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
1.
엘로아가 알려준 방식대로 위스키를 음미했다.
입안에서 번지는 달콤하고 화사한 타격감.
산뜻하면서도 묵직한 구석이 있는 바디감과 매끄러운 목 넘김 이후 알싸함이 섞인 복잡다변한 향이 비강을 간질인다.
“…흐음….”
“무엇이 느껴지는가?”
린네는 여러 가지 감각이 제한되어있던바 사냥개에 견줄 만큼 천부적으로 탁월한 후각을 지니고 있었다.
오랜 봉인을 풀고 해방된 미각 역시 일반인의 능력을 아득히 웃돌았다.
그런 린네의 감각은 무척이나 탁월하게 위스키를 만끽해냈다.
“꽃내음, 포도의 향 안에 피어오르는 시나몬. 혀끝에 매달려 녹아내린 당기,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쌉싸름한 초콜릿, 에스프레소 특유의 탄 맛.”
“제법이네. 처음부터 거기까지 느끼기는 쉽지 않거늘.”
“과찬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순수하게 칭찬하는 엘로아와 겸양을 보이는 린네.
솔직히 술과는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린네도 이 위스키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좋네, 이렇게도 한번 즐겨보게나.”
엘로아는 스포이드로 별도의 잔에 담겨있던 물을 린네의 위스키 잔에 똑똑 떨어뜨렸다.
“이건 뭐지?”
“미네랄 함유가 풍부한 미온수네. 이렇게 물을 섞어주면 오랜 숙성동안 갇혀있던 아로마가 되살아나지. 위스키에 어울리는 최고의 안주가 물이라는 얘기도 괜히 나온 게 아닐세.”
“음. 네 말대로다.”
“마녀들은 보리와 곡물에서 낸 술이 귀족답지 못하다 생각하지만 위스키는 와인 이상의 포텐셜을 지닌 술이네. 마셔보겠나?”
그녀의 말대로 물을 섞어낸 위스키는 한결 더 다채로웠다.
“싱글몰트를 즐겼으니 브랜디드도 즐겨봐야지 않겠나? 블랜디드는 싱글 몰트와 달리 여러 원액을 적절히 배합한 위스키일세.”
“아직 술이 남았다.”
“괜찮네, 그럴 줄 알고 잔을 여러 개 준비해두지 않았는가? 잠시만 기다리게나.”
그렇게 말한 엘로아는 어디론가 달려가더니 주섬주섬 가장 손이 닿기 힘든 곳에 넣어두었던 넓적하고 큰 병을 가지고 왔다.
조금 전 보았던 위스키에 비하면 검게 느껴질 만큼이나 색이 짙었다.
“글렌리벳 1943 위스키 디켄터. 기쁜 일이 있을 때나 마시는 물건이지만 오늘은 위스키 세계에 입문하는 그대를 위해 올리도록 하지.”
“…….”
소중하게 병을 안고 있는 엘로아는 흡족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뺨이 그녀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색 만큼이나 상기되어 있다.
취미를 공유하게 되어 좋은 건 알겠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나 기뻐할 일인가? 싶어 당황한 린네.
“고맙게 받겠다.”
일단 받아 마셨다.
이 또한 황홀해질 만큼 놀라운 향과, 맛과, 풍미의 향연이었다.
무표정한 린네가 눈을 땡그렇게 뜰만큼이나 말이다.
“조금 전 것보다 훌륭하다.”
“맛을 결정하는 게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까 마셨던 것의 5배의 가격이라네.”
“그렇군.”
이번에는 제 손으로 물을 조금 섞어 다시금 홀짝 마셔본 린네.
재미있다.
맛과 향으로 물감 놀이를 하는 기분이랄까?
기대 이상으로 시우가 린네에게 당부했던 ‘숙제’와 직관 되는 좋은 경험이었다.
“자, 다음에는 미국에서 증류한 버번 위스키일세.”
“미국에서 증류하기만 해도 맛이 달라지는 건가?”
“아니네, 일반적으로는 옥수수를 증류한 그레인 위스키 계열이지. 또 반드시 안쪽을 한번 그을린 새 오크 통을 사용한다는 것도 차별점일세.”
