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85화 (891/917)

Chapter 885 - #193_수아 선생(2)

#879

1.

첫날인 만큼 무리하지 않은 선에서 끝난 수련.

여기엔 시우의 능력이 수아의 예상을 아득히 웃돌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대 괴수전 커리큘럼을 새로이 짜야 했으니 말이다.

앞으로 약 한 달간 제머나이 저택의 손님으로 머물며 시우에게 가르침을 주기로 한 만큼 수아 선생 역시 만찬에 초대되었다.

“일전에 도와주셨던 점에 대해선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표하옵니다.”

“아니에요,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되어야죠.”

“현세의 불안정함은 게헨나에도 영향을 끼치니까요.”

그 옆에서는 르뤼에가 유달리 딱딱한 몸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다.

“…….”

물론 르뤼에도 선대로부터 엄격한 예법을 교육받은 지라 시우처럼 식사 예절을 지적받는 일은 없었다.

어딘가 대충대충 슬렁슬렁 이어도 묘한 곳에서 품위를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완전 FM이라고 해야 할까?

비교적 느슨한 분위기의 만찬임에도 동작 하나하나가 칼각이다.

“뭐야? 무슨 일 있어?”

“새처럼 깨작깨작 엄청 얌전하게 먹네.”

그런 르뤼에를 수상쩍게 바라보며 툭 말을 던지는 쌍둥이.

성격이 꼬여서라기보다는 르뤼에의 반응이 찰지기 때문에 오딜과 오데트는 툭툭 던지는 시비조로 말을 걸곤 했다.

르뤼에는 다혈질인데다가 뒤끝도 오래가지 않아서 놀려먹기엔 딱 좋은 친구니 말이다.

평상시였다면 큰 장모님의 눈썹이 꿈틀거릴 데시벨까지 언성을 높일 르뤼에지만 오늘은 달랐다.

“으음.”

아주 세심하게 손끝으로 냅킨을 들어 입가를 쓱 닦는 르뤼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도다. 짐은 언제나 이렇듯 예법에 충실히 식사를 하니라.”

“목소리 뭐야.”

“느끼해.”

“후후, 일개 견습마녀로선 짐의 품격을 이해하기 어려운가 보구나. 이해하니라. 이해하고말고.”

“…….”

“식사들마저 하거라.”

평소와는 지나치게 다른 르뤼에의 모습에 ‘뭔가 잘못 주워 먹었나?’라는 시선을 교환하는 쌍둥이.

아무래도 르뤼에는 수아 선생님의 성왕론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뭐, 시우가 짐작하길 저 컨셉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지켜보기만 해도 재밌는 쌍둥이와 르뤼에의 꽁트가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금 이 자리가 상상 이상의 가시방석인 까닭이었다.

식사 도중엔 어지간하면 입을 열지 않는 아멜리아가 슬며시 물었다.

“…시우,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표정이 좋지 않아요.”

“정말 괜찮아요. 입맛이 좀 없네요.”

“입맛이 없으면 안 되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상상 이상의 원숙함을 선보이며 르뤼에를 격침한 수아 선생님.

따라서 현시점 시우의 다중 연인 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스승님께서 수아 선생에게 사실을 밝혔는지조차 미지수이지만 자연스레 털어놓을 타이밍을 완벽히 놓치고 만 것이다.

차라리 제 입으로 말하면 말했지 애써 감추는 기색을 보이다 들킨다면 최악 중 최악이다.

그렇다고 장모님도 모인 이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또 조금….

“시우야, 입맛 좋아지는 방법 알려줄까?”

골머리를 앓는 시우의 어깨에 쓰윽 속삭이는 건 최근 21 위계로 도약하며 자신감 뿜뿜 버전이 된 샤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궁상맞은 샤론은 잊어도 좋다.

최근 텐션과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샤론은 과감하고 도발적이다.

더불어 그녀답지 않게 무서울 정도로 주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이른바 갓 위계가 상승한 마녀 특유의 신드롬을 겪고 있는 것이다.

