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2 - #192_괴수의 왕(3)
#876
1.
작은 장모님의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고백을 듣고 난 이후.
쌍둥이의 배려하에 입천장이 홀라당 까질 정도의 뜨거운 덮밥을 시식한 이후.
데네브는 시우에게 말했다.
‘오늘 일은 잊고, 다시 예전처럼 지냈으면 좋겠어요. 쌍둥이에게도 시우 군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이게 좋은 길인 것 같으니까요.’
그게 진심인지까지는, 그리고 데네브에게 가장 좋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두 가지는 명확했다.
어딘가 우울한 기색이 엿보이던 그녀가 진심으로 만족한 듯한 미소로 선 긋기를 했다는 것.
또 시우와 데네브가 정말 예전 관계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시우 군.”
“네?”
“일전에 일러 주었던 식사 예절을 또 까먹은 건가요? 제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콩 요리를 먹을 때는 스푼이 아니라 포크. 새 요리의 다리는 꼭 두 조각으로 자른 이후에 먹으라고 했죠!”
“네, 넵….”
만찬 자리에서 쏟아지는 십자포화 같은 지적.
그야말로 밥상머리 예절 없는 못난 사위를 질책하던 작은 장모님의 모습이다.
어항에 그녀와 함께 잡혀가기 전까지 데네브와 보이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지만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남들이 흉을 볼 거라고요. 다음 식사까지 제가 주었던 책자를 한 번 더 훑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참고로 책자란 ‘우아한 몸가짐을 위한 테이블 매너’로 책자 주제에 50페이지가 훌쩍 넘어간다.
그 고귀한 가르침의 예시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포크 위에 고기와 채소를 동시에 얹을 때는 조금씩만.
한 가지 음식만 먹어선 안 되며 정 입에 맞는 음식이 있으면 테이블 위 음식을 적절히 분배해 식사하고 한 번 더.
포크와 스푼을 입에 넣기 전엔 수초 가량 입을 열지 마라.
피치못하게 대화에 끼게 되었다면 다시 기다려라.
앞사람에게 혀가 보일 정도로 입을 열어선 안 된다.
포크를 입에 넣을 땐 턱 위로 올라온 시점에서 각도를 바꾸어선 안 된다.
칼을 사용하여 썰어도 좋은 음식 예시.
칼과 포크를 전부 사용해도 좋은 음식 예시.
크림, 젤리, 아이스 푸딩, 블랑망제 등은 포크로 먹어야 하지만 스트로베리 풀은 예외로 스푼을 사용한다 등등.
순대국밥과 치킨을 가장 좋아하던 시우에겐 기묘한 벌칙 게임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배워왔던 습관이란 쉽사리 고쳐지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바른 몸가짐을 위한 테이블 매너’라는 쓸데없는 책자를 쓴 저자가 시우의 평소 식사 습관을 보면 야만인이라고 학을 떼지 않을까?
“데네브, 좋은 자리잖아.”
알비레오는 쓴웃음을 지으며 여동생을 만류했다.
갑자기 달라진 데네브의 모습에 다른 연인들도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데네브는 시우의 입에 떠먹여주지만 않았지 아주 발랄한 태도로 식사를 도와왔으니 말이다.
“언니는 너무 물러서 탈이야. 식사 예절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네, 괜찮습니다. 조금 더 신경 써 볼게요.”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다.
앞으로 마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두고두고 쓸만한 게 예절이다.
데네브도 괜히 꼬투리를 잡는다기보다는 시우가 얕보이지 않게끔 염려해주는 마음이 더 클 것이란 걸 안다.
왜 한국만 해도 젓가락질 이상하게 한다고 쑥덕거리는 작자들이 있지 않은가?
“이번엔 작은 주인장의 말이 맞도다. 짐은 신시우를 어여삐 여기지만 가끔 먹는 모습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질 때가 적지 않았느니라.”
“그 정도였어요?”
“뭐래, 자기는 누워서 팝콘 먹으면서.”
