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88화 (894/917)

Chapter 888 - #194_태풍

#882

1.

최초의 사태.

최악의 재난.

사상 초유의 사건.

위와 같은 단언은 일련의 특징을 공유한다.

어떤 식으로 사건이 흘러갈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최악을 상정할 때 언제나 ‘저번에 있었던 일’을 토대로 대책을 마련하니 말이다.

마녀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설립 100년간 호문쿨루스 토벌에 공헌하며 데이터를 쌓아왔던 위치포인트도.

일선에서 몸으로 뛰며 그 어떤 마녀보다 많은 실전경험을 축적한 엘로아조차도.

갑작스레 번지는 이 사태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게 정말인가?”

그러니까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괴수의 왕이 이주일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무리를 이끌고, 태평양을 횡단해 동아시아 대륙의 전초기지 사할린 섬 인근까지 접근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만 내려오면 엘로아가 머무는 홋카이도고 거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동해다.

[관측 기구에 기록된 정황상 하와이 제도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후 곧장 오호츠크 해까지 진입한 모양입니다]

“우선 알겠네. 각 위치포인트의 지부장에게 소집을 부탁하네.”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지부장이나 마녀들이 적극 나설지는….]

“가능한 조속히 부탁하겠네. 내 이름으로 시민권 복권과 보상을 약조하게나.”

[예]

엘로아는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 관측실로 향했다.

호문쿨루스의 비정상적 활동에 대처하기 위해 관측실에는 긴급대책본부가 설치되었다.

각 지부 위치포인트 및 국제 주요 기관들과 정보를 연계하며,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곧바로 대책에 나서기 위함이었다.

사방에서 정신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고함이 오간다.

남미의 사례를 바탕으로 군단의 위험성을 파악한 각국 정부 고위층은 긴급대책본부의 핫라인을 더욱 뜨겁게 달궈놓았다.

한국, 일본, 인도, 필리핀, 몽골 심지어 게헨나 측 마녀와는 그리 왕래가 없던 중국과 러시아까지.

오호츠크해 인근의 국가는 호문쿨루스 상륙 저지에 최대 협력을 약조하며 협력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지르는 사람 대다수는 해당 국가의 방첩기관에서 지원 나온 직원들.

즉, 평범한 인간이다.

그에 비해 드문드문 앉아있는 마녀들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역마를 정찰에 동원해 군단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갱신하거나, 외지에 있는 마녀와 원격으로 통신하는 등 일단 할 일은 다하고 있지만 몇몇 시선엔 다분히 계산적인 기색이 엿보인다.

여차하면 제 한 몸은 빼야겠다는 분위기이다.

그들을 책망할 생각은 없다.

이런 위기 속 인간을 위해 전장의 바로 코앞에서 버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니.

“루시엔 지부장.”

“티페레트 공작님…!”

엘로아는 부임 반년도 되지 않아 맞이한 재앙에 진땀을 뻘뻘 흘리는 홋카이도 지부장, 루시엔을 찾았다.

침착하려 애쓰고는 있으나 초유의 사태로부터 밀려오는 중압감을 이겨내기에 그녀는 경험이 부족해 보였다.

엘로아를 보자마자 무너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왔으니 말이다.

“진정하게. 보는 눈이 많지 않은가?”

“저, 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 차리게!”

“죄, 죄송합니닷!”

거의 패닉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루시엔.

엘로아는 그녀의 눈앞에 짝 손뼉을 쳐 주의를 끌었다.

“사할린 주의 통제 협력은 받았나? 상업용 선박을 대상으로 경고를 발송토록 하게. 오호츠크 해를 지나는 항공로도 조속히 알아보고 회항 조치하게나.”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유즈노사할린스크 지부장과는 연락이 닿았나?”

유즈노사할린스크 지부는 오호츠크 해를 앞마당으로 두고 있는 사할린 섬의 지부로, 홋카이도 지부와 마찬가지로 헥센나흐트의 현세 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새로이 신설된 지부였다.

