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75화 (875/917)

#875

1.

둘 중 단 한 사람만 조사에 나설 수 있는 상황.

바꿔말하면 혁혁한 전공을 세울 수 있는 이가 린네와 도로시 중 하나라는 의미다.

물론 매우 위험한 일이 될 터이다.

헥센나흐트의 발족 이후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던 위치포인트가 궤멸한 남미 지역에 정체불명의 괴수 무리를 조사하러 가는 것이니 말이다.

심지어 린네와 도로시는 배신자.

헥센나흐트가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허나 린네는 두렵지 않았다.

결핍의 저주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생사를 건 전장에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길 수백 년.

이보다 더 위험한 일도 많았다.

기실 영상에서 보았던 수사슴이 어떤 존재건, 인간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건, 현세에 어떤 혼란을 야기하건.

린네는 딱히 관심 없었다.

그런데 적잖은 리스크까지 감수해야 하니 다른 경우였다면 이번 일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으리라.

“내가 더 적임자다. 은밀 기동에도 전투에도 자신 있다.”

하지만 낭군은 분명 염려할 것이다.

그는 그를 납치해 해를 끼치려고 했던 린네를 상냥하게 안아줄 만큼 선하며, 다른 마녀에게 노려진다는 이유로 현세 정세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처지를 한탄할 만큼 친 인간적이다.

그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다면 린네 역시 기쁠 것이다.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주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함을 향한 아집을 검 삼아 좁고 위태로운 길을 달려왔던 린네.

그만큼 그녀는 하나의 길밖에 몰랐다.

이제 린네에게 있어 인생이란 오직 낭군에게 바쳐질 때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그럴까? 하지만 남미 쪽은 내가 활동 경험이 훨~씬 풍부한걸? 더군다나 린네는 정면 돌파밖에 모르잖아?”

도로시의 동기 역시 비슷했다.

그가 놀라는 모습 하나를 보기 위해 잘 나가던 사업을 접었던 것처럼, 이번 역시 멋지게 문제를 해결해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하자면….

바보 짓이라는 걸 알아도 기특하게 굴기.

사랑에 빠진 여인이란 이토록 순진하고 어리숙한 것이다.

“날 너무 우습게 보는군. 기껏해야 짐승을 엿보는 일이다. 사냥꾼의 능력이라면 내가 더 탁월하다.”

“역시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네. 남미는 헥센나흐트의 앞마당이야. 지금쯤 우릴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을 텐데 사냥꾼의 능력만으로 충분하겠어? 난 여차하면 도움을 요청할 조력자도 있다고?”

“나도다.”

“어디서 그런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래? 정~ 그러면 힘으로 정해볼까?”

“바라던 바다.”

엘로아는 손을 내저어 마력을 끌어 올리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두 사람의 의견 모두 잘 들었네. 진정들 하게나.”

엘로아가 보기에 린네와 도로시 모두 능력치는 충분했다.

색을 지우는 린네의 잠입 능력이야 이미 검증된 것이고, 여우처럼 영리한 도로시는 예기치 못한 난관에도 지혜롭게 대처할 것이다.

각기 장점이 확실한 재원인지라 딱 잘라 고르기 모호했다.

“비슷한 조건이라면…. 흠, 옳지. 제비뽑기는 어떻겠는가?”

“인정할 수 없다.”

“그럴 수야 없지.”

결국 정석적인 제안을 해봤으나 당연히 반발에 부딪혔다.

마녀의 프라이드는 이토록 중요한 안건을 그저 운에 맡기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잠~깐 린네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와도 괜찮을까? 이대로라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은데.”

“여기서 정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아냐아냐, 진짜 금방 끝낼게.”

도로시는 도로시대로 생각이 있었다.

대뜸 불려나온 린네의 태도는 의외로 순순했다.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끼리 독대하는 게 더 편하다는 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니 말이 섭섭해. 우리 그래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잖아. 옛정을 봐서 그냥 나에게 양보하는 거 어때?”

