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3
1.
대부분의 네임드 호문쿨루스의 능력과 특징을 외우고 다니는 엘로아.
그런 그녀가 단번에 날개와 뿔이 달린 돼지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네임드 호문쿨루스임에도 불구하고 토벌 우선순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조처럼 아름다운 날개와 일각수의 뿔처럼 멋진 뿔을 지닌 호문쿨루스의 이름은 ‘해피피그’.
해피피그는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호문쿨루스 중에서도 독특한 개체에 속했다.
마녀나 인간을 대상으로 일절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굉장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기에 친밀감을 품고 접근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놈이 가진 독특한 자성마법.
인간이나 마녀를 발견한 해피피그는 반가움에 젖어 몸에서 광채를 뿜는다.
또한 광채를 뒤집어쓴 자에 한해 ‘그 지성체가 염원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을 꿈으로 구현해 준다.
그러나 ‘해피피그가 위험하지 않은가?’라고 말하면 절대로 단언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셋.
첫째, 악의가 있건 없건 해피피그의 꿈으로 끌려들어 간 마녀는 환상 속에서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한낱 백일몽이라 단정 짓고 현실로 돌아오는 건 어려운 일인 까닭이다.
둘째, 해피피그의 마법은 자율방어를 관통한다.
해피피그는 마녀에게 아무런 악의도 적의도 없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순수한 호의엔 자율방어조차도 그 의미를 잃는다.
실제로 해피피그의 행위 자체는 마녀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으며, 심지어 자체적으로 방어를 펼쳐 마법에 걸린 대상이 마음껏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보호해준다.
그러나 셋째, 이곳은 영혼의 마녀 즉, 추방자의 공간이다.
여기 모인 인원의 전력에 비하면 일개 호문쿨루스의 보호 따위는 없느니만도 못한 것.
일행은 숲 한가운데서 단잠에 젖어 무방비하게 쓰러져 있는 상태나 다름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줄기 미풍이 엘로아의 귀밑머리를 흔든 순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위기감도.
이것이 꿈이니 어서 깨어 다른 인원을 도와야 한다는 사명감도.
오래전에 꾼 꿈처럼 흐릿해진다.
“모두 정신 차리게…!”
엘로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익숙한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조금 얼떨떨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보는 엘로아.
아르스 마그나 타운의 티페레트 저택의 서재.
유리창에서 쏟아진 나른한 햇살이 꿈과 현실의 얕은 경계를 가르듯 따사로이 내리 쬐었다.
짙은 청록색 커튼 너머엔 라벤더 군락이 보랏빛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려 자색 물결을 그려내고 있다.
게헨나에 셋밖에 없는 공작 작위에 부끄럽지 않은 몽환적이고도 화사한 서고였다.
“후후후.”
어디선가 들려온 웃음소리에 엘로아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거기엔 귀에 볼펜을 꽂은 채 빙글거리는 웃음을 짓는 제자가 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엘로아의 둘 뿐인 제자가.
“후후, 스승님. 무슨 꿈을 꾸셨길래 그렇게 잠꼬대를 하시나요?”
“라피?”
왜 라피가 여기에?
라피는 분명….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의문을 떠올리려던 엘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굉장히 좋지 않은 꿈을 꾸었음이 분명하다.
이토록 머리가 어지럽다니 말이다.
“마실 거리라도 드릴까요? 참고로 위스키는 절대로 안 돼요.”
“라피, 스승을 주정뱅이로 아는 게냐?”
“하지만 스승님은 언제나 술을 많이 드시는 걸요.”
이상한 말이다.
라피를 제자로 두게 된 이후 엘로아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을 텐데.
“실없긴. 물이나 떠오거라.”
“네~ 스승님.”
아마도 라피와 함께 서고에서 책을 읽다가 엘로아만 먼저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여기요, 시원하게 들이키고 잠 깨세요.”
“고맙구나.”
어제도 봤고, 일주일 전에도 봤던, 언제나 함께 지내던 사랑하는 견습마녀 라피이다.
어째선지 아주 오랜만에 본 것처럼 그리운 느낌이 가슴에 사무쳤다.
이 감정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엘로아는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유달리 감성적인 날이겠거니 넘겨 짚을 뿐이었다.
“라피.”
“네?”
“잠시만 와보겠느냐?”
엘로아는 라피를 꽉 끌어안았다.
“네, 어머머. 스승님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스승님?”
“…….”
“…괜찮으세요?”
짐짓 짓궂은 미소를 짓다가 깜짝 놀라는 라피.
“우리 스승님, 무서운 꿈 꾸셨구나…. 괜찮아요. 저도 가끔 그러거든요.”
엘로아는 라피가 손수건을 꺼내 뺨을 훔쳐준 이후에야 자신이 투명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 한 잔 더 떠올게요.”
“라피.”
놀라며 물을 뜨러 가던 라피를 다시금 붙잡는 엘로아.
그리고 다시 너무나도 그리웠던 제자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잠시만 이대로 있어주겠느냐?”
“오늘따라 왜 이러시지…. 시우 사형이 보면 질투하겠어요.”
라피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제 스승을 마주 안았다.
2.
“하아~ 오늘도 고생했다….”
비와 도시.
도로시가 생각하기에 이 두 단어는 유독 울적한 조합이다.
거기에 여름이라는 단어가 더해지면 울적함을 넘어 우울한 지경이 된다.
와이퍼가 뽀득뽀득 닦고 있는 앞유리.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하는 차들의 브레이크등을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의 여름이란 어찌나 습한지 에어컨을 틀어도 차내의 꿉꿉함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다.
잠시만 걸어도 몸이 개구리처럼 끈끈해지는 통에 하루에 다섯 번은 샤워를 해야 할 지경이다.
