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90화 (896/917)

Chapter 890 - #194_태풍(3)

#884

1.

홋카이도 지부와 첫 상륙 예측 지점인 서울 지부를 기점으로 전 세계 조력을 약조한 마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 대다수는 시민권 복권을 노리는 추방자였기에 게헨나의 ‘문’을 활용해 집결하는 건 불가능.

따라서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녀는 비행을 통해, 그렇지 않은 마녀들은 군용 전투기를 통해 최대한 빨리 모여들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군단은 시시각각 남하 중이었으며 이대로라면 정면대응할 전력이 모이기 전 군단이 상륙한 한반도가 쑥대밭이 될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엘로아는 결단을 내린 뒤 홋카이도 지부장 루시엔에게 전달했다.

“충분한 대비가 갖춰지기 전까지 요격을 준비할걸세.”

부족한 전력이나마 그러모아 측면을 공격한다.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통해 지원이 올 때까지 최대한 행군을 저지한다.

위험도가 매우 높은 작전이었으며, 자칫 충분한 전력이 집결하기 전 각개격파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녀라면 기피하고도 남을 만한 작전이라는 말.

“실력에 자신 있는 마녀들에 한해 자원자를 받게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였다면 ‘까라면 까’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마녀들에게 무리한 작전을 강요하면

되려 탈주하는 이가 생길 수 있었다.

루시엔이 분주히 뛰어다니며 자원자를 모집하는 동안 린네가 다가왔다.

“엘로아, 수비학파에서의 전령이다. 해석이 완료된 메모리얼 스톤을 주고 갔다.”

“지금 말인가?”

“그렇다.”

도로시가 얻은 메모리얼 스톤은 암호화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에 수비학파에 나머지 절반 분의 영상 해석 과정을 맡겼다.

의뢰를 했으니 암호 해석이 완료된 결과물을 건네주는 건 딱히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지금은 한창 폭풍전야의 시기.

이런 시기에 급하게 퀵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중요도가 높은 사안이라는 의미.

엘로아와 린네는 머리를 모아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지난번 보았던 곳은 건너뛴다.

괴수 무리로부터 등을 돌린 고릴라, 그러니까 이 기억의 주인은 불안한 듯 뒤와 앞을 번갈아 보며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유심히 영상을 바라보던 엘로아의 눈썹이 매섭게 모인다.

“린네, 다시 시간을 앞으로 돌려주게.”

“…….”

군말없이 영상을 돌린 린네도 이번에는 흠칫했다.

도망치는 고릴라 따위에는 신경도 기울이지 않은 채 도도히 고개를 치켜든 수사슴의 옆에 인간 형태의 그림자가 있다.

단순히 인간형 호문쿨루스라고 칭하기엔 너무도 고급스러운 치장을 한 ‘마녀’의 실루엣이 말이다.

“여기서 멈추게.”

정지된 영상을 확대한다.

호문쿨루스의 시력을 고스란히 반영한 영상은 이번엔 한결 뚜렷하게 수사슴 옆에 선 마녀의 정체를 비춰냈다.

공교롭게도 엘로아도, 린네도 알고 있는 마녀이다.

과거 서울에서 겁난을 일으킨, 적기사를 거느렸던, 얼굴 한쪽이 일그러진 호문쿨루스를 부리는 마녀.

‘천수의 마녀’라는 이명이나 ‘비겁의 마녀’라는 멸칭으로 불렸던 파올라 소치틀, 그녀였다.

일전이었다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엘로아가 분명 제 손으로 처리한 데다가 화장을 끝낸 파올라가 어째서 되살아나 있는가?

“속삭임이다.”

“그래 보이는군.”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헥센나흐트에서 탈출 당시 시우와 린네 일행을 속삭임의 마녀와 마주했다.

그리고 베일에 싸여 있던 속삭임의 마녀의 편린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시우의 말에 따르면 속삭임의 마녀는 비앙카 벨릴리의 모습을 취한 채 그녀의 예장 ‘하늘을 쏘는 활’을 사용했더랬지.

릴리스의 자성마법이 다른 마녀의 자성마법을 복제하는 것이라는 추측은 끝내 놓은 이후이다.

이를 토대로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어째서 대뜸 괴수의 왕 같은 것이 등장했는지.

어째서 괴수의 왕이 호문쿨루스 군단을 이끌게 되었는지.

짐작컨대 괴수의 왕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세계 도처에서 분탕을 치는 릴리스의 농간.

목적도 이유도 짐작할 순 없지만, 한층 더 위험한 일이라는 게 증명된 셈이다.

“어떻게 할 거지?”

“방법이 없네. 해야 할 일을 해야지.”

하지만 지금 당장 계획을 보류하기엔 여유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군단의 상륙을 저지하는 일뿐.

엘로아는 지원자와 함께 전장을 향해 나섰다.

2.

검은 파도가 구불구불 휘어지며 일렁인다.

어두컴컴하게 하늘을 가린 뇌운은 거센 빗줄기와 함께 폭풍우를 쏟아내었다.

존재 자체로 재해를 이끄는 호문쿨루스의 영향이리라.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초월자인 마녀의 시야는 최첨단 야시경을 능가한다.

하여 넓은 수평선을 한가득 채우며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는 군단을 대낮인 양 훤히 살필 수 있었다.

제각기 다른 모습과 형태.

거대한 늑대, 바다 괴물, 불의 날개를 지닌 새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괴물의 형체를 취한 것부터.

표면이 매끈거리는 크롬 조각상, 직경 1km에 달하는 살덩이의 구체 등 도저히 생명체라고는 보기 어려운 것까지.

