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
1.
시우 일행은 울란바토르에서 잠시 착륙했다가 곧장 홉드 공항을 향해 이륙했다.
일행이 이용하던 전용기의 항속거리라면 단박에 홉드 공항까지 비행할 수 있지만,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지프를 인수해 항공화물로 가져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헥센나흐트에 잡혀가기 전에 사막을 횡단하며 탔던, 바퀴가 허리까지 오는 배드애스 감성 풀풀 나는 그 지프가 맞다.
몽골은 워낙에 땅덩이도 넓은 나라였고 타왕 보그드 국립공원까진 홉드에서도 차로 이틀을 꼬박 이동해야 했으니 필요한 절차였다.
홉드 공항에서 입국 수속을 거친 뒤 곧장 스승님의 애마인 지프로 환승해 더욱 서쪽으로 이동.
내륙국과 고지대라는 점이 더해진 몽골 서부는 무척 건조했으며 11월임에도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이 추웠다.
차량 내부의 온도계를 보니 바깥 온도는 영하 11도.
아직 해가 떠있는데도 이 지경인데 일몰이 된다면 더더욱 내려가겠지.
포장 도로는 금새 사라지고 엉덩이를 들썩들썩 거리게 하는 비포장도로가 주르륵 이어졌다.
양 도로 옆으로는 누렇게 죽어가는 이름 모를 잡초가 한없이 넓게 펼쳐진 초원과 비교적 해발고도가 낮은 둥근 산들이 보인다.
이곳이 정말 현실세계일지 의문을 품게 하는 장엄한 태고의 초원.
초원과 산맥이 그리는 지평선과 삐뚤삐뚤하게 맞물린 하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거인의 숨소리 같다.
날씨 탓인지 하얀 구름이 눈이 아릴 정도로 파란 창공 위에 입김처럼 몽실거렸다.
잠시 눈을 감는다면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귓전을 때릴 것 같은 풍경이다.
시간 감각이 흐릿해질 만큼 끝없이 이어진 차창을 멍하니 바라보며 운전대를 잡은 시우에게 엘로아가 귤을 까서 입에 넣어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싸이버거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실제로 아무 생각도 없었다.
환경은 사람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끼치나 보다.
조금 흐릿한 날씨임에도 대자연의 장엄함을 가로지르다 보니 온갖 잡념이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다들 조용하기에 슬쩍 백미러로 뒤를 보았다.
뒷좌석에 나란히 고개를 기대고 누운 아멜리아, 샤론, 르뤼에, 도로시, 린네.
아무리 영체라도 여행의 피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중간까지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던 그들은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2.
영체에게 수면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처럼의 여행 아니겠는가?
좋은 여행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적당한 휴식도 필요한 법이다.
목적지까지 지나치게 서둘러 움직이는 것보다는 강가에 차를 대고 하룻밤 숙영을 택했다.
풀뿌리가 얽혀 쿠션처럼 푹신거리는 지면 위에 텐트를 세우고 모포를 어깨에 두른 채 모닥불에 둘러앉았다.
아멜리아가 손수 내린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도로시가 센스 있게 챙겨온 마시멜로를 젓가락에 꽂아 곁불에 그을렸다.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했네.”
“별거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해야죠.”
“조금 아쉽군. 여름에 왔더라면 들판 한가득 피어있는 야생화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이 넓은 평원에 발밑부터 시야에 끝까지 피어난다고 한다.
마치 꽃의 여신이 숨을 불어넣은 것처럼 말이다.
“시우 꽃이 보고 싶나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옆에서 생뚱맞게 거드는 아멜리아.
“설마 마법 쓰시게요?”
“별로 힘들지 않은 걸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오늘 멀미로 가장 많은 고생을 했을 아멜리아는 편하게 쉬게 해두자.
조금 전부터 텐트 쪽으로 힐끔힐끔 눈이 가는 걸 보니 더 쉬고 싶어 보이는데 말이다.
“흐음, 이건 또 지상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별미로구나. 도로시 하나 더!”
