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92 - #194_태풍(5)
#886
1.
형형색색의 야생화로 변해 일대의 수면을 채우는 퀸의 잔해.
꿈에 나올까 무서운 징그러운 생김새의 퀸은 생의 마지막에선 예술적인 피날레를 맞이했다.
폭우보다도 빼곡히 쏟아져 내리는 수억 송이의 꽃가루는 억만금을 주어도 볼 수 없는 장관이었으나, 퀸의 친구인 철갑룡과 왕갈치에게는 그다지 낭만적인 장면으로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끼에에에엑!”
“쿠오오오오!”
왕의 명령이 강제되어 있는바 도망을 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껏 곤두선 경계심을 내보이며 제각기 하늘과 바다에서 아멜리아의 주위를 선회했다.
“후우….”
호문쿨루스 사냥 경험이 풍부한 아멜리아라도 이만한 질량체를 ‘개화’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시우.”
예상보다 큰 마력의 소모 값과 고된 연산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자니 시우가 보고 싶어진 아멜리아.
빨리 이 일을 해결하고 그의 품에 안겨서 칭찬을 받고 싶었다.
“끼에에에!!!”
바다 아래를 빙빙 돌며 의미심장한 기동을 하던 왕갈치가 물 위로 튀어 오른다.
뾰족한 주둥아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 바닷물을 연금 변환하여 만들어낸 부식액의 고압수류.
수십 갈래로 뻗어져 나가는 고압수류의 위력은 대규모 마포에 걸맞는다.
철판은 물론이오 떡장갑으로 둘둘 말아놓은 핵 방공호 따위도 우습게 짓이겨버릴 위력이었다.
그러나 아멜리아가 이렇듯 적의 앞에서 잡념에 빠지는 건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촤아아아악!!!
상공에 아득히 떠있던 아멜리아의 발치까지 높게 치솟은 해일이 고압수류를 막아낸다.
깊은 심해에서 활동하며 숱한 토벌을 따돌려온 왕갈치.
이제껏 바다는 놈의 편이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파도 위에 발을 딛고 팔짱을 낀 채 왕갈치를 내려보는 마녀.
해상전이라면 무적을 자부해도 좋은 ‘심해의 마녀’ 르뤼에 누켈라비가 있기 때문이다.
“깊게 잠겨라.”
일반적인 대마녀의 수배에 달하는 마력에서 말미암아 허허벌판에서도 ‘마해의 파도’를 몇 번이고 소환할 수 있는 르뤼에다.
하물며 본진이나 다름없는 바다 위에서 그녀의 전투력은 허세 따위로 치부할 만한 게 아니었다.
-쾅! 콰앙! 쾅!
마력과 함께 몇 번이고 휘몰아치는 해일.
드넓은 바다가 세숫대야라도 된 양 뒤집히고 흘러넘치길 반복한다.
아무리 마녀라도 이만한 천지개벽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자는 극소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추방자들은 전율마저 느꼈다.
“이게 옛 마녀….”
“저 위엄 넘치는 모습을 봐요. 바다의 여왕이라는 말이 딱 맞네요.”
“싸움이 끝나면…. 말이라도 걸어볼까?”
“...되겠어? 난 간 떨려서 못하겠다.”
“어? 심해의 마녀가 이쪽 보는데요?”
“진짜? 전투 중인데? 에이 뭐야, 안 보잖아.”
“정말이에요! 진짜 방금 힐끗 봤다니까요?”
그러나 삽시간에 끝날 것 같던 결전은 예상외로 길어졌다.
“끼엑! 끼에엑!”
왕갈치의 발악 탓이었다.
전투를 완전히 포기.
최대한 바다 밑으로 잠수하여 충격을 흘려내는가 하면 수류를 조작하여 몸을 보호한다.
그저그런 중소형 호문쿨루스였다면 진작 수압과 마력의 파동에 으깨지고도 남았겠지만, 타고난 체급으로 몸 비틀며 버티는 왕갈치를 단숨에 쳐죽이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으으.”
르뤼에의 눈썹이 초조하게 꿈틀거렸다.
