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3 - #194_태풍(6)
#887
1.
현세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소식, 그러니까 호문쿨루스의 왕이 이끄는 군단에 관한 이야기는 게헨나 마녀들에게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다.
‘소식 들었어?’ ‘아 그거? 들었지. 그래서 오늘 저녁 뭐 먹을래?’ 처럼 물에 물 탄 듯 밍밍한 반응만이 오갈 뿐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인 것도 알겠고, 심상치 않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게 뭐 어쨌냐는 것이다.
군단이 얼마나 대단한진 몰라도 혹여 놈들이 게헨나에 발을 들이는 순간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죄다 토벌당할 테니 말이다.
게헨나의 의결집행 기관인 세피로트의 나무와 각 학회 고위 마녀가 한자리에 모인 대회의가 2시간만에 해산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회의를 끝내고 온 이본느 코하브 백작은 회의록을 정리하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찌나 깊게 생각에 잠겼는지 동거인 블랑쉬 에렐림 공작이 방에 들어서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본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요?”
“아,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어요.”
에렐림 공작을 보자 흐리게 번지던 마음이 진정된다.
코하브는 아직도 에렐림 공작와 연인 관계가 되었던 순간은 잊을 수 없었다.
게헨나에 셋밖에 없는 공작이자, 진리진명 학술회의 학회장이자, 천 년의 삶에서 쌓아온 지혜로 대현자라고 불리는 에렐림 공작과 사랑하는 관계가 되다니.
이미 꽤 지난 일이지만 이따금 떠올리는 것만으로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기쁜 것이다.
가벼운 키스로 인사를 나눈 뒤 에렐림 공작이 물었다.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지 궁금하네요.”
“사실, 조금 허망해서요.”
“허망?”
“지금 군단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마녀 여럿이 집결했잖아요. 그중에는 티페레트 공작도 있고요.”
회의에서 오갔던 만큼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이다.
“호문쿨루스란 고작 창조의 마녀가 만든 사역마인데 그런 사역마무리를 막기 위해서 23 위계 공작이 나섰단 말이지요. 그런데도 버겁다고 우는 소리를 내고 있고.”
“창조의 마녀이니까요.”
“그래도 기록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예전에 사라진 그녀의 경지가 저희가 수 세기 동안 쌓아온 것보다 아득하다는 걸 느낄 때면 굉장히 허망해져요.”
마녀 사회에서 창조의 마녀는 신화시 된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정보가 굉장히 적다.
정확히 언제 등장했는지도,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는지도, 왜 호문쿨루스를 만들었는지도, 어째서 홀연히 버렸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아직도 상아탑 앞에 숙식을 해결하는 추앙자가 있는 케테르 공작과 달리 창조의 마녀는 절대적이고 자연스러운 종교처럼 자리 잡아버렸다.
“물론 곱씹어보면 창조의 마녀가 마냥 완벽한 건 아니지만요.”
“그게 무슨 의미죠?”
신앙은 의심과 질문을 잊게 하고, 조용한 맹종을 만든다.
따라서 코하브 백작의 의견은 작금의 마녀 사회에서는 꽤 듣기 힘든 발언이었다.
“결국은 자신의 사역마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잖아요. 마녀의 낙인을 동력원으로 삼는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마녀의 숫자가 줄어든 이후엔 인간을 습격하게 됐고요. 또 이번처럼 대규모 사태도 방지하지 못했으니까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고 봐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의 답을 내린 코하브 백작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당황해 에렐림 공작을 보았다.
혹시 자신의 발언에 에렐림 공작의 심기를 건드린 게 있었나 싶었던 것이다.
“너무 신 난 듯이 떠들었네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코하브. 하지만 한 가지 알려 주겠어요. 창조의 마녀는 실패나 실수 따윈 하지 않아요.”
단언하는 듯한 말투.
이때까지만 해도 이본느는 블랑쉬의 발언이 신앙과 같은 맹목적인 믿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했다.
