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7 - #193_수아 선생(4)
#881
1.
얼마 전 도로시가 메모리얼 스톤으로부터 추출한 영상.
확실치 않았던 진위여부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진상을 드러내었다.
호문쿨루스는 인간의 영과 혼, 그리고 인연을 먹어치우며 힘을 얻는다.
급수가 떨어지는 것들은 직접 결계를 펼쳐 사냥하지만, 커다란 놈들은 대규모의 재해를 일으킨다.
괴수의 왕과 그 주위의 네임드들은 역사상 최초의 호문쿨루스 군단이 한 지역에 머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러시아가 불러온 전화의 불길이 여전히 현세의 정세를 어지럽히고 있는 지금.
연말을 코앞에 둔 남미 대륙은 연쇄적인 재앙에 시달렸다.
브라질 북부 지역에 위치한 이과수 주는 파괴적인 홍수를 맞이했다.
수일 내리 열대우림의 수용치를 초과해 퍼부은 비는 수만 명의 재해민과 전염병, 사상자를 낳았다.
페루 중남부의 후안쿠아에서는 전조 없는 대규모 산사태가 일어났다.
인근 온천에서 휴양을 즐기러 온 사람과 지역 주민 약 2만 명이 간밤에 무너져내린 토류에 휘말려 일시에 유명을 달리했다.
콜롬비아의 중심 지역에 위치한 군다코스 주에서는 대규모의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진화에 나섰지만 좁고 밀집된 도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화재는 전례 없는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남기며 1주일이 지난 이후까지도 여전히 진화작업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세 번째로 큰 항구도시이자 중남미 최대의 교역항구 로사리오에선 난데없는 진도 8.0에 달하는 대규모 지진이 일어났다.
건물과 도로 인프라를 파괴하며 절망을 안겨준 지진은 거대한 쓰나미로 수 배가 넘는 피해를 끼치고서야 잦아들었다.
“이상이 티페레트 공으로부터의 보고이옵니다.”
수아는 담담히 알비레오에게 보고서를 건넸다.
알비레오 백작은 게헨나 마녀치고는 드물게 현세에 안정에 큰 관심을 두는 마녀.
매년 적잖은 액수를 위치포인트에 기부하고 있다.
“하아, 정말…. 세상이 망할 때가 됐나 보네요. 헥센나흐트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나요? 남미와 중남미라면 그 치들 사업터 일 텐데.”
알비레오는 곤혹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제머나이 백작가의 재산은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만 해도 조 단위.
설령 현세의 모든 사업처가 망해도 후대의 후대의 후대까지 돈을 펑펑 쓰며 마법 연구를 할만큼의 여력이 있다.
라티푼티움의 마법 작물 재배 사업이나 게헨나 내 마도구 사업도 굳건하고 말이다.
그러나 적잖은 시간 노력을 쏟아부은 결과물의 토대가 흔들린다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지금은 괴수 군단의 활동처가 남미로 제한되지만, 다음 타겟이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다.
“아직 대대적인 대처를 보이고 있지는 않사와요.”
“차라리 어디 남극이나 북극이라면 손이라도 써볼 텐데 하필이면 남미 지역이라니….”
“구도의 마녀가 정보 수집 및 대책 마련을 위해 남미로 향했다고 하옵니다. 부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를 바라야겠지요.”
“그렇네요…. 뭐, 머리 아픈 얘기는 이 정도로 할까요?”
씁쓸한 이야기의 뒷맛을 와인으로 씻어낸 알비레오는 반듯한 자세로 앉아 차를 마시는 수아 선생을 보았다.
“시우 군은 어떻던가요? 벌써 사흘이나 맡아 주셨는데.”
“엘로아 공께서 호언장담하신 대로 굉장한 인재이옵니다. 소녀가 가르쳐 본 어떤 마녀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사와요.”
“수아 선생의 가르침이라면, 대 괴수전 마법이었죠?”
“예, 아울러 시우 공의 마법 활용이 임기응변에 치우쳤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형화하여 다듬는 작업을 돕고 있사옵니다. 헌데 그 속도가 비범하여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사와요.”
