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 도시-879화 (879/917)

#873

1.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잠든 린네를 깨운 건 눈꺼풀 위로 사납게 쬐는 태양 볕이었다.

“끄으응….”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숙취 속에서 고치를 짠 애벌레처럼 몸을 말고 뒤척이는 린네.

여러 고통에 익숙한 린네지만 머리 안에서 난쟁이가 종을 울리는 것 같은 어지러움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린네는 알코올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내성이 없었고, 그녀가 시음 삼아 홀짝인 위스키는 반병 가까이 되는 양이었으니 예정된 결말이긴 했다.

위스키란 자고로 40도가 넘는 술을 의미하니 말이다.

“무울…. 물….”

혀와 목이 마르다 못해 쩍쩍 갈라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도저히 물을 찾아 몸을 일으킬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끙끙거리던 린네.

그나마 포근한 요람 같은 침구가 린네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불과 베개에서는 간밤 알코올 가습기가 된 린네의 체취로도 덮을 수 없는 좋은 냄새가 난다.

도화(桃花)를 연상케 하는 새콤달콤한 체취라고 해야 할까?

무척 마음이 편해진다.

헌데 이 체취는….

“……?”

누가 찬물을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도롱 벌레처럼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놓던 린네의 눈이 띠용 커졌다.

확실하다.

이 침구에서 풍기는 냄새는 티페레트 공작의 것.

그리고 이 낯선 방 구조 역시 그녀의 침실이다.

애초에 린네는 잠을 자지 않기에 침대를 방에서 빼내 버렸으니 말이다.

“…아.”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린네의 머릿속에 조각난 필름이 상영을 시작한다.

완전히 블랙아웃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음주였으나, 불행히도 술의 신은 린네의 흑역사를 모두 거두어가지 않았다.

필경 앞으로 두고두고 떠올리며 과음은 삼가라는 살뜰한 가르침이리라.

낭군의 연인 중 유일하게 ‘연적’이라 칭할 만한 티페레트 공작.

그녀 앞에서 뭘 했더라?

린네의 머릿속 주옥같았던 명대사와 명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라.’

가장 먼저 칭찬 조르기.

‘우, 머리가 어지럽다…. 몸이 무거워…. 물먹은 솜 같다…. 하지만 기분이 둥실둥실하다….’

귀여운 말투로 취한 소감 말하기.

‘왜 나와 떨어지려는 거지? 린네는 붙어있고 싶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다.’

찐득찐득하게 앵겨붙기.

‘지금이니까… 히꾹! 말하는 거다. 듣고 잊어버려라.’

진솔한 취중 진담.

‘그 말이…. 그 말이 듣고 싶었는데….’

엉엉 울며 힘들었던 과거 하소연하기.

‘자장가…. 들어보고 싶다….’

자장가 불러달라 하기.

‘마마…. 마마….’

특히 린네의 쉴 틈 없던 추태쇼의 방점을 찍는 마마라고 부르기.

군데군데 기억나는 게 여기까지인데 또 무슨 짓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게 끔찍한 공포를 선사한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린네는 빼액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을 삼켰다.

이미 숙취의 고통이고 뭐고 안전에도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린네는 제 꼬락서니를 확인하곤 한층 더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아….”

알몸이다.

이불을 젖히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매끈한 알몸 상태라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잔뜩 애교와 아양을 떨던 기억 속 린네, 끊어진 필름, 일어나고 보니 티페레트의 침대 위, 알몸.

이상의 키워드가 조합되자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

린네는 허겁지겁 제 몸을 살폈다.

일단 땀 냄새도 나지 않고 말라붙은 체액도 없이 깨끗하다.

하지만 마녀란 손가락 한 번 튕겨 청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

‘관계’이후 뒷정리를 하는 건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

린네는 푹신한 엉덩이 밑이 와르르 무너지는 추락감을 느꼈다.

오직 낭군에게만 허락되어야 할 꽃향기를 술김에 다른 사람에게 맡게 했으니.

이는 정절을 져버리는 행위이자 지아비를 배신하는 끔찍한 실수이다.

물론 엘로아와 린네는 동침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때는 낭군이 함께였다.

그의 허가와 묵인하에 벌어진 경쟁이었다는 의미다.

고리타분한 현모양처 상을 올바른 아내의 자세라 믿어 의심치 않는 린네에게 이는 끔찍한 실수였다.

다른 흑역사 따위는 머리에도 들어오지 않을 만큼이나 말이다.

그때.

“일어났는가? 그대도 씻게나. 기분이 한결 괜찮아질 걸세.”

문이 열리더니 목욕가운을 걸친 엘로아가 들어왔다.

막 씻고 온 것인지 두 뺨이 건강한 복숭앗빛이다.

“…….”

린네는 녹 쓴 인형처럼 기기긱 고개를 돌려 엘로아를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진실이 두려워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분위기를 살폈다.

지난밤 무슨 일이 있더라면 분명 엘로아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을 터이니.

“의복은 잘 세탁해 정리해두었네. 그렇게 있지 말고 가운이라도 걸치게나.”

“의복?”

“그대의 의복 말일세.”

