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4 - #195_제안
#888
1.
초조한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뭘 크게 받은 기억은 없지만 그래도 나고 자란 고향이다.
부모님과의 추억과 부대끼며 만나 왔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이 한낱 호문쿨루스의 한 끼 식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니.
추억의 장소가 와르르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니.
“…….”
물론 저쪽에는 연인들이 있다.
그냥저냥 도움이 될 정도도 아니고 대마녀로 빼곡한 화려한 라인업이다.
그러나 수아 선생이 전하길 이번 위기는 전례 없는 사건이라고 한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답할 수 없다는 의미다.
예측 불가의 전장에 여자친구만 딸랑 보내놓고 마음 놓을 수 있으면 그게 사내자식인가?
“시우 군, 무슨 생각하는진 알겠지만 안 돼요.”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면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갔다하지 말고 앉아줄래요?”
큰 장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고 도로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시우의 무지성 현세행을 막기 위한 감시자 역할이었다.
좀 억울한 부분도 있다.
아무 대책 없이 현세로 뛰쳐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도와준답시고 나갔다가 헥센나흐트의 공적들에 의해 납치돼 버리면 그만한 민폐가 없다.
“하아, 시우 군?”
“네.”
“이리 와서 한 잔 받아요.”
겉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큰 장모님이지만 은근 속정이 깊으시다는 걸 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있으니 딱해 보였던 모양.
“저도 꼰대 같다는 말은 듣기 싫어서 이런 류의 말 잘 안 하려고 하는데…. 살다 보면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요. 척 봐도 말아먹을 판에 욕심 앞서서 판돈을 깔면 항상 배탈이 나더라고요.”
큰 장모님은 딱딱함이 한결 가신 목소리로 술잔을 채워주었다.
“별일 없을 거에요. 시우 군 여자친구들이니까 알잖아요? 다들 한 실력 하는 거. 시우 군이 이렇게 의기소침해 하는 건 오히려 믿음의 부재죠. 그렇지 않나요?”
“맞습니다.”
무려 적당한 교양과 애교가 버무려진 말투로 삐죽 웃어 보이는 장모님.
참 이런 면을 볼 때마다 오딜 쪽과 겹쳐 보인다.
은근히 언니 모녀끼리 닮은 점이 많으니 말이다.
“흠흠, 그나저나 시우 군.”
경박한 말투라 생각했는지 웃음기를 거두며 자중한 장모님은 이어 질문을 던졌다.
“아까는 데네브와 같이 있어서 못 물어봤는데. 요즘 데네브와는 어떤가요?”
“데네브 님께서 말씀 하지 않으셨나요?”
실로 당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쌍둥이와 전초기지에서 4P 이후.
장서지간 위험한 관계는 데네브의 깔끔한 마무리로 종결되었다.
쌍둥이에게 마음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미안함과 너른 아량으로 데네브의 일탈을 허가해준 관대함에 감사를 표하며 말이다.
당연히 큰 장모님도 그 사실을 알겠거니 했는데….
“소식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데네브 님과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아, 그건 알아요.”
알았는데도 관계가 어떻게 되냐니?
설마 연막 이별이라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 밀회를 의심하거나 하는 건 아니고요. 그냥 데네브 상태가 조금 신경 쓰여서요. 문제가 있나 없나, 그 정도는 살필 수 있잖아요? 그래도 제가 언니인데.”
“저녁 식사 때 보이시는 모습이랑 같습니다. 뭐랄까….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가요?”
“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무서워지셨지.
지금은 사실상 시우의 예절교육 담당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하나만 더 물어봐도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데네브는 행복해했나요?”
“…….”
그냥 훑고 지나가는 질문인 줄 알았는데 점점 딥해지는 내용에 돌연 무서워진다.
이러다가 갑자기 샤우팅을 듣게 되는 건 아닐까?
“…제가 보기에는요.”
“그래요? 진짜 솔직하게 말해봐요.”
“정말입니다.”
“흐음….”
고개를 까딱까딱 끄덕이는 장모님.
점점 이 대화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다.
말없이 연거푸 와인 잔을 비우는 장모님을 보며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할 무렵.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래서, 시우 군은 어땠나요? 데네브랑 그…. 동침할 때.”
이런 난감한 질문을 던지는 장모님의 의중을 알 순 없지만, 평소 착하게 살라고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지은 죄가 없으면 저런 질문이 날아올 일도 없지 않겠는가?
“죄송합니다.”
“아니, 참….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시우 군 의견을 묻는 거에요. 그러니까 좋아 딱 이렇게 정 할게요. 좋았다? 또는 별로였다.”
좋았다고 해도 혼날 것 같고, 별로였다고 하면 더 혼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이지선다.
하지만 장모님 앞에서 되지도 않는 변명이나 거짓말을 무의미하다.
“저도 남자인데 당연히 황송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떤 점이 좋은데요?”
“그…. 따뜻한 다정함이라던가, 품위가 넘치시는 거? 아름다우신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요.”
“으음, 그렇단 말이죠? 흐음….”
그나마 자백의 시가 걸려있지 않은 건 천운이었다.
질문을 듣자마자 위스키에 물방울을 떨어뜨린 듯 작은 장모님의 체취를 비롯해 온갖 부드러운 부분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정말 면목없는 말이지만 이 대화 계속해야 하나요?”
“아, 이쯤이면 충분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시우 군,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네, 듣고 있습니다.”
“하아….”
머뭇거리며 엄청 오래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아아! 미적거리는 건 딱 싫어하는 일인데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좋아요! 톡 까놓고 말하겠어요.”