전투가 버겁기 때문은 아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지 5분만 지나면 요리조리 얄밉게 피해 다니는 갈치를 예쁘게 세장뜨기할 자신이 있었다.
르뤼에가 긴박한 초읽기에 들어간 건 전혀 다른 이유 탓이었다.
아직 어린 마녀에 속하는 르뤼에다.
보통 그 또래의 마녀는 제힘을 과시하지 못해 안달 난 경우가 많았다.
르뤼에도 내심 아쿨라 밖으로 나가기만 한다면 자신의 힘을 한껏 뽐내며 경외의 대상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게헨나의 촌것들은 이상하리만치 바다의 여왕에게 존중을 보이지 않았다.
견습마녀 애송이들이 친구를 먹으려고 하질 않나.
누켈라비 왕실 사업 파트너인 주인장은 군사행동 금지조약이니 뭐니 내정간섭을 하려 하질 않나.
초록 머리와 국서인 시우는 도로시의 나쁜 버릇이 전염된 것인지 르뤼에를 애 취급한다.
금발과 분홍머리,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검정머리는 경외를 강요하기엔 부담스러운 상대였고 말이다.
“심해의 마녀 대단해!”
“저런 마법은 처음이야!”
그런 르뤼에에게 추방자들의 경탄과 탄식은 그 어떤 초콜릿보다 달콤했다.
조금 전부터 귀를 쫑긋 세운 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음미 중이다.
그러나 사냥이 질질 끌림에 따라 칭송 가득했던 그들의 대화가 변질되어간다.
“임펙트보다는 오래 걸리네.”
“같은 속성이라서 내성이 조금 있는 건가…?”
따위의 말로 말이다.
“이익….”
이는 버틸 수 없는 수모였다.
원래라면 기본기만으로 압살하는 위용을 뽐내려 했던 르뤼에는 조금 더 마력을 쓰기로 했다.
최대한 근엄히 어명을 하달하며 하나의 어항을 개방한다.
“군무 대신. 물어 죽여라.”
-뀨우우우우우!
누켈라비 왕조 군무대신 레비아탄의 등장.
고 라켄라켄만큼이나 거대한 동체를 지닌 레비아탄은 왕갈치의 유일한 피난처이던 해저를 사나운 독사처럼 헤집었다.
커다란 입이 벌어지며 혼비백산 달아나는 왕갈치의 허리를 끊어내자 수면 아래로 부글부글 피안개가 자욱이 번진다.
“실로 시시하구나.”
르뤼에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치켜들며 피니시 멘트까지 끝내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한방에???”
“역시 가지고 놀던 거였네요!”
“과연 위엄 넘치는 바다의 여왕!”
손바닥 뒤집듯 호들갑을 떨어대는 추방자들의 환호성에 혀를 깨물며 표정 관리하는 르뤼에.
오똑한 콧날 아래 콧구멍이 조금 커졌다는 사소한 변화 정도는 여왕의 위엄을 그다지 훼손치 못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카타르시스에 정신 못 차리고 주먹을 쥐었다 피던 르뤼에가 하늘을 올려보았다.
-크롸라라라라라!!!
그러고보니 깜빡했다.
올려다 본 하늘엔 아직 처리하지 않은 ‘철갑룡’이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짐승의 지능으로도 여기 모인 마녀의 ‘격’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명예와 자기과시욕에 가득한 눈으로 호문쿨루스를 올려본 르뤼에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놈을 맡아줄 사람은 따로 있다.
원래 여왕은 타인의 공훈을 가로채는 얍쌉이 짓은 하지 않는 법이다.
“초록 머리. 그대의 시간이니라.”
산들바람을 타고 허공을 딛으며 나타난 녹발의 마녀, 샤론.
마녀 정복에 라이더부츠, 커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완드는 그녀가 전투태세에 들어갔음을 의미한다.
“크롸라라라!!!”
‘왕’으로부터 하달된 명령을 거부하게 하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다.
철갑룡이 포효하며 몸을 틀었다.
가장 위협적이었던 두 마녀가 물러나고 비교적 위험도가 낮아 보이는 마녀만이 철갑룡을 가로막았다.