“그건 간식이니 괜찮도다.”
르뤼에까지 저렇게 말하니 확실히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는 것이겠지.
아무튼 적당히 식사가 끝나고 식후주가 나오며 냅킨으로 입을 닦던 큰 장모님이 입을 열었다.
“시우 군, 추방자의 입국 허가가 오늘부로 궤도에 올랐어요.”
“그런가요?”
“지금껏 게헨나의 규율이 엄격하기는 했으니 시대에 맞춰 변하는 거죠. 이대로 뒀다가는 헥센나흐트에 죄다 흡수당할 판국이고요.”
“그건 그렇죠.”
게헨나의 추방제도는 삼진아웃 제도.
2회까지는 시청 및 세피로트의 나무에서 경고를 주지만 해당 경고는 시간이 지나거나 위계를 계승해도 사라지지 않으며 한번 추방당하면 어지간한 일이 없고서야 복귀할 수 없던 제도였다.
“게헨나가 처음 생겼을 당시 마녀는 지금보다도 훨씬 피도 눈물도 없었으니 어느 정도 엄격한 제한이 필요했어요.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평화는 없었을 테니까요.
아무튼 영혼의 마녀의 입국심사도 끝났으니 한번 대화를 나눠보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일찍 방문해야겠네요.”
그리하여 다음 날 ‘영혼의 마녀’ 그레텔 네프티스의 공방을 찾았다.
본래 아침 일찍 방문하고 싶었는데 저녁부터 시간이 된다는 서신을 받아 조금 지연됐지만 말이다.
그레텔의 공방은 타로 타운 구석에 마련되었다.
광장 시장에선 널찍이 떨어져 동쪽 멘델 구릉이 훤히 내려 보이는 일등지.
하얀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담한 3층 주택이었다.
이런 좋은 여건으로 입주할 수 있던 이유엔 아마도 장모님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네. 편히 앉아. 홍차를 내 올 테니까.”
하지만 당사자인 그레텔은 그다지 감명받은 눈치가 없다.
담백하다고 해야 할지 무덤덤하다고 해야 할지.
며칠 전에도 편지를 보내온 앨리스 3인방이나 벌써 호빠 죽순이가 된 즐라타는 함박웃음을 보이며 감사를 표했는데 말이다.
“만족하고 있어. 여기 생활 괜찮더라고.”
“네?”
“표정에 다 쓰여 있는데 뭘.”
“아하….”
“먼저 들고 온 그거부터 보여줘.”
피식 입꼬리를 올린 그레텔은 마주 앉아 시우가 준비한 자료를 살폈다.
아멜리아와 샤론 그리고 최근엔 시우가 합류해 비서고를 이 잡듯이 뒤진 도움이 될만한 자료였다.
예언에 관련된 자료도 있었지만 그레텔이 도움을 주기로 한 부분은 무의식을 통제하는 방법이었기에 해당 분야 위주로 추려왔다.
“마시고 있을래? 훑어볼 테니까.”
“네.”
팔락팔락 종이를 넘기는 그레텔은 턱을 괴거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둥 하며 꼼꼼하게 자료를 훑었다.
거의 3시간가량 지나 슬슬 좀이 쑤실 무렵에야 입을 여는 그레텔.
“역시 양질의 자료는 게헨나에 많네. 얼추 가닥이 잡혔어.”
“그런가요?”
“여기서 조금 발전시켜나가면 내가 임시로 조치한 것보다 훨씬 훌륭하게 ‘봉인’이 가능할 것 같아.”
듣던 중 기쁜 소식이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본디 시우와 흑기사의 의식구조는 한 면이 통째로 맞닿은 종이와 같았다.
마주한 면이 많다는 건 영향을 받기도 쉽다는 뜻.
그런 까닭에 그레텔은 의식과 무의식의 접점을 최소화하고 ‘문’을 만들어 걸어 잠갔다.