깊은 심호흡 이후 이어진 발언은….
“데네브랑 계승 전까지만 만나는 거 어때요? 괜찮죠?”
상상을 초월하는 폭탄선언이었다.
“나도 알아요. 진짜 어처구니없는 말인 거. 솔직히 말하면서도 엄청 화나거든요? 그런데 최근에 머리가 복잡해요. 그 잘난 낙인 복제 능력을 이용하면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느니. 아니, 뭐 그런 건 솔직히 둘째 치더라도 데네브도 고생했는데 마지막 정도는 마음껏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기도 하고….”
그녀가 그렇게 허둥지둥 말을 꺼내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어차피 예소드 백작이 견습마녀가 있는 마녀의 연구 샘플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니까요. 실험의 목적이라면 이따금 괜찮지 않아요?”
소나기처럼 말을 쏟아내며 어색한 손짓 발짓을 동원하던 알비레오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지 내가….”
그러다 깊은 현자타임이 왔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는 큰 장모님이시다.
어깨에 힘을 쭉 빼더니 소파에 기대앉아 갑자기 힘없는 실소를 흘렸다.
“어렵네요. 인생이란 건.”
“그런가요?”
“나이 좀 먹었다고 시우 군에게 잘난 듯이 설교한 주제에 또 선택지가 눈앞에 보이면 고민하게 돼요. 일단 방금 얘기는 잊어주세요. 데네브와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게 우선인 것 같으니.”
어떤 상황인지는 아주 모르진 않겠으나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의외라 놀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씀하실 줄은 몰랐거든요.”
솔직히 중간쯤부터 하이 소프라노톤 사자후를 들을 줄 알았는데 이런 가벼운 분위기로 끝나다니.
“뭐 어쩌겠어요. 이미 벌어진 일인걸. 샤론 양과 티페레트 공작님 거기에 심해의 마녀까지 연인이랍시고 데려올 때는 분명 화가 났던 것 같은데. 한두 명도 아니고 연인을 떼거리로 우루루 데려오니…. 이젠 뭐,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도 없잖아요.”
허심탄회한 쓴웃음을 보며 시우의 머릿속에 무언가 퍼득 지나쳐갔다.
“떼거리로 우루루?”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
그걸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알비레오 님, 저 현세 가야겠습니다.”
“취했어요?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앉으세요 시우 군.”
“떼거리로 가면 되지 않습니까?”
“네?”
2.
귀족적인 문화를 구가하는 마녀들인 만큼 사교모임이란 중대한 행사이다.
게헨나 사교모임의 정점을 꼽을 땐 단연 1순위로 거론되는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첫번째 붉은 지붕 살롱.
그 이름처럼 영국보다는 프랑스 살롱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살롱에선 마법 연구에 관한 토론 및 토의가 일어나며, 다과회, 공연, 강연, 경매 등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게헨나의 최신 유행을 선도하기도 한다.
다만 밤의 살롱은 낮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낮의 살롱이 귀부인들이 저만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투기장, 마법에 대한 학구적인 토론이 오가는 심포지엄이라면.
밤의 살롱은 격식을 내려놓은 느슨한 규율 속 자유로운 만남의 장이라고 해야 할까?
은밀한 눈빛이 오가거나, 어두운 조명 속 으슥한 소파에서 기술교류가 아닌 타액 교류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핫, 간지러워요….”
“요즘 연구비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어….”
“현세에서 호문쿨루스가 군단을 이뤘다는데요?”
“그래? 신기하네.”
현세에서 그 난리가 일어나고 있어도 언급되는 건 짤막한 한 두 마디 정도.
심야의 살롱은 여느 때처럼 약간의 관능과 여유로움이 조화된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다들 뭔가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하며 한가로운 권태감에 젖어들어 갈 무렵.
-뚜벅 뚜벅 뚜벅
마녀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몸을 겹친 채 뱀처럼 진득하게 입을 맞추던 마녀도.
카공족처럼 연구자료를 가져와 훑어보던 마녀도.
와인을 곁들여 물담배를 피우던 마녀도.
수다를 떨며 키득키득 웃음을 짓던 마녀도.
2층 테라스에서 밀담을 나누던 마녀도 난간에 몸을 걸치며 새로운 등장인물에게 시선을 모은다.
사실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자세히 볼 것도 없었다.
살롱에 모여 있는 많은 마녀 사이에 독보적인 개성을 자랑하는 인물이니.
“어? 신시우다.”
“정말이네?”
“여자 꼬시러 왔나?”
놀라움에서 비롯된 정적을 깨고 단숨에 어수선해지는 살롱.
멋드러진 생김새에 댄디한 정장 자켓을 걸친 채 등장한 남자는 논문감사 사건 이후 살롱 대화의 단골 주제인 유명인사 신시우였다.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그가 이 야심한 밤 잘 꾸민 채 살롱에 발을 들였으니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와…. 핏 미쳤다. 나 입후보할래. 머리채 쥐여 잡힌 채로 박히고 싶네.”
“뭐래 미친년이. 나도 낄게.”
“근데 진짜 여자 꼬시러 온 걸까요?”
“그렇겠지, 그게 아니면 왜 이 시간에 왔겠어.”
“하지만 듣기로는 제머나이 백작가 사위라던데요.”
농밀한 섹드립과 ‘왜 이 시간에 살롱에 왔을까?’라는 호기심 어린 의문이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쏟아지는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충분히 소란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신시우라고 합니다.”
계속 듣고 싶어지는 중저음으로 시작한 인사말은 더욱 호기심을 자아내는 한마디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매력적인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