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3 - #192_괴수의 왕(4)
#877
1.
위치포인트의 서울 지부장, 수아 선생의 합류는 예정보다 한참 미뤄진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뵙사옵니다. 신시우 공. 업무가 많아 입국이 지연된 점 사과드리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정중한 몸가짐으로 고개를 숙이는 수아 선생.
현세에 있을 때에도 그다지 접점은 없었지만 적어도 외견 상 그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트레이드 마크 격인 한복이라던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청초함을 뽐내는 한 떨기의 난 같은 분위기라던가.
마치 동양의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듯한 고운 눈썹과 둥근 이마라던가.
1인칭이 ‘소녀’라던가.
또 사극에 나올 법한 특이한 말투라던가 말이다.
옵니다 뿐 아니라 드문드문 와요 체를 사용하는데 아직 기준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수아 선생은 시우가 아는 한 가장 예스러운 마녀 중 하나이다.
스승님이 견습마녀이실 적부터 마녀였다 하니 실제 나이도 대단히 많은 편에 속한다고.
“우선 머무실 곳부터 소개해 드릴게요.”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와요.”
출입국 사무소에서 수아 선생을 마중한 이후 저택을 소개하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다양한 주제로 말을 나누며 다시 한번 느낀 건데, 수아 선생은 굉장히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한참이나 웃어른 같다고 해야 할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극존칭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설교를 듣는 듯한 기분이 강하게 든다.
“얼마나 머무실 건가요?”
“보름 정도 일정으로 잡고 있사옵니다.”
“현세가 많이 어지럽다고 들었는데…. 괜찮은 건가요?”
“오랜 친우의 부탁인데 발 벗고 나서야지요. 시우 공께서는 염려치 않으셔도 괜찮사와요. 게다가….”
잠깐 멈춰선 수아 선생이 반듯이 시선을 던졌다.
“시우 공께 많은 은혜를 입었사오니 소녀가 이렇게나마 결초보은할 수 있게 된 점에 감사하는 마음이옵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니옵니다. 티페레트 경이 시우 공을 만난 이후 참으로 상태가 호전되었지요.”
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은 있다.
시우가 엘로아를 만난 시점은 그녀가 가장 힘들어하던 시기.
실제로 처음 만났을 당시 스승님은 너무 날카롭게 벼려진 검처럼 위태로운 기색이 만연했다.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지만 반대로 너무나 쉽게 부서질 것 같은 분위기였지.
함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그녀가 웃는 모습도 행복해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다.
연인으로 거듭난 이후엔 단순히 사제 관계를 넘어 미래를 함께 걸어가는 반려가 되었다…만.
“티페레트 경이 이토록 행복해하시는 모습은 그날의 사고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말이옵니다.”
“커흠.”
괜스레 찔린다.
어느 부분이 찔리느냐 하면 당연히 엘로아와 시우가 일반적인 사제관계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마녀 사회에서 사제 관계는 일반적으로 부모·자식 관계와 동치 한다.
실제로 스승님 당신부터가 본디 임시 제자 시우와의 관계를 죄악시하셨다.
그렇다면 스승님보다 훨씬 옛사람일 것 같은, 그것도 엄청엄청 깐깐하게 예법을 고수할 것 같은 수아 선생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애초에 엘로아의 시우가 연인 관계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걸까?
“후후, 너무 염려치 마시와요. 보기와는 다르게 소녀는 그리 꽉 막힌 인물이 아니옵니다.”
“…제가 표정 관리를 어지간히 못 하나 보네요.”
어제 영혼의 마녀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수많은 사례가 증명한다고 해야 하나.
지금까지는 연륜이 부족해 포커페이스가 읽힌다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연기력이 영 꽝일지도 모르겠다.
“표리부동한 이는 신뢰할 수 없는 자이지요. 두 분의 조운모우(朝雲暮雨)한 청연(淸緣)에 관하여선 언질 받았사옵니다.”
“아하…. 그러시군요.”
처음 들어보는 말이 많아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다행히 설명 및 변명할 일이 줄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생겨나는 추가 의문점.
과연 스승님께서 다른 연인 관계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만약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어떤 면에서는 스승님 이상으로 엄격해 보이는 수아 선생님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인가?