마녀도 같은 마녀가 아니다.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예도 있는 것이다.
“모든 건 창조의 마녀의 안배. 케테르는 그녀의 안배를 눈치챘고 인간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죠.”
“…블랑쉬?”
하지만 이어진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선문답을 좋아하는 블랑쉬의 평소 말투를 고려해도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멋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
굉장히 품위 없는 일임과 동시에 어차피 제대로 대답해 주지도 않으니까.
대신 한가지 이어지는 화제를 찾았다.
일전 블랑쉬는 지나가듯 ‘인간이 두렵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지극히 그녀다운 취향의 농담이겠으나 케테르 공작이 인간을 지키려 했다면, 자칭 인간을 ‘두려워’하는 에렐림 공작께서는 어떤 답을 해줄까?
“그렇다면, 블랑쉬도 인간을 지켜볼 생각은 없나요?”
에렐림 공작은 대답대신 건조하게 소리 없이 웃었다.
하지만 미소의 의미가 허황한 상상에 대한 조소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2.
수아 선생은 동해가 아닌 한국으로 향했다.
일행과 갈라져 군단의 상륙 지점인 한국에 대규모 결계를 치고 있는 것이다.
“아멜리아, 샤론, 르뤼에 양. 잘 와주었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요.”
“시우는?”
“짐이 걱정 말고 얌전히 있으라 엄포를 놓았느니라.”
그러나 수아 선생이 없다 해도 세 대마녀의 지원은 더없이 든든한 일이었다.
여차하면 린네에게 세 괴수의 상대를 맡기고 게릴라 부대를 재편성할 예정이었는데.
여기 모인 인원으로 예비 부대를 재정비하고 서울 쪽에 집결 중인 마녀와 함께 양면전술을 구사해도 될 것 같다.
고위 대마녀 셋의 참전은 그만한 게임 체인저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겠네. 지금껏 했던 것처럼 군단의 측면을 지속해서 공격하며 상륙을 저지할 걸세. 서울 지부에 최대한 많은 마녀가 집결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본대와 합류하여 일망타진하겠네.”
“그렇게 귀찮게 굴 것 없도다. 짐이 저 잡것들을 싸그리 청소할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샤론 양, 르뤼에 양 좀 말려보게나.”
“에잇! 왜 또 짐에게만 그러느냐! 방금 짐의 무용을 보지 않았더냐!”
호기롭게 말하는 르뤼에.
하지만 아무리 이 인원이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마녀는 분명 강대한 힘을 부리지만 마력에 한계가 있다.
설령 시우에게 마력을 충전받고 돌아와도 회로의 피로도와 내구성이 발목을 잡고 말이다.
저만한 숫자를 상대하는 건 중과부적이라는 것이다.
“르뤼에, 우리 중 하나라도 다치면 시우가 슬퍼할 거야. 그건 싫지?”
“저런 잡것들이 짐의 옥체에 생채기라도 낼성싶으냐?”
샤론과 르뤼에의 아옹다옹 속에서도 엘로아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
흐름이 좋다.
이대로라면 상륙 전에 군단을 저지하는 것도 헛된 꿈은 아닐 것 같았다.
“모두 준비하게. 놈이 오네.”
그때 모든 사태의 원흉, 괴수의 왕이 모습을 보인다.
군단의 중간에 묵묵히 이동하던 수사슴이 수면을 박차며 홀로 걸어왔다.
호문쿨루스 주제에 위엄과 위용을 두르고 있으나 자살 지망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행위다.
설령 엘로아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적기사가 살아온다 해도 이만한 전력 앞에서는 5분도 버티지 못하고 무참히 찢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중과부적이다.
양자의 거리가 2km쯤 떨어진 지점에서 우뚝 멈춰 선 수사슴이 하울링을 하듯 고개를 삐딱하게 치켜들고 긴 울음을 토해냈다.
-우우우우우!!!