하루종일 구두를 신었어야 하는 통에 발도 욱씬욱씬.
8시간 넘게 모니터를 빤히 바라본 눈은 피로로 가득하고, 부족한 수면 탓에 눈 밑이 거뭇하다.
가장 최악의 사실은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 오늘처럼 4일은 더 일해야 가까스로 주말이라는 짧은 휴식을 찾을 수 있다.
분명 주말에 편히 쉬었을 텐데 왜 비축한 에너지가 하루 만에 방전이 되는 건지.
왜 매일 수당도 없는 야근을 해야 할지 전전긍긍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리 연봉을 많이 준다지만 사람을 이렇게 부품처럼 갈아 넣는 게 정녕 맞는 일인가 싶다.
“아, 요즘 왜 이러지~ 마트를 지나쳐버렸네.”
퇴근 전까지만 해도 분명 특가 세일하는 날이라고 단단히 되뇌고 있었는데.
이런 저런 불평을 늘어놓는 통에 마트로 빠지는 사거리를 지나쳐 버렸다.
“되는 일이 없네…. 우울하다 우울해~”
도로시는 한숨을 푹 쉬며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무려 1시간 동안 러시아워 속에서 고통받고 ‘다음엔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하자’라는 교훈을 되새긴다.
8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로시의 집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신도시 배드타운이다.
거실과 부엌에 방이 두 개 딸린 32평 아파트.
아직 5년은 더 빚을 갚아야 하므로 사실상 은행 소유라고 보는 게 맞다.
그래도 보금자리는 보금자리라는 걸까?
현관을 여니 0%까지 방전되었던 배터리가 10%는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아무렇게나 힐을 벗어 던지고 가족사진 밑 소파로 직행했다.
“다녀왔어~ 어머? 이게 무슨 냄새야?”
“왔어?”
코끝을 자극하는 좋은 냄새는 아마도 김치찌개이다.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나온 시우는 두 팔을 벌려 도로시를 반겼다.
“자기 늦을 것 같아서 저녁 준비하고 있었지. 차 많이 막혔지?”
“아아~ 악명은 들어왔지만 정말 말도 안 된다니까? 살다 살다 뉴욕보다 더한 나라는 처음 봤어.”
“내가 그냥 버스 타라고 했지?”
“이 정도일 줄 알았냐고.”
소파에 누운 도로시가 아이처럼 뾰로퉁하게 입을 내밀자 피식 피식 웃는 전업주부 시우.
밉상이다 정말.
“딸내미는?”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온대.”
“친구 집? 누구?”
“오딜이랑 오데트 있잖아.”
“아~ 그 성악 한다는?”
“어어.”
앞치마를 두르고 있던 시우가 은근슬쩍 도로시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사랑하는 도로시 님, 오늘 많이 피곤했으니까 어깨라도 주물러 드릴게요.”
“아아~ 됐어, 나 오늘 피곤하단 말이야.”
“피곤하니까 어깨 주물러 주겠다는 거지.”
모처럼 좋은 기회이긴 하다.
단둘이서 살던 때와 달리 지금은 르뤼에가 있어서 마음껏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없으니 말이다.
혹시나 소리를 듣고 깨거나 중간에 들어오거나 하면 어쩌겠는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뜨거운 밤도 뜨거운 밤 나름이다.
이렇게 피곤해 죽겠는데 종마 같은 남편과 밤늦게까지 사랑을 나눴다간 내일 출근이 두렵다.
“많이 힘들었어?”
“말도 마. 명패로 부장 머리 깰 뻔한 거 참았어. 쥐뿔도 없는 게 진~짜 열받게 한다니까?”
“이거 안 되겠네. 그냥 깨고 깽 값 물자.”
“그럼 대출은?”
“그럼 대출만 다 갚고 깨자.”
그래도 주물주물 어깨를 안마받으며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자니 입가가 느슨해지는 걸 참을 수 없다.
좋은 남편과 결혼해서 정말 다행이다.
돈 좀 못 벌어오면 어떤가?
집안일 잘하고, 안마 잘하고, 요리 잘하고, 밤일 잘하면 그만인 것을.
게다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딸도 가졌고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셔츠 단추가 풀어 젖혀져 있다.
브래지어의 프런트 후크도 마술처럼 풀어 젖혀져 있었다.
능구렁이처럼 안으로 들어온 시우의 손이 도로시의 가슴을 조물거리고 있던 것이다.
처음에는 노골적이지 않던 손길이 어느덧 무척 음란하게 반죽을 주무르듯 움직였다.
톡톡 첨단을 두드리는 손길은 어떤 식으로 어루만져야 도로시가 애타는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했다.
“이 나쁜 손은 누구 손이야?”
“안마해 주는 거라니까.”
샐쭉한 시선으로 따지자 능청스레 답하는 시우.
예전엔 이렇지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능구렁이가 되어간다.
“으이구~ 정말 애가 따로 없다니까.”
“같이 샤워할까?”
“어쩔까?”
“이리 오시죠, 욕실 청소도 해놨어요. 제가 구석구석 씻겨 드릴게요.”
“어휴, 간지러워~ 그만해.”
서로 장난기 가득한 키스를 나누며 욕실로 이동하는 두 사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도로시의 옷가지가 하나씩 방바닥에 떨어진다.
“청소 엄청 열심히 했네.”
“그럼 그럼, 내가 누군데.”
보아하니 방도 정말 깔끔하게 정리해뒀고, 저녁도 준비했고, 심지어 화장실까지 눈이 부시도록 깨끗하게 해두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이렇게 애썼는데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다.
이쪽도 조금은 기운을 내야겠지.
아무래도 밥을 먹을 시간은 조금 미뤄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