“네~ 네~”
르뤼에는 도로시가 구워주는 마시멜로를 열심히 받아먹고 있었다.
심지어 손에 들린 코코아 위에도 겉을 살짝 태운 마시멜로가 동동 떠다니고 있다.
노예 생활 이후 단 음식을 꽤나 좋아하게 된 시우지만 저렇게 먹으면 속이 쓰릴 것 같다.
“…….”
린네는 두 손으로 커피가 담긴 철제머그를 감싼 채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대충 아무 강가나 골라 숙영지로 정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초원의 하늘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은화 한 자루를 잘게 부숴 오묘한 빛깔의 자개 장식 위에 흩뿌려 놓은 듯 별이 흐른다.
그런 별을 바라보는 린네의 검은 눈동자도 밤하늘처럼 빛났다.
“별자리 보시는 건가요?”
“별자리는 잘 모른다.”
누가 건드리지 않는다면 영원히 그 자세로 멈춰 석상이 되어버릴 것 같던 린네는 시우가 말을 걸자마자 시선을 마주쳐왔다.
“하지만 아름답다. 밤하늘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껴본 건 수백 년 만이다.”
결핍의 저주가 앗아가는 건 비단 쾌락뿐만이 아니다.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보더라도 완벽한 무감동만이 전해진다는 걸 뜻한다.
“낭군과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감동도 느낄 수 없었겠지.”
“음…. 제가 뭘 했겠습니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칭찬을 받거나 솔직한 감사의 표현을 받으면 괜히 몸이 꼬이는 시우다.
그 탓에 ‘린네 님이 없었더라면 스승 덮밥의 감동을 느끼지 못했을 테니 서로서로 등가교환 아닐까요?’라고 할 뻔했다.
“어? 별똥별인가?”
그때.
옆에서 벌떡 일어난 샤론이 밤하늘을 가리키며 일어섰다.
“잠시만 기다리게.”
불현듯 무언가 깨달은 엘로아가 간단한 마법을 활용해 모닥불을 불씨조차 남기지 않고 꺼버렸다.
“으아아아! 무얼 하는 게냐! 짐의 마시멜로우 화덕을 이리도 무참히…!”
“르뤼에 양 하늘을 보게나.”
거기엔 이유가 있었다.
11월의 서몽골은 사자자리의 유성우를 관측하기 가장 좋은 장소다.
야생화는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사자자리 유성군이 오늘만큼은 하늘을 멋들어지게 장식해주고 있는 것이다.
끝 없이 펼쳐진 하늘에 빗금을 그어대는 별의 자취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쉴새 없이 흐르고 있었다.
“예쁘다….”
모두 고개를 든 채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았다.
“소원, 소원 빌자!”
엄청 흥분한 샤론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눈을 꼭 감은 채 기도 손을 했다.
세상의 신비에 닿은 마녀라도 미신을 믿는 것일까?
다른 인원들도 잠시 눈을 감는다.
시우는 저마다 기도를 하는 연인들을 쭉 둘러보다 눈을 감았다.
여기 모두 모인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다.
설령 오랜 세월이 흘러 세상의 모습이 지금과 다를지라도.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싶은 단란한 평화.
언제나 하는 생각인 것 같지만, 이 평화가 이번에야말로 깨지지 않고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그렇게 빌었던 것 같다.
3.
텐트에서 일어나자마자 미리 챙겨온 기름을 넣고 지프에 올랐다.
마주 오는 차량도, 사람도 없이 12시간 간 운전을 계속하자 어느덧 만년설이 한가득 쌓인 높다란 산봉우리 5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타왕 보그드 국립공원의 ‘타왕 보그드’가 다섯 개의 봉우리라는 뜻이니 얼추 목적지 인근까지 도달한 셈이다.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군.”
조수석에서 틈틈이 지도를 살피던 엘로아가 말했다.
현 지점에서 공방까지는 직선거리로 200km.
