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5
1.
변변한 놀 거리 없는 작은 마을에 한 해에 한번 있는 큰 축제다.
그 덕에 마을에서 신사로 향하는 길은 인파로 북적였다.
저마다 옷을 꾸며 입고 나온 가족, 연인, 친구들.
길게 늘어진 보랏빛 저녁노을이 어물어물 저물어가는 가운데 다들 들뜬 발걸음으로 신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
힐끔.
린네는 곁눈질로 나란히 걷던 파파를 보았다.
마츠리에 걸맞게 멋지게 차려입은 하카마.
얼굴을 길게 가로지르는 남자다운 검상과 외안을 가려주는 안대.
비스듬히 쓴 갈 삿갓 아래로 보이는 멋들어진 수염.
풍류를 아는 떠돌이 낭인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차림새다.
실제로도 그는 천하제일창이라는 칭호가 과분하지 않은 창술사이기도 했다.
“린네, 한눈팔면 위험하단다. 발밑을 조심하면서 걸어야지.”
“네.”
그렇게 힐끔거리는 린네의 머리를 푹 누르며 핀잔을 주는 시우.
작은 동작만으로 느껴지는 애정에 린네는 그만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단언컨대 린네를 이런 식으로 취급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건 오직 파파 뿐이다.
지금은 이렇듯 그를 의지하는 린네였지만 둘의 첫 만남은 농담으로라도 좋은 인연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5년전.
스승이 낙인을 계승하고 멋대로 죽어버리고 난 이후.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방황하던 린네는 떠돌이 낭인 신시우를 만났다.
린네는 남자의 몸으로 마녀가 되었다는 그를 만나자마자 죽자사자 싸움을 걸었다.
그 당시에는 아무래도 좋았다.
더는 살아있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만약에 이유가 남아 있다면 일생을 걸어 벼려온 검에 묻고, 무에 묻자.
그를 죽이게 된다면 더욱 높은 경지로 나아갈 수 있을 테고, 강자에게 죽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렇게 결심하며 제법 강해 보이는 그에게 도전장을 건넸을 뿐이다.
그는 놀랍게도 린네를 압도적인 차이로 굴복시켰다.
비록 어린 마녀라 한들 ‘검의 마녀’ 특유의 혹독한 단련으로 전투라면 이골이 난 린네를 마치 어린애 다루듯이 가볍게 제압했다.
그의 창대는 대나무처럼 곧았고, 창끝은 버드나무 잎사귀처럼 자유자재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린네는 그 천변만화한 움직임에 대응할 수 없었고 고작 3분도 되지 않아 린네는 검을 놓치고 진흙탕에 얼굴을 처박았다.
‘죽여라.’
패배의 대가라면 각오하고 있었다.
벌어진 입가로 흙탕물이 흘러들어오는 와중에도 울분과 분노는커녕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는 후련함조차 느끼고 있었다.
‘돌아가서 발 닦고 자라. 귀찮게 굴지 말고.’
하지만 시우는 린네의 목숨을 거두지 않았다.
툭 던져 놓듯 말을 내뱉곤 빗줄기를 등지고 멀어질 뿐이었다.
‘…….’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에게 그나마 남아있다고 생각했던 한가지, ‘강함’을 완전히 부정당했다.
그 정신적 충격은 자살 충동마저 뒤집어 엎을 만큼의 분노로 돌변했다.
실로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했던 벡터 전환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폭발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일어난 인지 도식인지 모른다.
린네는 그 뒤로 그를 쫓아다니며 습격했다.
낮과 밤, 맑은 날과 흐린 날, 오솔길과 마을 어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며 3주를 내내 덤벼들었고, 단 한 차례의 승리도 거머쥐지 못한 채 매번 바닥에 처박혔다.
그때마다 그는 여유롭게 린네를 상대했다.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더 수련하고 오렴.’
이라는 얄미운 말만 던지고 무심히 돌아서는 등을 뒤쫓길 한 달.
제대로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울분과 서러움은 어느덧 동경으로 색을 갈아 끼우고 있었다.
