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
1.
맨해튼 남부 금융가.
세간에는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곳에 가장 높고 호화로운 빌딩이 있다.
날이 지날수록 대세는 헤지 펀드라는 여론이 생기고 있음에도 금융업 종사자라면 누구든 인사하고 싶은 꿈의 회사.
바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산을 굴리는 투자 은행 ‘애버슈퍼그린(ESG)’의 본사 건물이다.
그 최상층인 75층엔 CEO의 펜트하우스가 있다.
통상 회장인 샤론과 그녀의 지인 이외에는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장소다.
매년 1회에 한해 방문권을 경매에 풀리는데 투자 노하우를 듣기 위한 이들이 수십억에 달하는 금액을 지급하곤 한다.
펜트하우스의 집무실에 앉아있는 건 세계 최고의 갑부, 샤론 슈퍼리치 애버그린.
“후우.”
정장을 차려입은 샤론에게선 편의점 알바를 하며 옥탑방에서 살던 빈곤한 모습은 조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대신 고도로 갈고 닦아진 냉철한 사업가의 야수성이 엿보였다.
하긴 이만한 굴지의 기업을 5년도 안 되는 세월 안에 순수한 실력만으로 길러 냈다.
잠을 이겨내기 위해 마약 복용도 불사하고, 때로는 실적을 위해 같은 동료를 먹어치우기도 하는.
성과만을 쫓는 냉혹한 야수들 속에서 당당히 성공을 거머쥐었다는 자부심은 샤론을 이미 다른 존재로 만들어 놓았다.
“역시 아이스크림은 하겐다즈지.”
월가의 부경을 내려보며 집무를 보던 샤론은 우아하게 아이스크림을 집어들었다.
샤론은 자신의 집무실에 하겐다즈를 가득 채운 냉장고를 가져다 놓았다.
냉장고를 맛별로 채운 하겐다즈야말로 부유한 이들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흐으음, 맛있다맛있다.”
바릴라맛 하나, 딸기 맛 하나, 작은 통으로.
총 두 개를 한 번에 골라낸 샤론은 하겐다즈 전용 스푼으로 그것을 절반씩 퍼먹었다.
“아휴, 너무 많이 먹었더니 질리네.”
-텅!
절반밖에 먹지 않은 하겐다즈 두 통을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면서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과거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호화로운 사치였다.
“다시 일이나 해볼까?”
차트를 보기 쉽게 쿼드 모니터가 설치된 테이블에 다시 앉은 샤론.
그러나 모니터를 보자마자 어째서인지 숨이 턱 막힌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느낌? 갑자기 차트가 엄청 무섭게 보이는 느낌?
매수도 매도도 하기 껄끄러워지는 느낌?
특히 화면 구석에 있는 DOGE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손발이 벌벌 떨렸다.
“으...응? 왜 이러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샤론.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천재들도 가끔은 슬럼프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때 내선 전화가 쨔르릉 울렸다.
전속비서다.
[회장님, 알비레오 백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올려보내세요.”
[네, 회장님]
잠시 뒤 우아한 칠흑의 드레스를 입은 알비레오 백작이 샤론의 집무실로 올라왔다.
흑과 백의 쌍조라 불리는 제머나이 백작 중 흑조.
그녀가 투자와 경영의 귀재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샤론 역시 처음엔 그녀에게 수업료를 내며 투자 이론과 경영 철학에 대해 배웠더랬지.
‘샤론 양! 정말 그것밖에 못 하나요?’
‘지금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있는 거에요? 다시 옥탑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당장 짐 싸서 나가요!’
‘최선을 다했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헛소리네요. 결과를 내지 못한 패배자들이 입에 담는 최선은 전부 변명에 불과해요!’
‘복창! 샤론 애버그린은 리스크 헷지도 못하는 쓰레기다!’
그 냉혹하고 비정하기 짝이 없던 알비레오의 스파르타식 교육이 지금의 샤론을 만들었다 말할 수 있겠다.
“오랜만이네요, 백작님.”
그러나 샤론은 앉은 자세 그대로 옛 스승 알비레오를 맞았다.
알비레오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두 손을 공손하게 모으고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샤론 님. 잘 지내셨죠?”
“알비레오 님도 잘 지냈죠? 식사는 했나요?”
“아직이에요.”
“잘 됐네요. 식사하면서 이야기 진행하죠.”
샤론이 테이블 위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자 곧 직원들이 우르르 뛰어나와 식탁을 세팅했다.
길쭉한 조리 모를 쓴 수염이 덥수룩한 프랑스계 셰프가 오늘 코스에 대해 설명한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을 4개나 보유한 셰프였지만 샤론이 막대한 돈을 들여 전용 요리사로 고용했다.
“오늘 준비된 요리는 차게 식힌 랍스타 스쿼시 스튜와 살짝 얼린 털게 회.
허브 오일과 식용 새싹을 얹은 대게 쉐비체.
코코넛크랩의 내장으로 만든 비스크 소스를 곁들인 코코넛크랩 집게살 구이.
홋카이도 산 성게소를 곁들인 킹크랩 바질 페스토 파스타.
크레이피쉬의 살을 발라 생크림을 더해 만든 오물렛입니다.
후식으로는 커피와 과일이 준비되어있습니다.”
“오늘 코스도 마음에 드네요. 차례로 내주세요.”
코스 구성을 듣던 알비레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샤론 님은 여전부터 갑각류를 참 좋아하시네요.”
“네네, 대게는 대개 대개 맛있으니까요.”