이 지프에 탄 인원이 일반인이었다면 제법 대장정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 위계를 논하자면 가장 말석을 차지한 샤론조차도 대마녀.
마력 소모의 연비를 고려한다 해도 2시간이면 뛰어서 도달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 달음질을 이어감에 따라 마른 풀도 자취를 감추고, 대신 메마른 뼈대 같은 동토와 자갈길이 등장했다.
이쯤 되자 아무리 추방자라고 해도 ‘이런 곳에서 정말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귀밑을 스치는 청량한 바람을 느끼며 내달리던 일행들은 우뚝 멈춰 섰다.
“저쪽인가 보군.”
나무나 풀이라고는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동토(凍土) 위.
뜬금없이 빽빽하게 우거진 낙엽송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GPS 좌표를 보아도, 정황을 보아도 저 안에 ‘영혼의 마녀’의 공방이 있는 건 확실했다.
“도망가진 않을까요? 조금 걱정되는데.”
이미 현세 to 헥센나흐트로 납치되었던 정황이 있기에 최대한 인력을 동원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멤버를 보자니 어디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듯한 대 전력이다.
더군다나 추방자와 공적에겐 두려움의 상징인 스승님과 모든 마녀가 두려워하는 린네까지 있다.
최악의 경우 지레 겁을 먹은 영혼의 마녀가 잠적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중 몇을 놔두고 갔다간 모처럼 안전에 만전을 기한 보람이 없어져 버리고 말이다.
“소개장을 펼쳐두고 가는 건 어떤가? 감시 중이라면 알아볼 걸세.”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스승님의 제안대로 쓸데없는 경계를 피하고자 무기를 집어넣은 뒤 마력 사용을 최대한 제한했다.
예빈의 소개장이 잘 보이도록 활짝 펼친 채 숲에 발을 들였다.
조금 전까지 혹한이라는 표현이 걸맞았던 추위는 숲길로 발을 들이자마자 거짓말처럼 포근해졌다.
워낙에 빽빽한 원시림이었기에 사위가 어둑했으며 전혀 길이 들지 않아 미로처럼 복잡하다.
“예빈 스미르나 님의 소개로 오게 되었습니다! 전투의사는 없습니다! 진료받고 싶습니다! 사례하겠습니다!”
장식불 몇 개를 띄워 불을 밝힌 시우는 소개장을 이리저리 들이밀며 두부 장수처럼 소리치며 나아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되돌아오는 목소리는 없다.
고요히 몸을 웅크린 수풀이 메아리도 없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뿐이다.
“계십니까!!!”
-바스락
슬슬 목이 아파지던 차.
때마침 들려오는 인기척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일행의 시선이 단박에 쏠린다.
“음?”
하지만 거기에 있는 건 들짐승, 또는 마녀가 아니었다.
“꿀?”
돼지다.
그냥 돼지는 아니다.
페가수스처럼 날개가 달렸고 유니콘처럼 이마 가운데 뿔이 돋은.
돈육가공품의 포장지에 마스코트 같은 애교를 겸비한 돼지다.
당연히도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호문쿨루스…?”
지금까지 만난 호문쿨루스는 죄다 괴물이었지만, 이놈은 뭔가 귀엽다.
눈망울도 순한 것이 애완동물로 데리고 다녀도 될 것 같다.
“꾸울?”
고개를 재차 갸우뚱한 돼지는 이내 고사 상에 올라가는 돼지머리처럼 친밀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돼지가 웃음을 짓다니 아무리 호문쿨루스라도 보고도 믿기 힘들다.
“꾸우울!!!”
마치 일행에게 안아달라는 듯 펄쩍 뛰어오른 돼지의 몸에 순백의 광체가 어린다.
놈의 정체를 뒤늦게나마 떠올린 건 주요 ‘네임드’ 호문쿨루스의 DB를 외우고 다니는 엘로아 뿐.
“모두 정신…!”
그녀가 무언가를 읊조리기 전.
돼지에게서 뿜어져 나온 하얀 광채가 섬광탄처럼 일행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