 현황 보고가 끝나자 논의 주제는 빠르게 다음 사항으로 넘어갔다.

요약하자면 호문쿨루스가 인간을 직접 습격하게 된 지금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또 헥센나흐트를 이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가장 먼저 예소드 백작이 나섰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을 보호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에요. 연락되는 대로 현세의 긴급대책본부와 협력하고 그전까진 효과적인 대처법을 고려해봐야겠죠.”

“헥센나흐트가 섣부른 대응을 이용해서 또 다른 목적을 이루려 들 우려가 큽니다. 먼저 신중하게 접근해야죠.”

많은 의견이 오갔지만 큰 줄기를 따지자면 두 갈래였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마녀가 인간을 위해 무언갈 해줄 필요는 없죠. 더 사태가 악화한다면 그때 대처해도 늦지 않아요.”

가장 먼저 게헨나의 모습을 보면 쉽게 예상할 수 있듯, 보수적인 의견을 내놓는 절반 가량의 마녀들.

“애초에 현세에 대한 무관심이 작금의 상황을 만든 게 아닌가요? 지금은 큰 여파가 없을지 몰라도 헥센나흐트의 방종을 넘겨버린다면 이보다 더한 도발을 가해올 거에요. 지금 당장 적합한 제지가 필요해 보입니다.”

“다시는 헥센나흐트가 활개를 치지 못하게 성명을 발표해 경고하고 더 선을 넘을 경우 전쟁도 불사할 것이라는 의사를 내비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케테르가 만든 규율이 명시적으로 어긋나게 된 이상 우리가 새로운 법칙을 주도할 필요가 있어요. 간악한 공적들이라면 우리가 뭘 상상하건 그 이상으로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니 말이죠.”

다른 한 쪽은 게헨나가 적극 나서 세계의 시스템 자체를 새로이 써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마녀들이다.

더는 수수방관하지 않겠다는 의견이 적잖게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들었습니다.”

에렐림 공작이 운을 띄우자 소란이 잠잠해진다.

케테르 공작이 없는 지금 게헨나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는 누가 뭐래도 에렐림 공작이다.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존중되는 에메랄드 타블렛이나 여타 학회와 달리 진리진명 학술회의 위계질서는 제법 뚜렷하다.

그 수장인 에렐림 공작의 뜻은 학회에 속한 마녀 다수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먼저, 아주 오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합니다. 창조의 마녀는 자신의 유산을 활용해 호문쿨루스를 만들어냈습니다. 초기의 호문쿨루스는 마녀를 잡아먹으며 그 동력을 얻었으나, 훗날엔 현세에 크고 작은 재앙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녀의 존재가 현세에 공표되자마자 호문쿨루스들이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나요?”

잠깐의 침묵 후 에렐림은 말을 이었다.

“이는 의도된 안배입니다. 창조의 마녀는 인간의 존재가 언젠가 마녀에게 위협이 되리라 예견했습니다. 그 단초를 찾자면 분명 인간이 ‘신비’의 베일을 벗겨 내는 순간이겠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마녀들은 에렐림 공작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리고 즉각 반발이 튀어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게헨나의 현자는 창조의 마녀가 인간을 견제 및 배제하기 위해 호문쿨루스에 의도적 결함을 심어놓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허나 마녀란 무엇인가?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 마도의 길을 걷는 순례자이자.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으로 기적을 행하는 초월자다.

그 정점에 섰던 창조의 마녀가 인간을 두려워했다는 건 농담거리로도 삼을 수 없는 허황한 망상에 불과했다.

“저 역시도 인간이 두렵습니다.”

허나 반발과 코웃음에도 에렐림 공작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잔혹함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정복하려 드는 야망과 천성이 두렵습니다.”

“그 인간들이 세계 제일로 꼽는 함대가 22위계 마녀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그걸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고집하시는 건가요?”

“1,100년. 제가 인간을 지켜봐 온 세월입니다.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은 미개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과학이라 신봉하던 기술은 약간의 수학적 지식과 관측 결과를 토대로 한 원시적인 산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요?”

“…….”

“그들은 어느새 대륙의 반대편에서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 받습니다. 야생마를 길들인 것에 불과하던 그들의 탈 것은 어느샌가 말보다 빠르게 대지를 누비고, 바다를 넘어 하늘을 가로지르고 마침내 저 우주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보유한 가장 강한 병기는 이미 대마녀의 마법에 필적하며 지금 이 순간도 과학과 마법의 격차는 좁혀지고 있습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이란 마법과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단지 당장 그들의 능력이 마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긍휼히 여겨야 할까요?

공적과 호문쿨루스에 의해 죽은 인간의 수?

단언하건대 그건 인간이 인간을 죽인 수의 1%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당장 200년도 지나지 않은 역사를 뒤져보면 인간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백 수천만의 같은 인간을 짐승 취급하며 가축처럼 부리고 처형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끝은 정의로웠을까요?

제국주의의 이념을 내세워 동족상잔과 수탈을 벌이던 국가들은 나치가 제국주의의 십자가를 지어준 덕분에 도덕적 책임을 면죄 받고 현세의 실세로 거듭났습니다.

이 위선자들이 가엾게 여겨야 할 약자인가요?

같은 인간을 정복하고, 국가를 정복하고, 자연을 정복한 인간이 마녀를 능가하는 순간 그 잔혹함의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요? 그때가 되어도 우리 게헨나의 주적이 헥센나흐트일까요?”

“그 말씀은 헥센나흐트와 호문쿨루스가 인간 세력을 억제하는 필요악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한 호흡을 쉰 이후 다시 입을 여는 에렐림 공작은 덤덤히 자신의 결론을 입에 담았다.

“인간을 핍박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울러 헥센나흐트의 방종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면전을 벌일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게헨나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지역에 한해 소극적인 대응을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지금보다 적극적인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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