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5 - #195_제안(2)
#889
1.
소문이야 많이 들었지만 붉은 지붕 살롱에 발을 들이는 건 처음이었다.
그 분위기는 뭐랄까 제머나이 응접실 몇 개를 여럿 붙여두어 널찍한 홀로 만들고, 타카쇼네 호스트바처럼 어둑어둑한 조명을 구현한 모양새.
여기까지는 게헨나 귀족 감성에 나름 익숙해진 만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신시우라고 합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시선만큼은 적응되질 않는다.
진귀한 무언가를 얻고 싶어하는 욕망의 찬 눈길과 과하다시피 한 추파가 싫어서 마녀가 많은 곳엔 발길을 자제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 눈길이 절세마녀 누님들의 이글거리는 시선이라면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들 법도 하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매력적인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하자는 다짐을 한 이 시점에서만큼은 과도한 관심이 달갑다.
의도적으로 장내의 모든 마녀의 관심이 쏠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흐트러진 드레스를 여미며 자세를 바르게 하는 마녀.
안경을 벗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마녀.
테라스 난간에 상체의 절반을 기울여 관심을 보이는 마녀.
그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다.
현세는 위험에 처했고 시우는 섣불리 나설 수 없다.
따라서 가능한 많은 마녀를 대동해 현세에 지원을 갈 예정이다.
하지만 마녀를 상대로 온정에 호소한다는 건 어리석은 선택지이다.
대다수 마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신’과 ‘마법’ 뿐.
즉,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개인주의 및 실리주의자를 상대로 옥장판을 팔아야 하는 자리다.
“현세에 다수의 호문쿨루스가 군단을 이루어 상륙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아실 겁니다. 현재 현세의 많은 마녀가 협력하여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동해 상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죠.”
“난 또 뭐라고….”
한마녀의 허탈한 소곤거림이 재미없다는 듯 고요 속에 번졌다.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한 사냥감이 한자리에 모여있는 겁니다. 이렇게 쉽게 그노시스의 알을 얻을 기회는 흔치 않죠.”
“남자 마녀 씨, 미안하지만 여기는 그런 곳 아니야.”
“용병을 구하고 싶거든 보더 타운이나 위치포인트로 가는 게 빠를 텐데요?”
이것 봐라.
고작 두 마디 꺼냈을 뿐인데 전체 절반이 잡상인 보듯 시우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 모두 세상을 위해서 힘을 모아요!’는 마녀 입장에서 공허한 울림일 뿐이다.
게헨나 전체 마녀의 2할 정도는 아예 현세에 나가본 적도 없는 마녀라는 걸 알아야 한다.
“현재 군단에 속한 호문쿨루스는 대다수가 네임드입니다. 거기에 무신인 티페레트 공작을 축으로 토벌대가 이뤄진 상태. 이만큼 안전을 보장받으며 사냥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요?”
호응이나 끄덕임은커녕 밍밍하게 이어지는 무관심을 보다 못한 한 마녀가 나섰다.
“신시우 씨. 오랜만이에요.”
“예.”
면식이 있다.
일전 시우에게 개인과외를 받았던 마녀 중 하나다.
“어떤 마음인지는 알겠지만 그 정도로는 좋은 제안이라고 할 수 없어요. 어차피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게헨나에 그노시스의 알이 들어올 테고 그 중 대부분은 이 살롱에서 경매에 부쳐질 테니까요. 금화면 되는 일에 굳이 위험을 부담할 필요는 없죠.”
그녀는 아직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어린 마녀를 감싸주려는 듯 조곤조곤한 말씨로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호의에서 비롯한 나름의 선의이리라.
반면 대번에 불쾌감을 토로하는 마녀도 있다.
“군단이 상륙하는 곳은 한국, 너도 한국 출신이랬나? 고향을 지키려는 가상한 마음씨는 알겠는데 제안을 하고 싶거든 반대쪽 저울에 동등한 무게를 올려야지.”
“너무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보여서 불쾌하네요.”
“우리 몸값이 얼마인지는 알아?”
아니, 꽤 많았다.
허나 일찍이 마녀의 생리를 이해하는 시우다.
느긋한 휴식시간을 앗아간 불청객에 대한 불만이 새어나오리란 것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더불어 제안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현세 동행과 조력을 조건으로 세 가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적당히 하지?”
“여러분이 짐작하시듯 저는 상륙 저지에 힘을 보탤 예정입니다. 따라서 최전선에 서게 되겠죠.”
그게 뭐 어쨌다고? 싶겠지만 이는 절대 적지 않은 의미를 함축한다.
최초의 남자 마녀이면서도 유의미한 마법적 성과를 증명한 신시우다.
그런 신시우가 실전에서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환상의 똥꼬쇼를 보여준다는 것.
그 자체로 논문의 실효성을 손수 검증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꼴랑 그거? 하여간…. 어차피 목격자도 많을 텐데 그 정도야 영상으로도 입수할 수 있는 거 아니야? 하여튼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 어린 것들이 꼭 있어요.”
대놓고 시비를 걸진 않지만 혼잣말로 삐딱선을 타는 파란 머리 마녀를 무시했다.
이것만으론 부족하겠지.
임팩트를 위해 잔잔한 밑밥을 깔았을 뿐이다.
“또한 이번에 비서고에 등록된 제 졸고는 현시점에서 구세대인, 어디까지나 초기 모델입니다.”