또 엘로아의 입을 빌려 듣는 술과 관련된 지식 또한 쏠쏠한 안줏거리가 되어주었다.
“오크 통에 누적된 향이 없다 보니 향이 단조롭다는 단점은 있네만 주조 환경 자체가 수분이 증발이 쉬운 환경이어서 그만큼 농축된 맛을 지니고 있다네.”
그녀의 말대로 버번 위스키는 약간의 탄맛, 그리고 녹진한 바닐라 향과 가죽 내음, 설핏 떠오르는 캬라멜 향이 강했다.
단맛보다 강조되는 턱 걸리는 타격감이 무거운 바디를 선사했다.
“마음에 드는군.”
“자, 이것도 마셔보게나. 피트 위스키인지라 독특한 향이 강하지만 어쩌면 마음에 들지도 모르네. 한번 맛 들이면 이것만 찾게 된다네. 특히 굴과 함께 먹으면 이만한 진미가 없지.”
린네가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새로운 잔에 새로운 위스키를 따라내는 엘로아.
-홀짝
이번에도 얌전한 몸가짐으로 술을 마시는 린네.
“독특하군.”
나프탈렌 혹은 소독약을 떠올리게 할 만큼이나 독특하고 화한 향취였으나 린네는 후각은 호불호가 강하게 갈릴 향에서도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다.
여타 마녀가 마법을 제외하고도 하나둘씩 특정 분야에서 재능을 받듯 린네는 실로 축복받은 혀와 코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엘로아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간지러운 듯 웃었다.
“피트도 잘 마실 줄은 몰랐네. 나쁘게 듣진 말아 주게, 솔직히 말하면 그대가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이 보고 싶었거늘.”
“고작해야 술이다.”
“예상외라고 해야 할지. 그대와는 좋은 술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앞으로도 종종 찾아오게나.”
“알겠다. 다음에 올 때는 나 역시 술을 챙겨오도록 하지.”
역시 고대부터 술은 효과 탁월한 친목 도모제다.
린네 역시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뜻밖에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
그렇게 몇 종류 정도의 위스키를 살짝 맛보았을까.
물론 한 잔을 전부 마신 건 아니고 맛을 본 정도라지만 살짝 느껴지는 어지럼에 주춤한 린네.
그런 와중에도 가볍게 들뜨는 발랄한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충분히 잘 마신 것 같다.
각양각색의 위스키를 종류별로 맛보았으니 일기에 적을 것도 충분하다.
본래 목적은 아니었으나 적당한 친교도 다졌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데….
-통, 통, 통, 통
테이블 위에 너부러져 있던 위스키를 정리한 엘로아가 새로운 병을 가져왔다.
“음? 벌써 일어나려는 겐가? 지금부터 시작이었거늘.”
“…….”
게다가 그 수는 또 다시 10병이 가뿐히 넘었다.
테이블 너머로 술을 따라주는게 불편했는지 린네의 옆자리에 앉는 엘로아.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무리는 말게나.”
“아니. 더 마시겠다.”
살짝 무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린네가 자리를 지킨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엘로아가 예상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와중 매몰차게 자리를 떨치는 게 도리에 맞지 않다는 것.
둘째는 그녀의 말마따나 심원하고 다채로운 주도의 세계에 적잖은 흥미를 품게 되었다는 점이다.
“라가불린 37년. 스카치 위스키네. 피니시가 길고 복잡해서 마시는 기분에 따라 뒷맛이 달라지는 천변만화한 술이랄까…. 한번 어떤 향이 나는지 평가해보겠나?”
“탄 맛, 소금, 탕약, 말린 포도, 향신료, 다크 초콜릿. 꽤 쓰다.”
“역시나로군. 굉장히 민감한 후각을 지녔나 보네. 가치를 아는 손님은 좋은 술을 대접받는 법이지.”
그리고 마지막 셋째.
무엇보다 엘로아의 태도가 무척이나 살뜰하다.
향에 대한 감상을 말하기만 해도 자애 가득한 목소리로 칭찬을 해주는데 이게 어쩐지 포근하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자존심 때문이라도 인정하지 못했을 감상을 조용히 곱씹는 건 흠뻑 취했기 때문이리라.