“오호호호, 샤론 님도 참 재치도 넘치셔라.”
샤론의 재미없는 농담에도 꺄르륵 자지러지는 알비레오.
권력의 맛을 소소하게 느껴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정말, 감사해요.”
식전주로 나온 와인을 마시던 알비레오는 다짜고짜 고개를 숙였다.
“샤론 님의 도움 덕분에 인수합병을 방어했어요. 지금 역으로 인수절차를 밟고 있고요.”
“그런가요? 잘됐네요. 뭐, 마녀끼리 돕고 살아야죠.”
최근 경영난에 빠진 제머나이가의 회사를 경쟁사 A에서 인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샤론은 도움을 청하는 알비레오의 요청에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
우선 적대적 M&A를 시도하려는 A기업에게 공개매수를 역으로 걸며 인수의도를 밝힘과 동시에 황금주 장악에 나섰다.
팩맨이라 불리는 극단적인 반격전략이 샤론의 어마어마한 자금 원조로 어렵지 않게 성공했다.
“…….”
청출어람도 마냥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제자가 동종 업계의 경쟁자라면 말이다.
따라서 샤론이 크게 성공한 이후 서먹서먹해졌던 알비레오지만 지금만큼은 완벽한 저자세다.
샤론의 능력을 인정하겠다는 무언의 표시이기도 했다.
“샤론 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네?”
“제가 예전에 보였던 무례에 대해 사과드려요. 앞으로는 제가 지도편달을 받을 수 있을까요? 기나긴 기간 동안 기업을 운영해왔지만, 마침내 온전히 믿고 따를 정신적 지주를 찾은 느낌이에요.”
샤론은 뿌듯해졌다.
기분이 좋아진 샤론은 과거의 쓰디쓴 회초리 따위는 깔끔히 잊기로 했다.
“에이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앞으로도 같이 으쌰으쌰 해봐요!”
“샤론 님…!”
“돌아가실 때 선물 준비해뒀으니 쌍둥이에게도 전해주세요.”
“어쩜 이리 다정다감하시기까지…!”
관대한 모습에 감격하는 알비레오를 돌려보내고 다시 월스트리트 뷰 관람에 나선 샤론.
뭔가 회장이 이렇게 한가해도 되나 싶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꼭 해보고 싶었던 생각에 골똘히 젖는다.
“인생은 뭘까…?”
돈이 많다고 인생이 행복한 건 아니라는 부자들의 말.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샤론은 ‘개소리 집어치워!’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부자가 되었으니 인생의 행복이 비단 물질에서 오는 게 아니라는 고뇌에 젖어보고 있었다.
이게 성공의 맛이라는 건가?
-띠리리링!
재차 전화기가 울렸다.
이번에는 샤론의 개인용 휴대전화이다.
발신처는 내 사랑.
샤론이 과거 힘들던 시절부터 한결같은 모습으로 옆을 지켜주던 남자친구다.
이런 게 찐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실 슬슬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 시우야 왜?”
일단 아무것도 모른 척 전화를 바꾼다.
[샤론 이게 뭐야?]
“응?”
[집에 왔더니 차고에 새 차가 있는데…?]
“아, 깜빡하고 있었다. 선물이야, 서고 서랍에 차키 넣어뒀어.”
오늘은 시우와 처음 만난 지 8년이 되어가는 날이다.
따라서 샤론은 시우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해주었다.
그 이름도 겁나 긴 부가티 라 애버그린 누아르.
가격은 더 길다.
한화로 세금을 포함하여 27,000,000,000원이니까.
의뢰자 샤론이 남자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주문제작 한, 단 한 대뿐인 하이퍼카.
자세한 건 사실 샤론도 잘 모르고 편한 카응응을 위해 등받이가 젖혀지면 침대에 버금가는 안락함을 자랑하도록 설계되어있다.
[…….]
“시우 울어?”
옛날에 마녀 페리윙클에게 받은 부가티 시론을 틈만 나면 끌고 나가 드라이브를 했던 시우다.
델라를 차로 치는 바람에 폐차했을 땐 남몰래 속상해하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아예 시우 전용 차고를 만들고 그 안에 스포츠카를 열심히 채워주는 게 샤론의 소소한 낙이 되었다.
[번번이 고마워, 너무 고마운데…. 내가 이런 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
샤론의 선물을 당연시하기는커녕 매번 부담스러워 발을 동동 구르는 귀엽고 소중한 남자친구.
그에 대해서 해줄 대답은 세 음절이면 충분했다.
“응. 돼. 너니까.”
2.
화려한 유카타와 게다를 신은 린네는 향월루 툇마루에 앉아 저녁달을 바라보았다.
낮은 담벼락 너머로는 한여름의 더위도 잊게 해 줄 즐거운 흥성임이 들려온다.
오늘은 뒷산에 있는 토호 신사에서 마츠리가 열리는 날이다.
아직 해가 전부 지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신사로 발길을 옮기는 이들이 많은 모양이다.
축제는 그리 익숙지 않은 린네.
그만큼 이번 마츠리는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어댈 정도이다.
-바스락
린네는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을 곧장 알아차렸으나바로 돌아볼 수 없었다.
정성껏 치장한 머리 장식이 헝클어지진 않았을지, 어디 못나 보이는 곳은 없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네. 출발할까?”
그런 린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는 듬직한 손바닥.
그제야 린네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뒤를 올려보았다.
“네, 파파.”
거기엔 린네가 누구보다 예쁘게 보이고 싶은 남자.
신시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