더불어 현시점 군단과 가장 가까운 지부이기도 하다.

“닿았습니다. 우선은 최대한 전선을 물린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직접적인 충돌은?”

“아직 없습니다.”

“훌륭히 판단했군. 진행 예상 경로는 어떻게 되나?”

“현재로선 남서쪽으로 진행 경로가 잡혔습니다. 아마 동해로 진입하여 한국, 상하이, 홍콩을 거쳐 남중국해 쪽으로 향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경거망동하지 말고 체통을 지키게나. 그대가 동요한다면 다른 이들도 동요할 걸세.”

“넵…!”

누가 뭐라 해도 이 긴급토벌본부의 사령탑은 엘로아 티페레트였다.

이 자리에 모인 마녀 전부를 합쳐도 엘로아 만큼의 실전경험을 지닌 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아, 딱 한 명이 있긴 하다.

“린네.”

“…….”

검은 기모노를 입고 벽에 기댄 린네는 여느 때 같은 태도였다.

이 소란과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한 무심하다.

“도로시에게서 연락은 없었나?”

“아직 없다.”

“아무리 돌아갔다 한들 꽤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 연락은 시도해보았나?”

“해봤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군단과 괴수의 왕으로 추정되는 수사슴이 오호츠크 해에 나타난 이상 정보 수집을 위한 작전은 물 건너갔다.

도로시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미에 머물러야 할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헌데 하필 이런 때에 연락이 뚝 끊어질 줄이야….

“도주한 것이겠지. 원래부터 음흉한 여자다.”

“사정이 있을 걸세.”

“난 뭘 하면 되지?”

“당장은 없네. 노파심의 충고이나 단독 행동은 자제하게나.”

무려 수십 기의 네임드 군단과 그런 네임드를 통솔하는 왕이다.

빠듯하게 추산해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대마녀 스무 명 정도는 필요하다.

예기치 못했던 급작스러운 사건이지만 세상만사 언제나 절망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일전 적기사 때와는 달리 작금의 위치포인트는 적지 않은 마녀를 전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그간 헥센나흐트로 흡수되지 않은 추방자들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위치포인트를 중심으로 뭉쳤기 때문이다.

게헨나가 추방자 면책 사업을 시작하며 기회를 노리는 추방자가 늘어났다는 점도 한몫했다.

위치포인트에서 그럴듯한 성과를 올리면 심사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테니 말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의 규모가 너무 크다.

현재 홋카이도 지부와 유주노사할린스크 지부 소속의 마녀를 전부 합쳐도 서른 남짓.

그 중 대마녀 이상은 엘로아와 린네를 포함해도 넷뿐이다.

게헨나나 여타 위치포인트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는 한 토벌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역사가 증명하듯 그저 인간의 위기일 뿐이라면 마녀는 쉽게 단합하지 않는다.

게헨나 측에 협조 공문을 보낸 지 2시간이나 지났지만 아직 확실한 답변이 없다는 게 그 증거다.

추방자 면책권과 긴급 예산으로 편성된 현상금을 미끼로 위치포인트의 마녀들을 모집 중이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선택지가 강요된다.

충분한 전력이 모일 때까지 군단의 상륙을 방치, 인간의 희생을 감수하여 보다 만전을 기한 상태로 맞부딪치느냐.

현재 소집된 마녀들로 동해 상에서 저지하며 차차 추가될 지원을 기다리느냐.

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많은 인간이 희생될 것이다.

특히나 군단의 첫 번째 상륙 예측 지점은 한국.

국토 20%에 인구 과반수가 몰려 사는 기형적인 구조는 필연적으로 큰 피해를 낳을 것이다.

“보고입니다! 군단이 사할린 섬 남부를 빠르게 지나쳐 동해상에 진입. 남하하고 있습니다!”

예측보다도 훨씬 빠르게 악화되는 상황에 엘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2.

알차디알찬 파워업 이벤트 2주째.