“이번에도 스카치 일세. 스프링뱅크 50년 1919. 냉각 여과를 거치지 않아 투명도는 떨어지지만 그만큼 아로마의 손실이 적다는 특징이 있네.
내 추천은 물을 1대1로 섞는 것일세. 참고로 한 통에 200L의 술을 담아 숙성했지만, 반세기나 숙성한 뒤엔 고작 24병만 나왔다는군.”
“이만한 병이면 얼마지?”
“나도 선물 받은 것이라 잘 모르네. 아, 찾아보니 5만 달러 정도군. 세금 미포함된 금액일세. 그래서 감상은 어떤가?”
“가장 묵직했다. 살짝 배 향이 느껴지는 게 독특하다.”
그렇게 빠른 페이스로 꼴깍 꼴깍 엘로아가 주는 대로 술을 받아마신 린네.
여기서 예정된 일은 무엇일까?
린네는 마녀지만 허접한 주량을 지니고 있다.
이는 단순한 체질 탓이 아니라 ‘검의 마녀’의 낙인 자체가 자율방어를 억누르는 방향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야 결핍의 저주가 풀 컨디션으로 작동할 테니 말이다.
시우 덕분에 결핍의 저주가 제거했다 한들 미흡했던 자율방어가 자연히 보충되는 건 아니다.
즉, 린네는 여전히 알코올 쓰레기.
소위 알쓰라 불리는 보기 드문 마녀가 되었다.
그런 린네가 홀짝홀짝 시음만했다고는 해도 도수 높은 위스키를 빠른 페이스로 마셔댔으니.
검귀 린네가 홍알홍알 린네가 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번엔 어떤 향이 느껴졌나?”
“진한 포도향, 백합꽃, 바닐라 사탕 또…. 흙내음. 또…. 입천장엔 복숭아, 감귤. 피니쉬는 참기름에 후추를 섞은 고소함.”
“참기름에 후추를 섞은 고소함이라…. 독창적인 해석이군. 다음 것도 맛볼 텐가?”
“…….”
눈을 끔뻑이던 린네가 뭔가 불만스러운 듯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칭찬.”
“음?”
“더 칭찬해라.”
살짝 꼬부라진 발음을 제외하면 겉보기에 린네는 그렇게 많이 취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엘로아의 상황판단은 조금 더 더뎌졌다.
“빨리 더 칭찬해라. 아까처럼.”
“…자, 잘했네. 근데 이미 독창적인 해석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던가…?”
“더 많이.”
기묘한 린네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하던 엘로아는 흠칫했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지?
분명 엉덩이 한 개 분만큼 떨어져 있던 린네와 엘로아의 거리가 어느샌가 바짝 좁혀져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엘로아.
이제껏 본의 아니게(가끔은 본의로) 이런저런 상황을 엿보게 된 엘로아는 뭔가 엿봐서는 안 될 것을 엿보게 될 것 같다는 전조마저 느꼈다.
“그대의 오감은 훌륭하네. 어떤 위스키에서든 가치를 발굴해 낼 수 있다는 건 축복받은 재능이야.”
“그런가?”
“그렇네. 그나저나 많이 취한 것 같네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겠는가?”
“…….”
누가 그러던가?
술은 사람을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린네의 가슴 속에는 항상 갈망이 있었다.
견습마녀 시절의 기억과 결부된 원초적인 갈망이 말이다.
그러나 린네는 언제나 그런 욕망을 억눌러왔다.
기껏해야 꿈속에서 낭군을 상대로 풀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술에 취한 지금 린네는 느끼고 있었다.
시우가 듬직한 ‘부성’을 채워준다면 엘로아에게 느껴지는 건 따뜻하고 자애로운 ‘모성’.
지금껏 있는 힘을 다해 부정해왔기에 자각조차 못 했으나, 자세만 흐트러지지 않았을 뿐 이미 인사불성의 린네는 조금 더 본인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즉.
“그렇다면 칭찬의 의미로 머리를 쓰다듬어라.”
마음껏 어리광을 피우며 결핍되었던 모성애를 충족하려 든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