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6 - #195_제안(3)
#890
1.
하늘을 들쭉날쭉 가로지르는 낙뢰와 분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폭우.
뒤틀리며 튀어 오르는 풍랑 속에서 역습이 시작되었다.
군단 측 전력은 수사슴을 중심으로 한 네임드 수십 마리와 수백 마리의 크고 작은 호문쿨루스.
마녀 측 전력은 서울 지부로 집결했던 추방자 다수와 티페레트 공작을 중심으로 뭉쳐있던 별동대, 그리고 게헨나 측 지원군 다수.
세 자릿수의 호문쿨루스와 일천에 달하는 수의 마녀가 격돌했다.
사방팔방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의 여파와 물리법칙의 단말마.
호문쿨루스의 비명과 곳곳에서 들려오는 영창이 전장을 한가득 채운다.
춤추듯 피어오르는 반사광이 어찌나 화려한지 빛 한줄기 들지 않던 검은 바다를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이거 말이 안 되네.”
예정대로 최전선에서 호문쿨루스를 토벌하던 시우는 전장을 누비며 곁눈질로 전황을 살폈다.
예상은 했다.
동해 위에 모인 마녀의 전력이 분명 보통은 아닐 것이라고.
실제로 이만한 마녀가 다 같이 모여 전투를 벌이는 건 역사를 뒤져봐도 좀처럼 없는 일이다.
그리고 두 집단이 대규모 회전에 진입한 순간 직관적으로 이해해 버렸다.
왜 케테르 공작이 없는 이 시점, 헥센나흐트가 게헨나와 전면전을 꺼리는지 말이다.
-쾅! 콰과광!
“다음은 저거.”
“확인했어요.”
전혀 눈여겨보지 않았던 마녀 넷이 즉석에서 편대를 이루더니 네임드 호문쿨루스 하나를 개 패듯이 때려잡는다.
“법진의 설치를 끝냈어요. 유인 부탁할게요.”
“두셋 정도 갈 건데. 잘할 수 있지?”
“물론이죠.”
비서고 출신으로 보이는 마녀 무리는 몰이사냥을 하는 사냥꾼처럼 함정으로 호문쿨루스를 이끈다.
그밖에도 전장 곳곳에서 활약하는 마녀들 덕에 이미 싸움의 흐름은 전쟁이라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 되어있었다.
일방적인 토벌과 일방적인 학살.
호문쿨루스의 1할가량이 순식간에 삭제되는 동안 단 한 명의 마녀도 치명상을 입지 않았다.
그토록 위험해 보였던 이벤트가 치트키를 쓴 캠페인처럼 쉽게 풀려간다.
하긴 당연하다.
바깥 세상 일에 신경을 기울이지 않은 채 작은 도시에서 웅크려 있지만.
마녀란 본디 일생(一生)뿐 아니라 일대(一代)를 마법을 위해 바친 초월자들.
옷 가게 사장과 목욕탕 주인이 22 위계이고, 향수집 조향사와 도서관 사서장이 23위계인 도시의 저력.
그런 도시에서 600명 가까이 되는 주민을 데려왔으니 마녀만 없다면 이대로 세계 정복도 아주 간단한 일일 것이다.
한편 최전선에서 살짝 떨어진 상공에 오손도손 모여있는 마녀들도 있다.
기왕 따라나선 김에 호문쿨루스를 몇 마리 정도 잡아들인 이후 휴식을 취하며 모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을 구경 중인 무리다.
대마녀들과 대마녀 중에서도 까마득한 상위에 있는 마녀가 전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흔한 구경거리가 아니니 말이다.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하는 몇이 있었으니….
“저게 심해의 마녀구나.”
“지치지도 않나? 저런 대마법을 계속 쓰네?”
“바다 위잖아.”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심해의 마녀다.
조금 전부터 숨 돌릴 틈도 없이 파도를 내려쳐 호문쿨루스를 조각난 난파선처럼 만들어버린다.
거기에 거대한 사역마가 제집처럼 파도와 파도 사이를 오가며 호문쿨루스를 꿀떡꿀떡 삼키는 모습은 경외심마저 느끼게 하였다.