마녀에게 위계 상승이란 슈퍼볼 1등 당첨, 노벨상 수상, 전 서버 랭킹 1위 달성 급 성취감을 안겨주는 대사건이니 그럴 만도 하다.

즉, 이 타이밍에 나올 대사라 함은….

“내가 이따 방에서 어어엄청 맛있는 거 줄 수 있는데. 후후…우웁…?”

“샤론 이거 먹어봐. 맛있다.”

행여 수아 선생님의 귀에 들릴까 샤론의 입을 재빨리 아스파라거스로 채워주었다.

“우물…. 우물…. 입맛 없다며… 아웁….”

“응, 마음껏 먹어. 더 먹어.”

“너, 너무 빠른데…. 움, 움…!”

갑작스런 공세에 의아해하면서도 열심히 시우가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는 샤론이다.

“조수님! 나도 아…!”

“조수님 저도 먹여주세요…!”

아수라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우의 입막음을 애정행각쯤으로 착각한 쌍둥이가 먹이를 조르는 새끼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재잘거리는 것이다.

“하….”

시우는 줄지어 이어지는 해프닝에 식은땀을 훔쳤다.

이미 주변 지인 중 시우가 난봉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적다.

호화로운 연인군단을 꾸리고 있으니 따가운 눈총 정도는 업보려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새삼 왜 이렇게 찔리고 진땀이 날까?

곱씹어보면 이유는 단순하다.

수아 선생님은 스승님의 친우.

조금 현대적인 감상으로 말하자면 영혼의 베스트 프렌드 되신다.

여자친구의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건 남자로서 당연한 마음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겉보기로 판단하는 건 대단하나 실례지만 수아 선생님은 복식부터가 유교걸, 외견부터가 규중처녀, 분위기는 인자한 훈장님이다.

어떤가?

절대로 일부다처제 따윈 용납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지 않는가?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겠다는 포부는 머나먼 도전과제로만 보였다.

“…….”

한편.

수아는 제머나이 백작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곁눈질로 식탁의 분위기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마녀로서의 삶과 한국의 수호신으로서의 삶을 살아오던 수아 선생인 만큼 연애 경력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연륜이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 또한 감지하게 하기 마련이며, 그렇기에 위화감을 느꼈다.

분분한 낙화 섞인 봄바람이 살랑살랑 이는 듯한 기류.

콕 찍어 말할 순 없지만 달콤하고 풋풋한 봄바람의 중심이 되는 건 분명 신시우다.

“……?”

이는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동시에 잘못된 일이었다.

수아 선생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신시우는 엘로아와 연인 관계일 것이다.

그런데 다른 여성 진과 묘한 감정 기류, 최근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썸씽’이 느껴진다니.

아멜리아는 몰라도 샤론과 쌍둥이가 시우와 어떻게 엮였는지 알고 있다.

쌍둥이 견습마녀의 경우 노예 시절 신시우가 기지를 발휘해 살려주었고, 샤론 에버그린은 현세 시절 함께 지내며 동고동락했던 친구랬지.

특히 샤론 쪽은 과거 동거까지 했다하니 둘의 관계를 짐작함직 하다.

엘로아는 그런 경쟁자들을 이겨내고 당당히 연인 관계로 거듭난 것이고 말이다.

“헤, 시우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다.”

“…….”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우물우물 시우가 준 채소를 받아먹는 샤론을 보자 재차 혼란스러워졌다.

서로 음식을 먹여주는 행위.

저건 대표적인 애정행각이 아니던가?

수아는 자신이 꽉 막힌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결혼제도와 연애관에 대해서는 신여성에 가깝다고 자부 중이다.

무려 자유연애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혼전 성관계마저 용인할 정도다.

성을 터부시하는 건 변질된 유교적 정통에 한정된 담론이니 말이다.

“샤론, 이제 너가 먹어.”

“아앙, 더 먹을래 응?”

그런데 찰싹 달라붙어 시쳇말로 여우짓을 하는 샤론과 그런 샤론을 단호히 내치지 않는 시우의 모습은 몹시도 불건전해 보였다.