“……?”
빈정대던 파란 머리의 입에 지퍼가 채워진다.
“동행을 조건으로 그보다 한 단계 발전시킨 논문을 조건 없이 제공하겠습니다.”
처음 시우가 등장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은 술렁임이 살롱 전체에 흘렀다.
의구심과 의혹, 그리고 텁텁한 감정을 상쇄하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이 뒤섞인 탁류다.
“책임질 수 있는 발언이겠죠?”
“당장 상황을 모면하려고 아무렇게나 주워섬긴 말이라면 후폭풍을 각오해야 할 거에요.”
“마녀 명을 걸고 말해보세요.”
지금 당장은 의심 쪽에 추가 기울어 있다만 일일이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조차도 밑밥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입니다. 저는 현세에서 돌아오는 즉시 학회를 설립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신 분에게는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초청장을 제공할 것입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볼륨 버튼을 실수로 돌린 것처럼 살롱이 시끄러워졌다.
사실 학회 설립 자체는 생각보다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학회라고 죄다 진리진명 학술회나 에메랄드 타블렛처럼 덩치 큰 학회가 있는 게 아니라 연구나 학술 소모임 같은 군소 학회가 수백 개도 넘게 존재하니 말이다.
적당한 부지와 건물, 서류 조금, 금화 서른 장만 시청 측에 제출한다면 당당히 하나의 학회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학회에 ‘누가’ 속해 있느냐다.
“거기에 당신도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기본적으로 지식 공유과 교류, 학술 연구 및 활동을 주축으로 활동을 진행하고 타 학회와 공동 가입 역시 자유롭게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알고 있다.
지난번 논문감사 이후 시우는 자신의 잠재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때는 고발자 리센느에게 열이 뻗쳤지만 그 덕에 몸값은 절호조.
모두의 기대와 호기심을 사며 고공 행진 중인 기대주가 되었다.
하루에도 100통은 넘게 저택으로 날아드는 편지가 이를 증명한다.
“흐음, 제법인데? 협상을 할 줄 알잖아?”
“재밌네.”
한결 부드럽게 풀린 인상의 마녀들이 제각기 주판알을 튕기는 게 보인다.
현세에 나설 때의 리스크와 리턴.
대뜸 학회 설립을 선언한 남자마녀에게 조력을 주었을 때 주어질 보상에 대해 생각하고 있겠지.
시우가 설립한 학회에 몸을 담는다는 건, 현재 제머나이 백작가의 울타리 안에서 만남조차 쉽지 않은 남자 마녀와 비교적 편하게 교류할 수 있다는 것.
오히려 당장 가치를 증명할수 없는 논문보다 훨씬 구미가 당기는 상품이다.
“저 역시 가능한 많은 분과 함께하는 영광을 누리고 싶으나, 사태가 급박한 지라 충분한 시간을 드리긴 어렵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시간, 출입국 관리소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학회 설립이라는 시우의 아이디어는 임기응변으로 급조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뼈저리게 느낀 ‘개인’의 한계점을 보완하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혼자로는 한계가 있다.
연인들의 조력으로도 한계가 있다.
모두가 눈독을 들이는 남자 마녀로 살아남기 위해선 단순히 개인을 넘어선 무언가가 될 필요가 있었다.
비록 시작은 널리고 널린 하꼬 학회겠지만 충분한 인재를 모아 ‘내사람’을 여럿 만들 수 있다면.
에렐림 공작이 그렇듯, 비서고의 메티스 공작이 그렇듯, 저 헥센나흐트에 금화의 마녀가 그렇듯 자신만의 기반을 지니게 될 수 있다면.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고를 수 있는 패의 숫자도 훨씬 늘어나게 되겠지.
언제까지고 기대어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시우가 떠난 이후 마녀의 반응은 셋으로 나뉘었다.
“전 그래도 싫어요.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명판만 걸어놓는 동아리 학회엔 별 관심 없어.”
“논문은 또 어떻고요. 저번 감사 이후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모양인데 얼마나 지났다고 또 새로운 논문이래?”
그의 제안에 의구심을 표하며 심드렁하게 엉덩이를 소파에 붙여 휴식시간을 방해받았다는 불쾌감을 유감없이 뿜어내는 마녀.
“이건 당장 가야죠. 저 저번 감사 때 기립박수까지 했다니까요?”
“친구들한테도 연락 돌려야겠네.”
“저번에 가정방문을 했었는데 허튼 말을 하는 남자는 아니었어요.”
“저 정도 정성이면 속아 줘야지.”
흥미로운 제안에 혹해 기꺼이 자리를 박차고 현세로 나갈 채비를 하는 마녀.
“일단 잘생겼으니까 옆에서 싸우는 거 구경이나 해봐야겠다.”
“마침 할 일도 없으니 잘됐네.”
“와…. 나 방금 ‘공주님은 위험하니 뒤에 계세요’ 소리 듣는 상상함.”
“내가 아는데 원래 저렇게 곱상하게 생긴 애들이 밤엔 진짜 변태래.”
“정말? 어머머,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그럼 진짜 머리채 잡아 주려나?”
그저 신시우가 잘생겼기에 말이나 붙여보고자 따라나서 보는 마녀.
그런 점을 노리고 멋들어진 정장까지 챙겨입었던 시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