“흐음, 다행이네요.”
“시우 공을 무척 아끼시는 게 눈에 선하옵니다.”
“누가요? 제가요? 시우 군을요?”
“네.”
입가를 쓰다듬은 알비레오는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발견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시우 군 때문에 가슴에 박은 대못만 해도…. 어휴.”
미워도 사위라고 온갖 마음고생에 골머리까지 썩힌 시우지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으쓱해진다.
나이를 먹으면서 주책이라도 는 걸까?
“소녀, 한가지 여쭈어도 괜찮은지요?”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시우 공이 알비레오 경을 염려케 한 부분이 남녀관계이옵니까?”
알비레오는 위가 찡하고 울리는 걸 느꼈다.
지금은 정리됐다고 하지만 행여나 데네브와 시우의 관계가 수아의 눈에 들어온 건 아닐지, 반사적으로 식겁한 것이다.
“그렇긴 한데….”
“소녀 역시 염려를 표하는 부분이어요. 크고 단 참외는 없다 하오나 그 외의 부분은 전도유망하고 참으로 바른 청년이온데….”
“수아 선생….”
“인연의 맺고 끊음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며 애정 또한 외부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니 소녀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사오나 염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사와요.”
“…….”
갑자기 뚝 끊긴 대화에 수아는 살짝 당황해 알비레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가 오딜과 오데트의 스승이며, 이 문제에 대해 수아보다 깊게 고민하고 있는 당사자일 수 있음을 떠올렸다.
“송구하옵니다. 소녀가 천지분간 못 한 실언을….”
그러나 알비레오의 침묵은 불쾌함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녀가 입을 꾹 다문 건 이번엔 위가 아닌 눈시울이 찡하고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죠? 수아 선생이 봐도 그런 거 맞죠?”
“예, 예?”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엉덩이를 발사해 수아의 손을 덥썩 잡는 알비레오.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당최 무슨 말씀이오신지….”
“그러니까, 보통은 여자친구 그렇게 만드는 건 이상한 거죠?”
“예? 예?”
부서지라 손을 잡는 것도 모자라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알비레오.
연극의 한 장면 같은 극적인 반응에 영문을 알 수 없던 수아지만 알비레오가 느끼는 감정은 그리 단순한 게 아니었다.
툭하면 사라지고, 납치되고, 죽을 뻔하고.
그보다 무시무시하게도 그럴 때마다 여자친구를 하나씩 만들어오던 사위.
그런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고 심지어 총명한 여동생마저 마성의 흐름에 말려들자 알비레오는 제 상식을 의심하기 이르렀다.
그도 그럴게 만찬에 참석하는 인원 중 알비레오를 제외하면 그와 동침 않았던 여자가 한 명도, 단 한 명도 없게 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외눈박이 마을의 두눈박이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등장한 상식적인 반응, 두눈박이 사람.
이 어찌 반갑지 않을까?
“역시 지혜롭기로 명망 높으신 수아 선생이에요. 암요, 암요.”
“아, 알비레오 경 체통을….”
언제나 점잖은 모습만 보아왔던 백작의 급격한 감정변화에 수아 선생은 슬금슬금 손을 빼고 싶어졌다.
2.
이번 작전은 극비였다.
신시우를 탈취하는 과정에서 이미 크게 자극받은 헥센나흐트다.
배신자 도로시가 게헨나 측 작전의 일환으로 그들의 앞마당을 밟았다는 걸 알면 냉전을 깨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다.
스파이의 염탐 행위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기에 헥센나흐트의 분위기는 이미 한번 뒤집어 놓은 벌통 수준으로 흉흉했으니 말이다.
당장 헥센나흐트와 전면전을 벌이는 시기상조라는 게헨나의 총의 아래 작전 도중 발각된다면 도로시의 단독행동으로 공표되게 되어있었다.
협상이나 포로교환 따위는 꿈도 꿀 수 없다는 말.
예상했던 일이고, 감안할 일이다.