다양한 마법적 변수를 도외시한 조악한 비유이긴 하다만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의식)
========
========
(무의식)
이던 상태를.
(의식)
===||====
||(문)
===||====
(무의식)
으로 만들어 두었다는 것.
다만 여기엔 문제가 있었다.
‘문’이 있다는 건 통제에 용이한 만큼 자칫 무의식이 의식으로 범람하는 통로 구실을 할 수도 있다는 것.
시우와 그레텔의 공동연구는 이 문을 견고하게 틀어 잠그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나저나 네 얘기가 많이 들려오던걸?”
“오늘 도착하신 것 아니었나요?”
“게헨나 입국은 일주일 전에 했어. 출입국 관리소에서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떠들썩했거든. 아주아주 대단한 루키 마녀라나? 다시 봤어. 강하다는 건 알았어도 학자로서의 명망까지 높은 수준일 줄은 몰랐거든.”
이미 익숙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칭찬은 멋쩍다.
거기에 미녀의 관심 어린 시선이 빤히 향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너랑 자고 싶어졌어.”
“…….”
“잘생기고, 몸 좋고, 머리도 좋다니. 섹시하잖아?”
“이래서 저녁에 부르신 건가요?”
“맞아.”
태연하게 인정하는 그레텔.
대담한 제안을 하는 것치고는 색기라곤 하나도 없다.
말투도 평상시 대화체인데다가 애초에 코디 자체가 동화에 나온 나쁜 마녀 같은 느낌 아니던가?
적어도 남자를 꾈만한 차림은 아니다.
“농담인 건가요?”
“나 꾸미면 예뻐. 몸매도 아주 끝내줘.”
그러고보니 가슴이 좀 큰 것 같기도 하고….
“질내에만 사정하지 않는다면 ‘횟수’에도 제한이 없을 테니 문제없잖아? 어때? 지금 옷 갈아입고 화장하고 올까?”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다.
다만 괜히 기분을 나쁘게 했다가 협력을 못 받는 것도 곤란했기에 최대한 돌려 거절했다.
“그러다간 저 혼쭐납니다. 그레텔 님에게도 불똥 튀어요.”
“아쉽네. 하긴 나도 네 여자친구는 무서워.”
다행히도 몰래 하면 되지 않냐는 둥 땡깡을 부리진 않았다.
아마 연인들의 꿈을 엿보았던 만큼 잘못했다간 불장난에 전신 5도 화상을 입을 수 있다는 걸 아는 모양.
시답잖은 추파를 적당히 끊어내고 본론을 꺼냈다.
그녀에게 건네주었던 것과 달리 품 안에 품고 있던 자료.
“그레텔 님, 제가 떠올린 구상이 있습니다.”
“구상?”
“네, 그레텔 님이 주신 ‘문’을 적당히 활용해보려고요.”
기억의 궁전, 그리고 처녀의 베틀을 엮어내어 만들어낸 새로운 마법의 초기 구상안이다.
붉은가지의 왜곡이 마법의 구동축 역할을 맡아줄 것이다.
약간의 아쉬움과 심통 맞음이 묻어있던 검은 눈동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하핫.”
입술을 파들파들 떠는 그레텔.
언제나 가면 같은 무표정을 띠던 그녀가 하얀 이가 보일 때까지 깔깔 웃었다.
“이거, 네가 구상한 거야? 처음부터 끝까지?”
“네, 그렇습니다.”
“너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는 아주 제대로 미친 녀석이었구나?”
“요즘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일종의 보험입니다.”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웃다가 시우를 바라본 그레텔은 아주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시우를 보았다.
기발한 발상에 감탄을 표하길 넘어 호의까지 흠뻑 묻어나오는 시선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세상은 얼마나 더 변할지 모른다.
사용할 일이 없으면 가장 좋겠지만 이 구상을 구현할 수 있다면 최소한의 보루는 안배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좋아 도와줄게. 나도 흥미가 깊어.”
그레텔의 대답은 YES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