촉각을 곤두세운 린네는 엘로아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전까지는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두꺼운 벽이 있었다.

허나 지금 린네를 바라보는 엘로아의 시선은 어딘가 포근하다.

기억이 없는 사이 함께 허물었다는 양 말이다.

등골을 얼음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오한이 오소소 올라왔다.

“…….”

“혹시 기억이 안 나는 겐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이는 린네를 보며 엘로아는 알아차렸다는 듯 말을 보탰다.

“그렇다.”

“아쉽게 됐네.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뭐, 뭐가 즐거운 시간이라는 거지?”

“섭섭하네. 그렇게 뜨겁게 운우지정을 나눠놓고 하룻밤 만에 몽땅 잊어버리다니.”

마침내 모든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

“아….”

린네는 애써 모은 도토리가 모두 썩어버린 다람쥐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2.

충격에 잠긴 린네를 보며 엘로아는 장난스레 농담이었음을 밝혔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문란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그저 린네가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딴 농담을 왜 하는 거지?”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네. 자, 여기 레몬 물일세.”

“필요 없다.”

린네는 진심으로 삐졌다.

아니 사실 ‘삐졌다’라는 가벼운 표현으로 칭하기엔 살벌하다.

엘로아도 어젯밤 일이 아니었더라면 꽤 꺼림칙하게 느꼈을 만큼 말이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알게 된 린네의 약한 모습은 그녀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변화를 주었다.

평소에는 고슴도치처럼 굴어도 그녀는 보듬어 줄 손길이 필요한 아이 같았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엘로아답지 않은 농담으로 린네를 놀래켜 줄 일도 없었으리라.

업무를 위해 다시 같은 자리에 앉은 두 사람.

냉랭한 침묵을 지키던 린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은 실수다.”

“알고 있다네.”

“…….”

술김에 동침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읊조리며 넘기기에 어젯밤 엘로아에게 보였던 추태는 정도를 넘겼다.

린네는 의뭉을 떨며 태연하게 서류를 펄럭이는 엘로아를 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건은 반드시 약점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티페레트.”

“왜 그러는가?”

“원하는 바를 말해라.”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설령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더라도 후환을 없애는 편이 낫다.

공적의 세계를 살아온 린네에게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젯밤의….”

린네 우물쭈물 중.

차마 제 흑역사를 간접적으로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대가를 말하라는 의미다.”

“음? 괜찮네. 남는 침대 하나를 빌려 주었을 뿐이고 술도 어차피 혼자 마시기엔 너무 많았던 차이니. 다음에도 함께 마시겠는가? 물론 그때는 양을 조금 조절해서 말일세.”

그게 아니다.

어젯밤 그만한 일이 있었는데 린네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 와중 태연하게 다음 술 약속을 잡는 티페레트의 모습은 가증스럽게만 비쳤다.

“그게 아니다. 다른 문제다.”

“다른 문제? 아아….”

피식 웃는 엘로아의 얼굴에 발끈한 린네지만 참았다.

아쉬운 건 린네 쪽이니까.

“됐네, 확실히 당황하긴 했네만 귀여운 주사를 봤으니 만족하네. 그런 깜찍한 구석이 있는 줄은 몰랐지 뭔가?”

마치 견습마녀를 대하는 듯한 통통 튀는 짓궂은 말투를 보이는 엘로아.

거기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한편 린네는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티페레트. 장난하는 게 아니다. 훗날 이 일을 협박거리로 쓴다면 그땐 나도 좌시하지….”

린네가 말을 멈춘 건 엘로아가 입을 가리고 소리를 내 웃었기 때문이다.

“뭐가 우습지?”

“미안하네. 자세히 보니 어젯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싶어 말이네.”

“…….”

정확히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그 웃음만으로 의도가 전달되었다.

엘로아는 절대 이걸 협박거리로 삼지 않을 것이다.

경직됐던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런데 그건 왜일까?

만약 린네였다면 큰 고민 없이 조커로 남겨두었을 것인데.

적어도 합당한 대가 정도는 받아내었을 것이다.

“둘이서만 알콩달콩이야? 재밌는 이야기면 나도 껴 줘.”

대화가 길어지기 전에 끼어든 이는 도로시.

어수선한 분위기도 잠시 엘로아와 린네의 시선이 도로시에게 모인다.

도로시는 지난번 사냥으로 얻은 검은 묘안석 즉, 정보가 담긴 ‘메모리얼 스톤’을 손에 얻었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뒤늦게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라는 것이다.

린네도 엘로아도 각기 진지한 얼굴을 가면처럼 꺼내었다.

“결과는 나왔나?”

“해독은 절반 정도이고 나머지는 수비학파 녀석들에게 맡겨야 할 테지만 말이야. 아~주 놀라워. 꼭 공작님이 봐줬으면 좋겠어.”

도로시는 노트북을 펼쳤다.

메모리얼 스톤에서 얻은 영상을 녹화하여 보기 쉽게 편집한 것이다.

“잘 보고 감상 말해주기야?”

도로시의 하얀 손끝이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마치 유리수정을 통해 바라본 것처럼 가장자리가 굴절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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