가장 중앙에 위치한 채 그들을 통솔하는 수사슴과 괴수의 행진은 오랜 설화 속 백귀야행이라는 단어를 연상케 했다.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한 동작은 없었지만 엘로아는 보고받은 대로 괴수 군단이 제법 영리한 지휘하에 움직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충분히 거리를 벌린 채 한 방향으로 행진하는 호문쿨루스 무리들.

이는 고화력 마법에 대한 대처이다.

옹기종기 모여 붙어있다 예기치 못한 고위력 마법에 일망타진 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군단과 직접 마주한 마녀들 사이로 여러 말이 흘렀다.

“하, 이게 맞나….”

“뭐 어때?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텐데.”

“티페레트 공작도 있고…. 문제는 없겠죠.”

군단의 예측 경로에 연고지가 있거나, 정말 드물게는 인간의 희생을 막고 싶어 나선 마녀도 있었지만 대체 타오르는 전의보다는 섣부른 각오와 보상에 혹해 나선 자들이다.

그리고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 나선 자원자들이 마주한 광경은 과연 전의가 꺾이기 충분하리만치 괴이하다.

-오오오오오!

-쿠오오오오!

마녀 무리를 발견한 호문쿨루스 사이에 울음소리가 울렸다.

양자 간 거리가 족히 수 킬로미터를 떨어져 있음에도 거대한 포효는 파도를 부수고 폭풍우를 가르며 검은 바다를 떨게 한다.

“…….”

엘로아는 호우 탓에 뺨에 달라붙은 옆머리를 정리하며 면면을 돌아보았다.

벌써부터 기세가 꺾였다.

이 역시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마녀의 평균 위계가 올라가며 호문쿨루스에 의해 목숨을 잃는 마녀 수는 크게 줄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수십 마리에 육박하는 네임드다.

마녀의 용돈 벌이로 전락하고 관심에서 밀려난 잔챙이들이 아니라, 오랜 기간 토벌되지 않고 마녀를 먹이 삼으며 악명을 쌓아간 까닭에 ‘이름’이 붙어버린 개체다.

만약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엘로아라도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보여주어야 한다.

“계약한다.”

그들이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엘로아의 검이 빛났다.

엘로아의 역할은 기회를 잡아 ‘왕’을 토벌하는 것.

시간 벌이에 불과한 지금 전력을 다 사용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검의 옆면에 빛나는 문자 수는 셋.

일순간 부풀어 오른 마력이 엘로아의 힘으로 치환된다.

울퉁불퉁 거칠게 움직이는 수면 위를 분홍빛 직선이 가로지른다.

삽시간에 돌출된 측면과 좁혀지는 거리.

“끼룩?”

엘로아의 돌진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신사복을 입고 외눈 안경을 쓴 사람 크기의 비둘기였다.

‘신사비둘기’라는 우스운 명칭이지만 200년간 무수한 사상자를 내던 무시무시한 괴수는….

-펑!

날개를 퍼덕이며 마법을 사용하려던 자세 그대로 붉은 폭발과 함께 하얀 깃털을 흩뿌렸다.

엘로아의 강화된 육신과 격돌하는 순간 야구공에 맞은 비둘기처럼 그대로 터져나간 것이다.

“뭐야?”

“공작님 언제 저기 가셨대?”

“방금 죽인 건가? 한방에?”

어수선하던 마녀의 이목이 단숨에 티페레트 공작을 향한다.

호문쿨루스의 사냥이란 실로 ‘사냥’과 흡사하다.

마녀보다 대부분 큰 체급과 마력 양을 지닌 호문쿨루스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무모한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들이거나 지혜를 짜내어 부족한 지능의 허를 찌르는 둥 요령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군단에서 약한 편에 속하는 신사비둘기라 한들 일격에, 그것도 육탄 돌파로 터뜨려버리는 무용.

-쿠오오!

-크아아아아!

공격 받음과 동시에 난동을 부리며 온갖 마법을 쏟아내는 호문쿨루스의 추격을 유유히 따돌리며 바다 위를 달리는 티페레트 공작.

정면에서 승부를 받아주지 않다가 빈틈이 보이면 매서운 속도로 달려들어 치고 빠지기를 반복한다.

“몇 명을 끌고 다니는 거야…?”

“저게 가능한 일이라고요?”

난생 처음 보는 군단의 위용에 짓눌렸던 마녀들은 그제야 떠올린다.

최전선에서 괴수를 상대하는 이가 수십의 공적과 수백의 호문쿨루스를 사냥해 온 가장 뛰어난 사냥꾼이라는 것을.

“저기 봐!”

그리고 엘로아가 측면을 맴돌며 주의를 끌고 있는 사이 반대편을 파고드는 한 마녀가 있다.

두 자루의 검을 쥐고 기모노를 입은 검의 마녀.

엘로아의 의도를 이해한 그녀는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파고들어 거대한 황소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신장만 5M에 달하는 황소의 외형은 신화 속 미노타우르스 그 자체.

짐승 특유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위협적인 호문쿨루스는 린네의 돌진을 무모한 객기 정도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 휘어진 신형이 미노타우루스의 팔을 휘감으며 도끼를 든 근육질 팔을 순식간에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크에에에엑!!!”

고통에 괴성을 지르는 미노타우루스의 얼굴까지 순식간에 도약하더니 목구멍 깊이 칼을 쑤셔 넣고 나비처럼 수면 위로 착지한다.

“이거…. 할 만할지도?”

“검의 마녀랑 티페레트 공작인데, 뭐든 되지 않겠어?”

“어디가?”

“지원하러. 이거 좋은 기회잖아?”

“전면전도 아니고 시간을 버는 정도라면야 뭐….”

소규모 교전에 불과하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압도적인 위용이 불안감을 잠식시킨다.

참전을 고민하던 마녀부터 도주를 고려하던 마녀까지 일제히 전장을 향해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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