본능에 의해 결정된 도주 루트를 따라 완드를 겨눈 마녀를 향해 돌진하는 철갑룡.
반쯤 다물린 주둥이 사이에 잿빛의 마력이 응축된다.
입을 벌리는 순간 폭풍같이 분사될 브레스는 저 마녀를 딱딱한 돌덩이로 만들어버릴 터였다.
“…….”
샤론은 아음속으로 날아오는 집채만 한 철갑룡을 침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일전 시우 구출 작전에서 말도 없이 열외 됐던 샤론.
그때의 무력함과 부채의식, 그리고 언젠가 시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염원은 그녀를 21 위계의 경지로 이끌었다.
이제는 증명해야 할 때이다.
“균형이여.”
샤론이 나지막이 영창을 읊조리자 십자형태의 마법진이 등 뒤로 뻗었다.
샤론의 마법은 타르바의 5원소를 뿌리로 둔다.
정통 원소 마법답게 각 원소의 상징성을 강화하는 ‘제물’을 바치며 한번 사용한 제물은 영구적으로 소멸하거나 그 효력을 잃는다.
이는 언뜻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보인다.
상징을 차용하기 위한 제물이 한두 푼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쓸 때마다, 아니 하다못해 연구를 하려고 해도 다른 마녀의 배는 되는 실험 예산을 요구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다들 상징체계에 관해 그럴듯한 ‘은유’로 얼버무리는 와중 역대 에버그린은 어째서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하며 발전시켜왔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어디 맛 좀 볼까?”
샤론은 열매가 맺힌 수국 모양의 은장식을 꺼내 들었다.
에메랄드 타블렛에서 삼만일 동안 제련해 뽑아낸 진은(眞銀), 술식에 최적화되도록 커팅을 끝낸 몽슈 산 피전즈 블러드.
그 둘을 게헨나 최고로 꼽는 모이어티 아틀리에에서 세공해낸 것.
본디 예장의 핵으로나 써먹을 법한 고가품이다.
물론 샤론에게는 이런 고가품을 제물로 쓸 재력이 없다.
하지만 지금은 빵빵한 보급품이 있었다.
‘샤론 양 잠깐 이리 와볼래요?’
‘저희는 쌍둥이 때문에 직접 갈 수 없으니 요긴하게 써 주세요.’
바로 현세를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샤론에게 건네준 ‘제머나이 백작의 고급 제물 패키지’.
에버그린의 원소마법은 상시 값비싼 제물을 요구하나, 그 제물의 가치에 따라 위력이 비약적으로 증폭된다.
지갑만 두둑하다면 위계 하나 정도는 뒤집을 잠재력을 내보이는 자본주의 마법인 것이다.
-화르르르륵
은장식이 사라지며 샤론의 등 뒤로 태양이 떠오른다.
한밤과 폭풍의 암전을 찢어내며 주위를 대낮처럼 밝히는 성스러운 광채.
간접열만으로 폭우를 말끔히 증발시키는 마법의 위력은 화염 계열의 대가로 알려진 델라의 것보다도 강력했다.
이것이 바로 21 위계로 도약하며 얻은 깨달음에 평상시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던 자본력이 더해진 대마법의 힘.
“누구야 저 마녀는?”
“어? 나 쟤 전에 서울에서 봤던 것 같아. 빚쟁이 아니야?”
“제대로 알고 있는 거 맞아요? 이, 이 위력은 뭐죠?”
고위계 마법 시연으로 눈 호강을 하던 추방자들이 다시 눈을 빛낸다.
운석처럼 내리꽂히는 파이어볼 앞에 철갑룡의 내구도는 고려할 것이 못되었다.
강력한 석화 브레스는 열풍에 꺾여 사라지고, 온갖 마법을 튕겨내는 외갑은 직접 맞닿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내일의 적이 오늘의 동지라고 했던가?
오늘만큼은 자본주의도 샤론의 편이었다.
“후, 시우가 이걸 봤어야 했는데.”
샤론은 속사를 끝낸 카우보이처럼 완드 끝에 일렁이는 불꽃을 멋지게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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