굳이 이해받을 필요 있나 싶지만, 스승님의 막역한 친우에게 난봉꾼 취급을 받게 된다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저….”
“지연된 만큼 바로 수련을 시작하려 하온데. 준비되셨사옵니까?”
가능한 허심탄회하게 말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긴 한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눈치를 보고 있자니 어느덧 호수를 끼고 있는 널따란 공터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네, 좋습니다.”
수아 선생이 엘로아의 부탁을 받고 게헨나로 향한 건 시우의 수련을 돕기 위해서였다.
불길한 예언을 받게 된 만큼 만전의 상태로 실력을 갈고닦기 위함이다.
물론 수아 선생이 스승님보다 강한 건 아니다.
위계만 보더라도 2단계나 차이가 나니 말이다.
그러나 게임 코치가 현역 프로게이머보다 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듯, 본인의 역량이 뛰어난 것과 남에게 잘 가르쳐주는 건 별개의 영역에 있다.
광화문 지부의 마녀나 스승님마저 그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니 그런 의미에서 수아 아가사는 1타 강사라고 말할 수 있는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의 수련인가요?”
“소녀가 티페레트 공께 언질 받은 부분은 대 괴수전이었사옵니다.”
“오. 좋네요.”
시우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다니 역시 스승님답다.
실제로 어항에 잡혀가 크라켄과 대적했을 때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있다.
최대화력인 붉은가지를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한들 체급과 그 체급에서 기인한 무지막지한 마력 양을 자랑하는 괴수에게 시우의 공격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소녀가 듣기로는 대마녀전에 특화된 수련을 해오셨다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런데 대 괴수전.... 그게 수련이 가능한 건가요?”
“물론이옵니다.”
수아 지부장은 싱긋 웃더니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품이 넓은 그녀의 소맷자락에서 나온 건 물푸레나무의 곧은 가지를 다듬고 종이를 부슬부슬하게 오려내 붙인 신장대.
외견상으로는 먼지떨이를 닮았으나 끝 부분에 방울이 달려 예식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무구(巫具)였다.
“먼저 실력을 확인하겠사와요. 소녀가 결계를 펼칠 터이니 놀라지 마시옵길.”
“옙.”
“그럼…. 북궁(北宮)의 문을 닫아라.”
아마도 예장으로 추정되는 신장대를 휘두르자 방울 소리와 함께 짙은 운무가 사위를 휘감는다.
일전에는 시우와 엘로아는 배수터널, 수아 선생은 외부의 결계를 도맡았기에 그녀의 실력을 직접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의 수호신이라고도 불리는 수아 선생은 칭호에 걸맞게 정순하고도 깊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짐작하자면 21위계 혹은 22 위계의 언저리.
이면결계가 펼쳐지며 주위의 풍경이 뒤바뀐다.
도로시가 강림시키는 ‘예배당’과 마찬가지로 상징을 부여하여 현세에 현현하는 결계였다.
흐릿했던 나무의 형체가 푸르디푸른 소나무로 변모하여 공터를 둥글게 감싸고, 나무와 나무 사이엔 하얀 천으로 만든 띠가 고리를 이루며 주르륵 이어 선다.
외형답게 동양풍 느낌이 물씬 나는 마법이다.
“소녀의 일천한 재주로 솜씨를 살펴두고자 하옵니다. 경강적룡(京江赤龍)을 불러낼 터이니 바라는 대로 천무를 뽐내어주시길.”
“알겠습니다.”
“남궁의 문을 열어라.”
재차 펼쳐진 영창과 함께 공터 한가운데 거대한 나무문이 솟았다.
경문이 적힌 노란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것도 모자라 사슬로 칭칭 감겨있던 문이 활짝 열리자 그 안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내는 사역마.
-후우우우우….
맹금류의 것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발과 사슴의 뿔, 사자의 갈기.
긴 수염이 돋은 커다란 주둥이 사이로 여의주를 물고, 붉은 비늘이 온몸을 빼곡히 덮고 있다.
별이 그려진 구슬을 7개 모아가면 소원을 들어줄 것 같은 신성함이 생생하게 일렁인다.