2.

식사 이후.

수아는 식당을 나서는 시우에게 따라붙었다.

“시우 공, 소녀에게 차 한 잔 대접해주실 수 있사옵니까?”

“물론이죠.”

오늘 보았던 시우와 샤론의 애정행각에 악의가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허나 사리분별을 하지 못한 채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면 에두른 가르침이 필요하다.

누가 뭐래도 엘로아는 수아 선생의 가장 친한 친구고, 신시우는 그녀의 남자친구이니 말이다.

“시우 공께서는 엘로아 공과 연인 관계 되시지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조심스레 접근했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결례가 될 질문인지도 모르오니 미리 실례하겠사옵니다.”

“네?”

“식사 자리에서 시우 공과 샤론 양의 모습을 살펴보았사옵니다.”

운을 띄우자마자 곧장 시우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수아는 추측을 슬며시 확신으로 굳히며 입을 열었다.

“소녀는 경험이 없사오나 옛 현인들이 이르길 남녀의 사랑은 정서전면(情緖纏綿)하여 깊게 감기면 쉬이 떨어지기 어렵다 하였습니다. 옛 인연이라 한들 없던 일로 되돌리기란 쉽지 않겠지요.”

“…….”

“하오나 시우 공께서는 엘로아 공과 연인 관계라 하셨사옵니다. 이는 곧 남녀유별을 확실히 하여 사소한 오해마저 남기지 않게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 사료되옵니다만….”

수아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린 건 그가 예상 이상으로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어, 이걸… 그….”

‘여자친구도 있으니 여사친이나 전여친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호 간 예의 아닐까요?’라는 수아의 말에 어쩔 줄 몰라하는 시우의 모습.

“……?”

미혹이 싹튼다.

수아가 만찬에서 느낀 게 그저 착각, 혹은 미묘한 기류 수준이라면 이토록 어려워할 일이 아니다.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한마디면 깔끔하게 털어낼 수 있는 지적이었다.

헌데 이 반응은 무엇이냐는 말이다.

“후우, 죄송합니다. 사실 말씀 드리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습니다.”

“시우 공?”

설마?

정말로?

이미 반려를 두고 있음에도 과거의 연인을 잊지 못하고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걸까?

그것도 엘로아가 현세에서 고군분투하여 안채를 비운 동안?

그건 외도다.

바람이다.

신여성 수아 아가사도 받아들이기 힘든 만행이다.

수아의 가지런한 눈썹이 높게 치솟으려던 그때.

“저는 연인이 많습니다. 네, 그렇게 됐습니다.”

시우의 선언에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은 수아 선생은 해독기도 없이 암호 평문을 들은 것처럼 한참이나 눈을 끔뻑였다.

“시우 공, 소녀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 주시겠사와요?”

“넵.”

“해당 발언은 외도를 인정하시는 것이옵니까?”

“아, 아뇨…. 그게 아닙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어찌 이런 일이…. 엘로아 공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지온데 어찌 그런 후안무치한….”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설명해 드릴 테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혼비백산하여 손을 달달 떠는 수아 선생을 보며 시우는 황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하여 밝혀진 전말.

신시우는 연인이 정말로 많았다.

수아 선생의 짐작대로 샤론이 있었고, 메리골드 전 남작이 있었으며 심지어 아직 견습마녀인 쌍둥이도 포함되었다.

오늘 저녁 만났던 심해의 마녀 역시 예외 없었다.

그러나 그의 여성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얼마 전 신설된 홋카이도 지부로 파견된 검의 마녀와 구도의 마녀 역시 그의 연인이란다.

단순히 머릿수로만 따져도 8명.

삼처사첩을 가져다 붙이려 해도 한자리를 더 준비해야 한다.

‘그나마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니 다행이다’라고 여길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사람, 맞으신지요?”

공적, 견습마녀, 성숙한 마녀, 아직 어린 마녀를 아우르는 폭넓은 스펙트럼.

방종의 끝을 마주한 수아 선생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코스믹 호러를 더한 수준의 혼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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