따라서 도로시가 정찰 목적지인 콜롬비아로 향하기 위해 근처 카리브 제도에 도착하기까진 이틀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때로는 항공로로 때로는 육로로 때로는 해로로 혹시 모를 감시의 눈길을 따돌리기 위해 은밀히 행동하느라 제법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먼저 도미니카 공화국 인근 제 소유의 섬에 도착한 도로시는 무사한 별장을 보고 안도했다.
“다행히 멀쩡하네~”
도로시의 배신이 알려지고 난 이후 사업 역시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분산해 숨겨두었던 창고가 습격을 받는가 하면 전 세계 각지에 숨겨둔 은신처 또한 타격을 입었다.
헥센나흐트 나름의 보복행위에 들어간 것이다.
만약 사업을 접는 도중이 아니었다면 깨나 피눈물 흘렸으리라.
불행 중 다행으로 도로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이 별장만큼은 무사했던 모양.
-띡 띡띡띡
사무실에 들자마자 무거워 보이는 전화기를 들어 올린 도로시.
위성을 활용해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송수신이 가능한 위성전화다.
별자리의 위치를 이용한다면 대륙 간 원거리 통신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되려 마법이기에 감시될 가능성이 있다.
차라리 과학기술을 이용하는 게 마음 편했다.
[티페레트 일세]
“응, 공작님. 나 도착했어.”
[특별한 문제는 없었나?]
“꿈꿈한 짐칸에 몸 구겨 넣느라 고생도 좀 했지만~ 무사해. 내일 중으로 카르타헤나를 거쳐 콜롬비아 측으로 밀입국할 것 같아.”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게나]
“이 정도는 위험해야~ 우리 달링이 날 더 예뻐해 주지.”
장난스레 받아치자 쓴웃음 섞인 호흡이 수화기 너머에서 귀를 간질였다.
[알고 있겠지만 구태여 당부하겠네.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게]
“걱정 고마워. 당연~히 그럴 생각이야.”
위험도를 가늠할 수 없는 괴수의 왕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만한 네임드 호문쿨루스를 홀로 감당하는 건 무리다.
최대한 은밀히 실속만 쏙쏙 빼먹는 게 이번 작전의 요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고맙네]
“공작님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무서운 티페레트 공작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공적은 내가 처음이 아닐까?”
[그도 그렇군]
“무사히 돌아가면 나도 멋진 위스키 많이 맛보여 줄 거지?”
[물론이네, 내 한턱 내지]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통신을 끊었다.
해변을 향해 나 있는 통유리창으론 신이 세상을 창조할 때 조금 더 공을 들였을 법한 아름다운 백사장이 보인다.
끝을 모르고 둥글게 펼쳐진 수평선은 서서히 저무는 석양빛에 불붙은 벌판처럼 변하고 있었다.
“나중에 달링이랑 같이 오고 싶네~”
지금은 제법 익숙해진 풍광이지만 언젠가 시우와 함께 이 일몰을 보고 싶었다.
당장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한참 이후를 기약해야 할성싶지만 말이다.
그때.
-삐빅 삐빅 삐빅
조금 전 내려놓았던 위성 전화에서 건조한 비프음이 울렸다.
발신처는 도로시의 부하 중 한명.
남미 측 거래를 도맡던 추방자 출신 마녀 살로메다.
도로시는 무책임한 상관이 아닌지라 헥센나흐트를 배반했을 시 그녀의 부하들에게도 보복이 돌아갈 걸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비상연락망을 통해 각기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것을 통보해 놨을 텐데….
하필이면 별장에 당도하자마자 연락이라니.
타이밍이 지나치게 공교롭다.
-삐빅 삐빅
어쩌면 살로메는 이미 붙잡혔고, 도로시의 위치를 특정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각 은신처에 연락을 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
예전이라면 받지 않았을 전화였다.
살로메와 도로시는 비지니스 관계로 얽힌 보스와 부하직원일 뿐이니까.
그러나 한참을 고민하던 도로시는 수화기를 쥐어들었다.
[도로시 님,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야?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뒤가 구린 함정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꽉 막힌 울음이 터지는 듯한 목소리.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은 살로메의 음색에 도로시의 눈매가 서늘한 안광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