결계를 굉장히 넓게 펼치기에 의아했는데 사역마의 사이즈를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라켄라켄이 그랬듯 생명체라기보단 지형에 가까운 생명체다.
몸에 칭칭 얽혀 있는 쇠사슬의 크기만 해도 어지간한 대형 버스 수준의 굵기였다.
들숨과 날숨은 돌풍이 되고, 한번 몸을 비틀면 강을 범람시킬 만큼이나 우람한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다.
“어…. 이거랑 싸우는 건가요?”
“그렇사와요.”
“괜찮을까요?”
르뤼에의 소중한 외무대신 라켄라켄을 토벌해버린 전과가 있는 시우다.
수련을 도와준다고 나선 수아 선생의 사역마를 자칫 다치게 해버린다면 죄송할 것 같기에 물었다.
“문제없사와요. 신수(神獸)의 심상을 현현한 환영체에 불과하옵니다.”
“그런 것치고는 생생하네요. 우선 알겠습니다.”
검은 갑주로 전신을 휘감고 창을 꼬나 쥔다.
갑주의 허리 틈새로 직조한 리본의 끄트머리를 술처럼 배치하고 머리 위로는 언제든 활성화할 수 있게 천사의 고리의 형태를 닦아놓는다.
이제는 익숙해지다 못해 오소독스로 자리 잡은 전투 폼.
전후좌우로 넓게 펴진 기감과 감각은 평소보다 수십 배는 민감하게 주위의 변화를 받아들인다.
지금의 시우라면 눈을 감고도 기관총 세례를 탄환 하나하나 양단해 낼 수 있었다.
“피어라.”
확실히 일전 어항에서 크라켄과의 전투를 복기할 때 아쉬운 점이 눈에 밟혔다.
붉은가지가 없던 것도 그랬고, 도로시의 천사의 고리가 없었던 것도 그랬다.
만약 지금 크라켄과 다시 맞붙는다면 ‘그 체급과 재생력을 능가하여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을까’가 언제나 궁금했던 것이다.
당장은 붉은 눈동자로 시우를 말가니 바라보기만 할 뿐 적의를 내비치지 않는 적룡.
모든 것을 쏟아 붓기엔 적당한 샌드백이다.
“후으으읍….”
호흡을 들이쉰다.
마력을 증폭하고 증폭한 마력을 다시 증폭하는 시우의 특기 중 하나 거듭 증폭.
그렇게 증폭한 마력을 천사의 고리로 3차 4차 증폭한다.
지금껏 전투로 부터 얻어낸 경험을 그러모았다.
이제껏 시우의 필살기라 함은 극점에 힘을 모아 쏘아낼 뿐이었던 투창.
그러나 그것은 ‘왜곡장’이라는 부담을 오랫동안 짊어질 수 없기에 고안한 임시변통이었다.
붉은가지에 대한 통제력이 늘어난 지금 새로운 형식을 떠올린다.
“하압!”
기합과 함께 발이 단단한 지면을 파고든다.
거대한 마력을 온전히 분배받은 붉은창이 왜곡장을 줄기줄기 뿜으며 비명을 지른다.
그 왜곡장을 역장과 섞어 만들어낸 굴곡 면을 통해 영체에 부담이 오지 않게 흩어내며 힘은 중앙으로 모은다.
저만한 중량의 생명체를 일격에 격파하는 건 불가능.
더군다나 아직 시우에겐 엘로아만큼 힘을 극점에 모을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당장 일격필승이라는 문구는 되려 발목을 잡는 허상에 불과하다.
필요한 것은 세 번의 찌르기.
첫번째 찌르기로 길을 연다.
두 번째 찌르기로 방어를 허문다.
세 번째 찌르기로 목숨을 거두어간다.
르뤼에가 다루는 파도처럼.
거듭할수록 커다란 힘을 이끄는 필살의 연격.
“자, 잠…!”
예상을 초월한 마력의 출력에 수아 선생이 당황하기도 잠시.
시차 없이 세 번 튀어나간 붉은 창끝이 지형지물마저 뒤바꾸며 붉은 빛의 파괴를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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