오전에는 영혼의 마녀 그레텔을 찾아가 체내의 ‘문’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점심 무렵부터는 수아 선생에게 대괴수전 수련을 받았다.

스승님의 적극 추천인지라 기대는 했지만 수아 선생의 가르침은 기대 이상이었다.

축적된 노하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같은 시점에서 바라봐주기에 이해가 쉽다고 해야할지.

물론 스승님의 가르침이 별로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뭐든지 너무 쉽게 쓱쓱 해낸 이후 ‘따라해 보겠나?’라고 말씀하시는 스승님과,

‘어떤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고 계신지 알겠사와요. 이렇게 해보시겠사옵니까?’라는 섬세한 코칭과 이론을 곁들이는 수아 선생은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간 정체되었던 성장이 하루하루 체감이 될 정도로 느껴졌으니 말 다했지.

그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확실히 기술명을 만들어 놓는 게 편하네요.”

“그렇사와요, 일견 경박해 보이나 중요한 일이지요. 마법이란 곧 심상의 풍경을 구현하는 일. 기술을 명명하는 건 정형화와 체계화, 그리고 심상 강화의 일환이니 말이옵니다.”

이제껏 얼추, 느낌대로, 손 가는 대로 마법을 배합해 사용하던 시우다.

그만큼 유연한 활용이 가능했지만, 체계화된 느낌은 부족했다.

수아 선생은 즉흥곡에 가까운 시우의 마법을 정돈하는 과정을 도왔다.

네이밍 센스가 최악에 가까운 시우 대신 기술마다 훌륭하고도 멋진 이름을 붙여준 건 덤이다.

“오늘도 고생하셨사와요.”

“많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해산.

오늘도 보람찬 하루를 보냈구나 자화자찬하며 간만에 샤론과 후끈후끈한 시간 보내기.

가볍게 몸을 씻고 어떤 쿠션보다 부드러운 샤론의 알몸을 껴안은 채 잠을 자던 때였다.

-똑똑똑

급박한 노크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우음…. 뭐야?”

“글쎄, 누구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샤론도 간밤의 운동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탁상 위의 시계가 오전 4시를 가리키고 있다.

갑자기 손님이 찾아오기엔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대충 속옷과 가운만 걸치고 거실 쪽으로 나온 샤론과 시우.

“시우 공.”

문 너머로 들리는 수아 선생의 목소리에 샤론이 잠이 확 달아난 시선을 시우에게 향한다.

“시우야?”

언제나 반짝이던 눈동자가 불투명해져서 굉장히 무섭다.

이 야심한 밤 시우의 방으로 따로 찾아온 수아 선생을 보며 묘한 오해를 한 모양.

전과가 꽤 여럿인지라 억울해할 수도 없다.

“아니야, 왜 오셨는지 나도 몰라.”

황급히 해명하고 우선 문을 열었다.

“이른 시각 실례했삽…!”

문을 열기 무섭게 와르르 본론을 쏟아낼 낌새이던 수아 선생님이 우뚝 굳는다.

만월처럼 휘둥그렇게 변한 눈이 가운차림의 시우와 샤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시우의 여성편력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무 때나 연락 없이 찾아온다면 ‘다른 연인이 함께 있을 수 있다’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떠올리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저, 그….”

사람마다 민망함을 느낄 때의 반응이 다르다.

수아 선생의 경우 두 귀가 불에 댄 듯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타입이었다.

“죄송합니다. 옷을 좀 갖춰 입을 걸 그랬네요.”

“아니어요. 불쑥 찾아온 소녀의 탓이옵니다….”

상황이 급해보여서 문을 열긴 열었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차려입을 걸 그랬다.

살짝 어색한 분위기.

하지만 수아 선생은 금방 평정을 찾고 본론을 밝혔다.

“현세가 위험하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풋풋했던 에피소드 따위는 가볍게 잊게 할 만큼 무겁고 중대한 사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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