괴수의 것이라 느껴지지 않는 신묘한 울음이 목관악기처럼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쩍 쩌저적
공간이 찢어진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사슴의 등 뒤 풍경 전체에 하나둘 균열이 생겨난다.
“저건….”
수사슴이 한 일은 간단했다.
그저 ‘부른’ 것이다.
동면 중이던, 아공간에 잠들어 있던 호문쿨루스들을.
-쩍, 쩌저적!
알을 깨고 나오듯 차원의 틈새에서 몸을 드러낸다.
하나, 둘을 넘어 열을 넘고.
열, 백을 넘어 수백에 달한 또 다른 괴수의 무리가 긴 잠에서 깨어나 몸을 뒤튼다.
-키에엑!
-카아아아
각양각색의 생김새의 주둥이에서 쏟아지는 불협화음처럼 사방을 잠식했다.
군단만큼 엄선된 정예 괴수는 아니다.
그러나 머릿수만으로 가뜩이나 인력 부족에 허덕이는 위치포인트 측 의욕감소에 쐐기를 박기 충분했다.
“이건 말도 안 돼….”
“튀자, 같이 튀자.”
새로운 지원군의 활약을 지켜보며 전의를 북돋았던 조력자들이 저마다 내뺀다.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엘로아조차 일순 대처법이 생겨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공작님! 티페레트 공작님!]
마법을 통해 비상대책본부로부터 히스테릭한 무전이 들려왔다.
[지금 그쪽에 계시죠? 호문쿨루스의 차원 왜곡 반응이 다수 관측됐어요! 수는 일백 이상!]
“마침 보고 있네. 게헨나로부터 응답은 없었나?”
[대회의가 있긴 했는데…. 특별한 지원은 예정이 없다고만…. 공작님! 큰일 났어요! 지원을 약조했던 위치포인트 측에서 이렇게까지 상황이 꼬이면 조력이 어렵다는 회신이…!]
추방자들이 도망쳤듯, 이 역시 예정된 일이었다.
집결하고 있던 마녀들도 승산이 영영 보이지 않게 되자 등을 돌린 것이다.
이제 막 희망이 보이려던 순간이었는데 이렇게 돼 버리다니.
엘로아는 암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된다면 상륙은 저지할 수 없다.
저 멀리서 검은 갑옷을 입은 누군가가 나타난 건 모두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감돌 때였다.
저렇게 큰 키에 검은 갑주를 입은 마녀가 달리 있을 리가 있나.
“죄송해요, 조금 늦었죠?”
당연히 신시우였다.
“…시우, 그대가 여기 와서는 안 된다고 말했네.”
엘로아는 할 말을 잊었다가 은은한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엄하게 시우를 질책했다.
“걱정해서 충고해 주셨는데 멋대로 어겨버렸네요.”
투구를 벗은 시우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을 일이 아니라네!”
“괜찮습니다.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어디 보자…. 여기 좌표가, 여기구나.”
어쩐 일인지 사랑 어린 엘로아의 일갈에도 태연하게 스마트폰과 통신 수정구를 꺼내 든 시우.
그가 무엇인가 조작하자마자….
-우웅! 우웅! 우웅!
‘문’이 작동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왜곡감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 역시 오갈 때는 속이 울렁거려요….”
“이야…. 많긴 많네요.”
“이게 얼마만의 외출이야?”
“와! 사냥감이 잔뜩!”
그와 동시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다름 아닌 게헨나 소속의 마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마녀들이 하나 둘도 아니고 수십이나 떼거리로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어중이 떠중이가 아니라 어느 학회의 고위직, 게헨나의 남작, 심지어 현세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 마녀들.
심지어 게헨나 밖의 일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 정통파 귀족, 메티스 그레모리 사서장을 위시한 비서고의 사서들도 끼어 있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끝 없이 느껴지는 왜곡감과 해상을 가득 채우며 소환된 마녀의 수는.
그야말로 군단이라 칭함직하다.
“스승님, 이러면 나와도 괜찮죠?”
사방에서 왜곡감이 퍼지는 와중 시우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