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89화 (895/917)

Chapter 889 - #194_태풍(2)

#883

1.

영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다.

호문쿨루스의 왕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데 그 수사슴이 네임드 호문쿨루스 군단을 이끌고 대뜸 동해로 남하하며 한반도를 뿌셔뿌셔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만약 이 세상이 소설이었더라도 ‘급전개 아님?’ 이라는 생각에 고개가 갸웃거릴 법한 내용 아닌가?

그도 그럴게, 당장 남미 지역에 연쇄적인 재해가 발생해 도합 수십만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음에도 게헨나는 이토록 평온하다.

시우조차 지금, 수아 선생의 입을 통해 해당 사건에 대해 처음 알았을 정도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은 제머나이 백작과 수아 선생.

그리고 시우와 아멜리아, 샤론, 르뤼에.

“저능한 괴수 무리가 국서의 고향을 침략하다니. 당장 혼쭐은 내 주어야겠도다.”

르뤼에는 분개하면서 평소와 달리 유독 진중한 말투로 말했다.

당장에라도 현세로 향해 괴수 군단을 몰살해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르뤼에도 딱히 친 인간적인 마녀는 아니나 시우의 고향이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중대사안인 것이다.

“힘이 될 수 있다면 돕겠어요.”

이는 아멜리아도 마찬가지다.

밤새 조향 작업을 하다 왔는지 온몸에서 향기가 풀풀 나는 아멜리아는 차갑게 눈을 빛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이야. 나도 도울게. 시우야.”

시우의 선물 덕택에 건물주가 된데다가 마녀 시절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낸 샤론도 의기투합해 도움을 약조했다.

잠시 고민하던 시우가 물었다.

세 연인과 달리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장모님들을 보아하니 수아 선생이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건 오늘내일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궁금해진다.

“왜 이제야 말씀해주시는 건가요? 괴수의 왕이 나타난 이야기 말입니다.”

답지 않게 몇 번이나 말을 고르던 수아 선생이 내놓은 답변은 다분히 예상 범주 내에 있는 답변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티페레트 공께서 시우 공에게 한사코 비밀로 해달라 당부하신지라….”

“…….”

스스로를 굉장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인외의 힘을 얻었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도, 특별히 영웅이 되고자 마음을 먹은 적도 없다.

그저 손이 닿는 범주 내에서 행복을 지키고 영위하고 싶을 뿐이다.

정체불명의 마법을 정면에서 파훼해야 하는 상황은 언제나 두려웠다.

상처를 입을 때마다 아팠으며, 목숨을 건 싸움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꼭 정신까지 마녀가 아니어도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아까운 건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준의 소시민적 태도가 아니던가?

“그렇군요.”

그렇기에 시우는 놀랐다.

가고 싶다.

싸우고 싶다.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거창한 대의명분이나 정의 탓이 아니다.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 자신에게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스승님이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도 돕겠습니다.”

“안돼요, 시우 군.”

단호히 시우의 말을 끊은 건 수아 선생이 아닌 알비레오였다.

알비레오는 곧장 수아에게 물었다.

“수아 선생, 일련의 사건이 헥센나흐트와 연관이 없다는 보장이 있나요?”

“너무도 급작스러운 일인지라 확인할 수 없었사옵니다.”

“연관이 있다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나요?”

“소녀가 단정 지어 말씀드리기엔….”

“대략적으로라도요.”

“…반과 반으로 사료되옵니다.”

수아 선생을 향한 질문이지만 사실상 시우에게 들으라고 물어본 것이나 다름없었다.

“들었죠? 시우 군은 남들보다 더 소심해질 필요가 있어요. 불과 얼마 전에 헥센나흐트로 끌려갔잖아요?”

“하지만…. 제가 나고 자란 곳이 난리 나기 일보 직전이라는데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수아 선생님도 조력이 필요한 상황이기에 스승님의 당부에도 제게 말씀 주신 것 아닌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 마음고생 시켜놓고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전장으로 기어들어가겠다는 건가요?”

드물게 장모님에게 맞서는 시우를 알비레오는 뾰족한 목소리로 추궁했다.

“그건….”

그녀의 지적은 시우의 입을 닫게 하기 충분했다.

불가피한 상황이 대부분이었다고는 하나 시우가 연인들 속을 푹푹 썩인 건 사실이니 말이다.

마지막 도움이라도 요청할 겸 수아 선생을 힐끗 보았다.

시우를 가르치며 성장 포텐셜과 강함을 목도한 그녀라면 편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친 수아 선생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시우 공, 송구하지만 소녀 역시 알비레오 백작님과 같은 의견이어요. 너무 위험하옵니다.”

“수아 선생님도 보셨잖아요. 저라면 적잖은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사오나…. 괴수 군단이 헥센나흐트와 연관이 있고 또한 한국을 침범토록 조종하였다면 시우 공이 직접 전장에 나서시는 건 되레 적성세력의 바람대로 일 가능성이 염려되옵니다.”

“아가사 님.”

대화를 듣고 끼어들지 않던 아멜리아가 조용히 말을 보탰다.

아멜리아 역시 시우가 위험한 곳으로 향하는 건 싫다.

하지만 그의 바람이라면 지지해주고 싶었다.

만약 아멜리아라도 소중한 굴피나무 숲이 공격받는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말이다.

훗날 일어나는 일은 목숨을 다해서라도 막아내면 될 일이다.

“만약 헥센나흐트와 연관이 있다면 굳이 병력을 축차 투입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멜리아 양 말이 맞아요. 듣기로는 남미도 공격받았다는데 누가 자기 집 앞마당에 불을 질러요?”

