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97화 (903/917)

Chapter 897 - #195_제안(4)

#891

1.

“후, 쩔었다.”

하나하나 복기해보자면 결과도 과정도 만족스러운 전투였다.

군단의 상륙은 멀찌감치 떨어진 동해 상에서 저지.

그 과정에서 죽거나 중상에 이르른 마녀는 없었다.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수사슴을 토벌해 후환의 싹을 뽑지 못했다는 정도겠지만 이게 어딘가?

더군다나 수아 선생님과 함께 다듬어 새로인 정착시킨 총 세 가지 기술도 모두 실전성을 증명해 보였다.

가장 첫 번째 기술은 웨어울프를 쓰러뜨린 ‘적화만개(赤花滿開)’.

쉽게 말해 붉은가지를 맹독을 주입하는 주사기처럼 활용하는 방법이다.

왜곡장과 특유의 스파크를 응축했다가 적의 몸에 공격을 박아 넣는 순간 일제히 터뜨리는 것이다.

두번째 기술은 거인의 검을 막아냈던 왜곡장벽.

주변에 공간을 왜곡해 굴곡면을 만들어낸 뒤 충격량을 외부로 흘리는 방어술이다.

일전 르뤼에와 연습하던 것을 수아 선생과 함께 수련하며 완성했다.

마지막 기술은 거인을 토벌한 ‘삼천흉(三穿凶)’.

문자 그대로 전력을 다해 세 번을 찌르는 기술인데 본디 힘을 섬세히 조절하지 못해 세 갈래로 번지던 것을 하나의 극점에 모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는 일전 궁극기였던 ‘투창’보다도 우월한 화력을 지닌 기술의 탄생.

붉은가지를 다루는 마법이 큰 성취를 보았다 할 수 있겠다.

그런 활약을 보였으니 가뜩이나 많은 관심이 두 배쯤 늘어난 건 정해진 일이었다.

홋카이도 지부 긴급대책본부로 복귀 이후 곧장 연인들에게 가고 싶었는데 발 디딜 새 없이 몰려드는 마녀들에게 붙들렸다.

“신시우, 너 제법이다.”

“남자 마녀라길래 그럭저럭 인 줄 알았더니 어휴 살벌하네.”

“저기 있잖아. 나랑 호텔에서 단둘이 술이라도 마실래?”

“아, 네네.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뇨. 죄송합니다.”.

벌써 살짝 불안해진다.

여기서도 이런 데 나중에 게헨나로 돌아가면 집 밖은 나설 수 있을까?

“아, 재밌었다.”

“신시우 씨, 약속 기억해 둬.”

“돌아가자.”

한참이나 시우의 주위를 둘러싸고 질문 세례와 추파를 던지던 게헨나 측 마녀들은 한바탕 축제를 즐기고 난 홀가분한 미소와 함께 게헨나로 돌아갔다.

그래도 조금 정도는 현세에서 머물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게헨나의 마녀들은 불안정한 현세에 발을 붙이고 있을 마음은 없는 모양이다.

아마 제안이 없었더라면 억지로 끌고 나올 수도 없던 인력이었겠지.

아무튼 겨우겨우 마녀들의 과한 관심을 응대하고 한숨을 돌릴 때쯤.

이번 사건을 위해 파견된 각 정부 인사와 추방자들도 시우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신시우 씨, 처음 뵙겠습니다. 대 마녀관리국 박오준입니다.”

국정원은 물론이고 CIA며 MI6며 외국 영화에서나 보던 기관의 에이전트들이 접근해온 것이다.

저번에 김준법 의원을 잠깐 만났을 때도 알았지만, 남자이면서 마녀가 된 신시우는 높으신 분들에게도 훌륭한 관심거리였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이유를 추측해보자면.

아마 인간 측에서도 호문쿨루스에 대한 자구적인 해결책을 모색 중인 거겠지.

원래도 알고 있었지만 오늘 장면을 보며 확신했다.