“메리골드 남작도 여간내기가 아니네요.”
“전 남작이지. 참 예쁘게도 싸운다.”
다음은 얼마 전 사고를 쳐 작위를 박탈당한 게헨나 최고의 조향사.
든든한 지원군 탓에 여력을 남길 필요가 없어진 그녀는 마음껏 힘을 개방하며 광역 마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대체 몇 마리나 죽여댄 건지 이 드넓은 바다에 3분의 1쯤은 흐드러진 꽃잎이 둥실 댔다.
“메티스 사서장도 왔네.”
“저 양반…. 현세에도 나오는 사람이었어?”
현세는 커녕 비서고 밖으로도 좀처럼 발을 내딛지 않는 메티스 그레모리 사서장 역시 대활약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제나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마법서를 거대한 활로 변형시킨 채, 금서원전으로 뭉친 화살을 쏜다.
한번 활시위를 당기면 반드시 하나 이상의 호문쿨루스가 꿰뚫려 바다로 가라앉았다.
이렇듯 23위계의 매직쇼도 분명 눈이 호화로워지는 볼거리였으나.
“신시우는 어딨어?”
“저기, 검은색 갑옷.”
“오오, 진짜 마법 쓴다.”
사실 여기에 모인 마녀들은 신시우가 제일 신기했다.
남자가 낙인을 만들어서 마법을 쓴다.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고작 몇 년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대마녀에 필적한 전투력을 보유했다.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무슨 마법이지?”
“이것저것 섞어 쓰는 것 같은데. 티페레트 공작이 스승이랬으니까 아무래도 근접 전투 계열 아닐까?”
“하긴 예장도 창이고.”
전신을 두른 날렵한 형태의 판금 갑옷을 두르고 기다란 붉은 장창을 쥔 채 바다를 평지처럼 내달리던 신시우의 앞에 네임드가 등장했다.
키가 3M가 훌쩍 넘는데다가 전신이 위협적인 근육질, 칼날보다 뾰족하게 돋은 손톱.
설화 속 늑대인간을 고스란히 꺼내온 듯한 생김새이다.
“저 호문쿨루스는 뭐야? 늑대인간?”
“잠시만요, 안 그래도 도감을 가지고 왔는데…. 여깄다.”
“읽어줘.”
기사와 괴수의 매치에 흥미진진해하는 구경꾼 일동.
“웨어울프, 특이사항이 될법한 마법은 활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타고난 재생력은 그 자체로 마법에 필적한다. 근골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상을 입어도 고속 재생하기에 제한 없이 발휘되는 근력과 민첩성 또한 위협적이다.”
먼저 움직인 건 웨어울프 쪽이었다.
펑하는 파열음과 함께 음속의 수배로 간합을 좁힌 웨어울프의 동체가 신시우에게 달려들었다.
도감에 기록된 대로 구경꾼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빠르기였다.
그러나 신시우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 창을 쥐고 맞대응을 놓았다.
웨어울프와 크게 차이를 느끼기 힘든 속도.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가지가 새빨간 잔영을 어둠 위로 수놓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에요? 저 책 읽느라 못 봤어요.”
“신시우 쪽에서 심장을 찌르면서 옆으로 흘렸어. 치명상인 것 같네.”
그 말대로 멋진 턴을 선보이며 휘리릭 창을 고쳐쥔 신시우와 달리 웨어울프 쪽은 몇 번이나 물수제비를 하며 내팽개쳐진다.
“벌써 끝난 건가?”
“아니요. 여기 보면 재생력이 엄청나다고 적혀 있어요. 살점 하나만 남겨도 재생해버린다고.”
“으, 징그러워.”
하지만 웨어울프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 번 팔다리를 버둥거리더니 그대로 재로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재생한다며?”
“그, 글쎄요? 책이 잘못됐나?”
아무리 그래도 한방 컷이라니 말이 안 된다.
도감에 수록될 정도의 네임드면 문자 그대로 이름값 좀 날린 호문쿨루스 일 텐데 말이다.