‘배 안 고프니?’
걷어차인 배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린네에게 건네준 주먹밥 한 덩이.
그것이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의 시작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미를 잃은 고양이가 늑대의 품을 파고들듯 린네는 시우를 아버지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처럼 아무런 조건 없이 린네를 보살펴 주었다.
“무슨 생각 중이니?”
“…파파를 처음 만났던 날이요.”
쑥쓰럽지만 파파에게 본심을 숨길 수는 없다.
린네는 그녀답지 않은 우물우물한 발음으로 답했고 시우는 그런 린네가 귀엽다는 듯이 머리를 재차 쓰다듬었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저물고.
신사의 관문, 토리이로 이어진 긴 계단 길이 알록달록한 조명 빛에 둘러싸여 빛났다.
시우와 린네는 다정한 부녀처럼 손을 꼭 맞잡은 채 그 길을 올랐다.
파파는 다정하다.
파파는 상냥하다.
만약 그가 건넨 주먹밥 한 덩이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이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큼이나 기쁨으로 차올라서 발끝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지독하기 짝이 없는 결핍의 저주마저 사그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동시에 린네를 초조하게 만든다.
“이야, 잘 꾸며놨네.”
흥청거리는 음악과 웃음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신사에 도착했음을 깨닫는다.
마을 주민이 삼삼오오 모여 만든 노점상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작은 축제를 연출하고 있었다.
“우선 좀 둘러볼까?”
“네.”
그렇다고는 해도 타지인은 굳이 찾아오지 않는 작은 마을 축제다.
차근차근 둘러본다 해도 15분 정도면 전부 구경이 끝났다.
석등 대신 주홍색 백열등으로 밝혀진 신사 마당을 멍하니 돌던 차.
린네는 오랫동안 끌어온 한가지 고민을 곱씹었다.
시우는 린네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다.
그녀가 그리워 마지 않던 가족 간의 애정, 부성애 혹은 모성애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었다.
그렇기에 거기까지다.
두 사람의 관계는 피가 섞이지 않은 부녀, 그뿐.
“린네.”
“네.”
“멀뚱히 있지 말고 받아.”
머뭇거리듯 서 있는 린네에 막대에 꽂힌 사과가 주어진다.
그냥 사과는 아니고 녹인 설탕을 코팅한 링고아메.
마츠리하면 빠질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
“모처럼 왔는데 더 즐겨야 하지 않겠니?”
언제나와 같은 파파다.
그러나 린네의 고민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한 그의 행동이 오늘따라 얄밉게만 보였다.
“오, 이것도 재미있겠네.”
어렵사리 링고아메를 조금조금 깨물어 먹는 린네의 팔을 이끌고 시우가 향한 곳은 금붕어 뜨기.
종이 뜰채로 얕은 수조 안의 금붕어를 떠내는 이 유희 역시 마츠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이다.
“자자, 은어 뜨기가 일 회 단돈 500엔! 잡은 은어를 옆 노점에 가져가시면 요리해 드립니다!”
“흠, 내가 아는 금붕어 뜨기랑 좀 다른데.”
“…….”
수조 안에는 금붕어 대신 은어가 헤엄치고 있다.
옆을 보자 정말 은어를 비스듬히 꽂아 숯불의 곁불로 굽는 노점도 보인다.
“린네도 해볼래?”
“몇 마리 잡으면 될까요?”
“먹을 만큼만 잡자.”
“파파는 몇 마리가 드시고 싶으신가요?”
“글쎄? 맥주랑 같이 먹으려면 두 마리 정도?”
유카타의 소매를 걷어부친 린네가 종이 뜰채를 쥐고 나섰다.
그녀는 마치 훌륭한 솜씨로 은어를 잡는 가마우지처럼 순식간에 5마리의 은어를 낚아챘다.
안주거리를 얻은 시우가 매우 흡족해하며 린네를 격렬하게 칭찬했고,
격렬한 칭찬을 받은 린네가 볼이 발갛게 변한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2.