마녀란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존재고, 그런 존재에게 세계 안보를 맡기기엔 아무래도 부담이 될 터이니.

원하는 모든 조건을 전부 들어주겠다. 부디 협력해달라.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다.

뉘앙스는 조금 달랐지만 대체로 저런 맥락의 말이었다.

번갈아 몰려드는 에이전트들의 명함을 한참이나 받고 난 뒤에서야 몰려드는 인파에서 해방되었다.

어째 싸움보다 이쪽이 기가 쪽 빨리는 기분이다.

“하아….”

“수고했어요. 시우.”

드디어 만나게 된 연인들.

각기 대활약을 펼친 아멜리아와 샤론이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시우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어째 숫자가 좀 부족하다.

스승님이야 뒤처리 문제 때문에 분주히 대책본부를 돌아다니고 계시니 그렇다 치고 린네, 르뤼에, 도로시 누님이 안 보인다.

“샤론, 르뤼에는 어디 있어?”

“아, 르뤼에? 아까부터 저기 있던데?”

고개를 돌리자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서 있는 르뤼에가 보였다.

그 주위로는 몇몇 위치포인트 출신의 추방자들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쑥덕이고 있다.

“네가 해봐.”

“뭐래 미친…. 난 무서워. 니가 걸어봐.”

“진짜 근데 분위기가 남다르시다…. 아우라 같은 게 흘러.”

마녀 사회, 특히 힘의 논리로 좌우되는 추방자 사이에서 위계란 곧 계급과 직결된다.

오늘 르뤼에가 보여준 맹활약에 선망과 경외심을 품게 되는 건 크게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다.

언뜻 보기엔 전혀 티가 나지 않았지만 시우와 샤론은 알 수 있었다.

르뤼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 모든 찬사와 존경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괜히 시우 쪽에 왔다가는 푼수 취급을 당하는 모습이나 보일 게 뻔했기에 저기에 있기로 한 모양.

“잠깐 저대로 둘까?”

“행복해 보이니 됐지 뭐.”

“아, 잠시만 있어 봐. 아멜리아 님도 잠시만 여기 계시겠어요?”

주위를 살피던 시우는 저 복도 끝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기모노 자락을 발견하고 샤론과 아멜리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모두가 승전의 기쁨에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지금.

예상대로랄까?

“린네 님, 혼자 계셨네요.”

“낭군.”

그만한 대활약을 펼친 린네는 철저히 혼자였다.

마녀는 물론이고 초췌하지만 안도와 기쁨에 젖은 인간조차 그녀의 주위로는 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시우를 대할 땔 제외한 린네의 언행은 첫 만남 때와 다를 바가 없다.

다가오는 모든 이를 밀어내는 서늘한 분위기라고 할까?

“저한테 오시지 그랬어요.”

“낭군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다.”

아울러 공적 출신인 린네는 자신이 시우를 ‘낭군’이라고 부르는 순간 끼칠 파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철저하게 남인 척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부르신 건가요?”

“…부른 적 없다.”

대신 슬쩍 기모노 자락을 내보이며 ‘나 여깄으니까 와주세요’라는 사인을 보내긴 했지만 말이다.

은근 솔직하지 못해서 귀여운 구석이 있는 린네다.

“아 맞다. 숙제는 잘하셨나요?”

“…….”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고개를 끄덕이는 린네.

여기서 숙제라 함은 무미건조한 린네의 삶은 트리트먼트하기 위한 시우의 특급처방이다.

매일 한가지 정도 즐거운 일을 하고 그에 대한 감상을 적는 일기 말이다.

“지금 볼까요?”

린네의 품에서 시우가 주고 갔던 공책이 나왔다.

이걸 들고 싸우러 갔을 리는 없고, 시우에게 칭찬받기 위해 쪼르르 방에 달려와 챙겨왔다고 생각하니 두 배로 귀엽다.

“낭군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다.”

“네, 뭔데요?”

“…절대로 비웃으면 안 된다.”