샤론까지 가세해 조심스레 아멜리아를 도왔으나 알비레오와 데네브의 의견은 굳건했다.

“아멜리아 양, 헥센나흐트는 주전파가 힘을 얻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헥센나흐트 전체가 당장 전면전을 원하는 건 아니에요.”

“요컨대 이번 습격은 간을 보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죠. 습격을 당하고 주동자를 놓쳐 뒤숭숭한 헥센나흐트 내부에선 적당한 선전거리가 될 거고, 배후를 특징지을 만한 단서라도 없는 이상 모르쇠로 일관하면 그만이니까요.”

“남미에서 일어난 사건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만한 호문쿨루스를 대동하려면 약간의 ‘연료’는 필요해요.”

“본토 영역에서 연료를 채우고 출격시켰다는 것도 어색할 게 없는 추측이죠?”

“아무튼 시우 군. 현세로 나가는 건 절대 금지에요.”

세계에서 가장 큰 전쟁에 두 차례 관여했던 백작인 만큼 아멜리아도 샤론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시우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짐이 있지 않느냐?”

그때 위풍당당 나서며 시우의 어깨를 두드리는 건 르뤼에.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23 위계의 마력장을 은은히 뽐내는 르뤼에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묻노라, 짐이 누구?”

“르뤼에 님이죠.”

“다시! 짐이 누구더냐?”

“위대한 누켈라비의 왕조를 이은 르뤼에 누켈라비 여왕님이십니다.”

장난칠 기분은 아니었기에 한숨과 함께 답한 시우.

르뤼에는 그런 시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어깨를 흔들며 다시 재촉했다.

“아니다. 그대의 답은 틀렸도다.”

“네?”

“물론 짐은 누켈라비 왕조의 여왕이지만, 그전에 신시우 그대의 여자다.”

르뤼에에게 여왕이라는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알고 있는 시우다.

그런 르뤼에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가치와 시우를 동격으로 놓고 있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짐은 아직도 아쿨라에 틀어박혀 좁디좁은 세상을 전부라 생각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좋은 친구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고, 세계 정복이 이리도 먼 야망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라는 멋진 남자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짐은 그대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도다.”

“르뤼에 님….”

“그런 그대의 고향이 짓밟히는 걸 이 르뤼에 누켈라비가 묵과할듯 싶더냐? 바다 위에서 짐을 대적할 이는 하나도 없는 것이니라! 그러니까 너무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짐이 승전고를 울리며 돌아오는 날까지 쌍둥이와 놀아주고 있거라. 알겠느냐?”

실로 간만에 여왕다운 품위를 보여주는 르뤼에.

“시우,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도울게요. 시우와 처음으로 여행을 갔던 장소니까요.”

아멜리아 역시 따뜻하게 시우의 손을 감쌌다.

위계 상승 신드롬에 빠져 있는 샤론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나도 갈 거야. 말리지 마.”

아멜리아의 경우 위계가 오른 지 오래되지 않았고 르뤼에 역시 낙인을 승계 받은 지 오랜 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23 위계다.

시우가 모든 걸 다 쏟아 부어야 호각을 이룰까 말까 한 22 위계보다도 높은 경지인 것이다.

자신만 쏙 빠지고 연인들을 전장으로 보낸다 해도 두 사람이라면 다소 걱정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샤론은 21 위계다.

자칫 큰 위험에 휘말릴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나도 놀고만 있진 않았어.”

함께한 시간이 긴 만큼 이 정도 생각은 모조리 꿰뚫어보는 모양이다.

어딘가 허당 같고 가끔은 짜내나던 샤론은 처음으로 대마녀의 품격을 보여주며 단언했다.

“반드시 내 부동산 지키고 다시 돌아올게. 수아 선생님, 저희 모두 지금 바로 갈게요.”

수아 선생은 연인들의 대화를 멍하니 바라보다 샤론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멜리아도, 르뤼에도 어서 안내하라는 양 반듯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수아는 제 한 목숨을 끔찍이도 아끼는 마녀의 성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그런 만큼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번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상 초유의 재앙을 진화하러 가는 길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참전 의사를 밝힌다.

그냥저냥의 마녀가 아닌 전원 대마녀.

든든한 지원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감사하옵니다.”

알비레오 데네브와 마지막 말을 주고받고 세 사람과 함께 출입국 관리소로 향하는 길.

수아 선생은 한 가지 의문을 곱씹었다.

“소녀가 한가지 질문을 올려도 되겠사옵니까?”

“네? 네.”

“만약 시우 공이 없었더라면, 세 분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셨을는지요?”

“짐은 아쿨라에 있었을 것이니라.”

즉답이 나온 르뤼에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으로부터의 침묵이 길어진다.

“음….”

“글쎄요….”

이게 정상이다.

같은 인간끼리도 저 멀리 이름도 모르는 나라의 빈곤층이 초 단위로 아사하는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공감은 인지의 영역에 따라 달라지기에 인지 범위에서 멀리 떨어진 비극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공간에 존재하며 종마저도 다른 마녀에겐 바깥의 죽음이 숫자상의 통계로 보일 뿐이다.

아마도 게헨나의 다른 마녀들처럼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거나, 정말 커다란 문제가 되겠다 싶을 때나 움직였겠지.

즉, 이 든든한 지원군의 구심점은 신시우라는 의미였다.

신시우의 힘은 그저 마법적 능력과 무재 뿐만이 아니라….

수아 선생이 난잡하다고 염려를 표했던 연인 관계 즉, 인간관계에도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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