앞서 말했듯 이 작은 마을의 마츠리는 퍼레이드도 없는 소규모 행사였기에 은어 뜨기 이후의 즐길거리라곤 사격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빼놓을 수 없는 메인이벤트는 제대로 갖추고 있다.
여름 밤하늘에 폭죽을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다.
토호 신사는 불꽃놀이를 고지대에서 관람할 수 있는 명당.
따라서 잠시 쉬고 있던 사람들이나 노점에 딱히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몰려들 것이 뻔하다.
린네는 3일 전부터 사전답사를 끝내놓았다.
“자꾸 어디로 가니?”
“파파, 이쪽이 더 잘 보여요.”
나무와 수풀 사이를 헤치며 나아간 곳은 강가가 내려 보이는 완만한 절벽 끝.
어디가 조용한지, 어디가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훌륭한 조망권을 확보하고 있는지 등을 고려해서 말이다.
등 뒤로 신사의 조명이 하나둘 꺼져갔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도 잠시 숨을 죽인 채 앞으로 펼쳐질 장관을 기다린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쾅쿵쾅 뛴다.
린네가 줄곧 가지고 있던 고민.
그것은 시우가 린네를 정말 딸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만약 지금의 관계를 바꿀 마중물이 필요하다면 그건 분명 린네의 용기가 되겠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린네를 가족처럼 아껴주는 건 감사한 일이다.
린네가 그런 시우의 태도에 구원받은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샌가 이 관계에 한 발짝을 더 내밀고 싶다는 욕심에 시달렸다.
그러한 충동이 언제나 불안함을 동반했다.
린네는 그녀를 보살펴주는 파파가 좋다.
언제나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며 의존할 수 있는 파파가 좋다.
만약 린네가 저 혼자 선을 넘으려 든 결과가 서먹한 거리감이라면 슬프겠지.
용기를 쥐어짜 낸 고백이 단순히 어린 시기의 치기쯤으로 치부 당한다면 울지 않을 자신이 없다.
시우와 파파 둘 모두를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그에게 어떻게 비칠지, 무섭기 짝이 없다.
“파파.”
린네는 쪼그라드는 호흡을 간신히 이겨낸 채 입을 열었다.
“응?”
오늘은 정말 말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역시 찾아오는 건 망설임.
또 망설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이대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 게 아닐까?
“아무것도 아니….”
린네가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다음을 기약하려는 그때.
-펑! 퍼퍼퍼펑!
환호성과 함께 불꽃놀이의 불빛이 어둑한 사위를 환히 밝힌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불꽃이 망설임의 자락을 끊어낸다.
“오 예쁘다.”
“파파.”
린네는 시우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평소처럼 안아달라는 자세인 줄 알고 무릎을 낮추고 팔을 벌린 그의 품에 안기는 대신 두 뺨을 단단히 붙잡는다.
절대로 도망칠 수 없게.
“마음속 깊이 연모해요.”
살포시 포개지는 입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뺨이나 이마에 주고받는 가족 키스가 아니라, 혀를 넣어 서로의 달콤하게 타액을 섞는 애인 키스.
귓가에 울리는 폭죽 소리와 포개진 두 사람의 뺨에 어른거리는 화려한 불꽃.
영겁처럼 길었고 찰나처럼 짧은 키스였다.
후련, 후회, 미련, 기쁨, 달콤함, 씁쓸함, 설렘, 두려움.
서로 다른 물감을 마구잡이로 섞어놓은 듯 복잡 오묘한 뒤끝이 혀끝에 남았다.
“너….”
눈 앞에 놀란 표정을 짓는 파파가 보인다.
역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안주해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애쓰지만 다리에 힘이 풀린 린네가 오열과 함께 주저앉으려는 그때.
“후웁...?!”
이번엔 파파로부터 키스가 왔다.
린네가 했던 것보다 더욱 진득하고, 뜨거운 정열이 담긴 키스가.
몸이 뻣뻣이 굳었던 린네는 자연스럽게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폭죽에 잦아든 어둑한 숲 속.
부녀의 은밀한 불장난 속 린네는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