원래 인간은 납득할 수 없는 사태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범주 내의 가능성을 취사하기 마련이다.
이는 마녀도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던 구경꾼들은 나름의 답을 찾았다.
“신시우 창 그거잖아. 적기사가 사용하던 붉은가지. 티페레트 공작도 힘들게 잡았다고 하니까 아마 어마어마한 무기일걸?”
“아하, 템빨이구나.”
“그런 거겠지.”
흔쾌한 해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마녀들.
두번째 매치.
신시우가 마주친 상대는 크롬합금으로 만든 듯 매끈하고도 거대한 거인이었다.
바다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초대형 사이즈.
허리에서 넘실거리는 해수를 보면 대충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저건 또 뭐야?”
“합금거인. 철갑룡과 더불어 굴강의 내구도를 자랑하는 호문쿨루스. 연금마법에 대한 강력한 내성을 갖추고 있으며 제 몸을 분해해 만들어낸 무구를 휘두른다. 이건 좀 쎄 보이네요.”
거대한 검과 방패를 직조해 내어 들어 올리는 합금거인은 과연 만만치 않은 포스를 내뿜었다.
그 앞에 신시우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기사처럼 무모해 보인다.
“저건 도와줘야 할지도…?”
거인이 검을 들어 올리고 내리긋는다.
-쿠우우우웅!
원근감을 망가뜨리는 거대한 동체 탓에 느릿느릿하게 보이지만 코앞에서 일격을 보고 있는 신시우에겐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격일터.
-첨벙!!!!
실제로 검이 바다 위를 가르는 순간 홍해처럼 갈라지는 수면.
“야야! 일났다!”
“당했어? 당한거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던 장면은 무지막지한 검격 아래 휘말리는 신시우의 모습이었기에 구경꾼 곳곳에서 낮은 비명이 들렸다.
세계에 딱 하나밖에 없는 남자 마녀가 이렇게 죽는다면 그만큼 허망한 일도 없는 것이다.
“주, 죽었나?”
“아니! 저기 있어!”
그러나 그런 걱정을 비웃듯.
물보라 치는 파도 사이로 검은 바람처럼 내달리는 검은 갑주.
거인의 팔을 휘감듯 질주한 신시우의 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는다.
-키이이이잉!!!
대기를 떨게 하는 마력의 준동.
그의 머리 위로 떠오른 링 형태의 고리가 회전을 거듭하며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토한다.
“삼천흉(三穿凶)!”
소년만화처럼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기술명은 촌스럽고 심지어 살짝 오글거리기까지 한다.
메이웨더가 숄더롤을 할 때마다 ‘숄더롤!’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장면은 조금의 실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경악만을 선사했다.
삐뚜룸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세 줄기의 적빛에 산이 허물어지듯 거인의 몸이 부서진다.
어지간한 마법으로는 생채기도 내지 못할 것 같던 단단한 동체와 거대한 방패가 쿠키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이번에도 일격이었다.
고작 일격으로 산처럼 거대한 호문쿨루스를 토벌했다.
“…….”
“…….”
호들갑 떨던 구경꾼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강력한 예장이라 해도 그걸 온전히 활용하는 건 온전히 사용자의 몫이다.
여기 모인 마녀 중 그 누구도 신시우와 같은 무위를 선보일 자신이 없었다.
대마법의 반동을 고스란히 받아낸 탓인지 박살 난 상체의 갑옷을 해제하며 천천히 바다 위로 착지한 신시우.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땀과 빗물을 털어내는 그에겐 지친 기색도, 무리한 마법 행사에 버거워하는 모습도 없다.
머리를 쓱 뒤로 넘기며 다음 사냥감을 물색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신화 속 영웅 같았다.
“헤으응…. 쇄골 복근 미쳤어. 시우 오빠 나 젖어…!”
“…….”
호문쿨루스 군단은 격돌 1시간 32분 뒤 절반이 토벌되었다.
군단을 이끌던 수사슴은 한차례도 전선에 서지 않았다.
그저 완전히 와해한 패잔병을 이끌고 아공간 너머로 유유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