“에이, 물론입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당부하는 린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기장을 펼쳤다.

좀 놀랐다.

이 숙제를 내 준 지는 한 달이 채 안 됐다.

하지만 린네의 일기는 두툼한 공책의 끝까지 빼곡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취미’와 관련된 내용뿐만이 아닌 그날 하루 있었던 일을 시간에 따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속마음까지 모두 적어둔 것이다.

이래서야 진짜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스토커나 다름이 없다는 기분이 든다.

“…엄청 열심히 쓰셨네요.”

“낭군이 시킨 일이다. 숨기지 않고 썼다.”

“이렇게까지 바란 건 아니었는데…. 괜히 죄송스러워서요.”

“괜찮다.”

팔랑팔랑 종이를 넘겼다.

린네가 시우의 말을 따르기 위해 굉장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맛집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백화점에서 쇼핑하기도 했다.

이것저것 사와 꽃꽂이를 시작하는가 하면 TV 프로그램을 보기까지 했단다.

유려한 필체로 작성된 무미건조한 문체의 마무리는 언제나 ‘낭군이 보고 싶었다’ ‘낭군과 함께하고 싶었다’ 였기에 쑥스러운 고마움이 느껴졌다.

“오, 스승님과 술도 드셨네요.”

순간 거무죽죽하게 죽어가는 린네의 표정.

“그, 그랬다.”

어째 말도 더듬거린다.

마치 잘못한 일을 들킨 아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린네가 시우의 소맷부리를 꽉 쥐었다.

“낭군 재차 당부하지만 정말 비웃으면 안된다.”

“에이, 저 그렇게 질 나쁜 놈 아닙니다.”

그렇게 호언장담한 시우의 이마에 땀이 뻘뻘 맺히기 시작한 건 불과 한 페이지 뒤였다.

린네는 자신의 술주정과 추태까지 모조리 기재한 것이다.

스승님에게 칭찬을 졸랐던 것도, 엉겨붙었던 것도, 취중 진담도, 자장가를 불러달라고 했던 것도.

심지어 ‘마마’라고 부른 것까지도.

사실 린네가 숨기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부분이다.

일기가 딱히 취조용도 아니고 프라이버시는 언제나 중요한 일이니까.

하지만 린네는 시우가 시킨 일이라면 대쪽같이 수행했다.

어떠한 거짓과 허위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았다.

“어, 음….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라.”

그런 성정이 이런 식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릴 줄이야.

빨갛게 변한 린네의 귀를 보고 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공감성 수치는 둘째치고, 역시 린네에게 가장 크게 결핍됐던 건 가족애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시우가 파파이고, 스승님이 마마인건가?

“크흠.”

한차례 헛기침한 시우는 손을 뻗어 린네의 머리 위에 올렸다.

가볍게 빗겨주듯 머리칼을 쓸어주었더니 움찔며 스르륵 고개를 돌려 시우를 바라보는 린네.

“감사해요. 잘하셨어요.”

“정말인가?”

“물론이죠.”

이렇게 하니 기분이 좋았더랬지.

마치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린네의 뺨이 느슨하게 풀린다.

한창 분위기가 좋아지려던 그때.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비명과도 같은 전화벨 소리가 대책본부 테이블 측에서 울려대기 시작했다.

활기찼던 떠들썩함 역시 탄식과 경악으로 가득 찬 웅성거림으로 돌변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린네와 함께 대책본부로 달려간 시우는 보았다.

이 어수선한 난장판 속에서도 마녀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대형 스크린.

거기서 상영되는 동영상을.

검은 연기로 물든 하늘.

완파된 채 가라앉는 항모와 전함.

불타오르는 바다 위를 유유자적 걷는 마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새파랗게 질린 옆의 마녀에게 물었다.

“헥센나흐트에서 미군 함대를 격침했어요.”

그 자체로 분명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주위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면결계를 펼치지 않고…. 그 영상을 전 세계에 공개했어요.”

역사 속에서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신비.

마녀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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