“흥.”

역시나 바늘 끝도 들어가지 않을 싸늘한 비웃음.

린네는 도로시가 아는 마녀 중 손에 꼽을 만큼 대화가 통하지 않는 마녀였다.

삶의 스타일, 사고방식, 행동양상 자체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외골수.

그런 와중 티페레트 공작과는 또 다르다.

겉보기와는 달리 편법이나 정당하지 못한 방식도 서슴지 않고 사용하는 계략가의 풍모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통상적인 대면이었다면 골머리를 꽤 앓았어야겠으나....

오늘은 아니다.

“흐음~ 아쉽네. 네게 정말 유리한 제안을 하려고 했는데 말야.”

“관심 없다. 어떻게 정하자는 거지?”

“정말? 정~말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내 말을 듣고 안 듣고에 따라…. 넌 죽을 수도 있을걸?”

“재밌군. 해봐라.”

나긋나긋한 말투로 섬뜩한 말을 입에 담는 도로시와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검을 움켜쥐는 린네.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는 담이 약한 사람이 한 모금만 들이쉬어도 거품을 물 만큼이나 팽팽하다.

진득한 예기를 안개처럼 흩뿌리는 린네 앞에 도로시는 최면어플을 보여주는 변태 아저씨처럼 스마트폰 액정을 척 들이밀었다.

“자~ 여기. 내 협상안.”

“……?”

린네는 멍한 눈빛으로 검은 화면이 드러난 액정을 바라보았다.

동영상이 재생된다.

어둑어둑한 화면이 끝나고 등장한 건 예스러운 일본식 방.

그리고 침소에 들 준비를 끝낸 낭인 무사풍 신시우.

그 시점까지 린네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며 하얀 유카타를 입은 린네가 등장한다.

‘파파, 오늘도 같이 잘 거죠?’

린네의 몸이 뻣뻣이 굳는다.

도로시는 어느샌가 린네의 어깨에 손을 두른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어디서 많이 본 광경 같지 않아?”

“이, 이…. 이걸 어디서….”

분명 영혼의 마녀를 협박해 원본을 파쇄했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해?”

도로시는 협박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처럼 능숙했다.

대놓고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평소와 같은 말투를 구사하며 불길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이거이거,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그 무시~무시~한 검의 마녀가 실은 아버지와 동침하고 싶어하는 파파 콤플렉스라는 걸 알게 된다면 말야.”

“…….”

“우선 티페레트 공작님에게 일러볼까?”

머리가 멍하니 굳어버리는 수치심.

이런 어마어마한 약점을 잡히고 말았다는 절망감.

그리고 하필이면 그 약점이 교활한 도로시의 손에 넘어갔다는 불안감이 린네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옥죈다.

“아, 알겠다. 원하는 대로 하겠다! 당장, 당장 지워라 당장!”

해당 영상은 린네의 인생 최대 흑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어젯밤 티페레트 공작과 있던 일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제야 조금 상황을 이해하는구나?”

“…큭. 나도 네 약점이 있다. 네년이 침소에만 들면 젖소처럼 울부짖는다는 사실을….”

“와~ 여기서 맞협박을 할 줄이야. 역시 린네라니까?”

“…….”

“마음껏 해. 난 진짜 신경안 써. 설마~ 날 생각해서 지금껏 비밀 지켜주고 있던 거야? 어머~ 도로시 완전 감동…!”

지렁이처럼 꿈틀거려보는 린네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가증스럽게 입을 가로막으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연기를 선보였다.

과연 부끄러운 줄 모르고 수컷을 매혹하는 천박한 몸매의 소유자, 도로시라면 정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

지금 스마트폰을 파괴한다는 것도 너무 얄팍한 생각이다.

매사에 철두철미한 도로시라면 분명 이 스마트폰을 박살 내도 원본 데이터가 보장되게끔, 설령 도로시 본인을 처리한다고 해도 린네와 동귀어진할 방법을 마련해뒀을 테니 말이다.

“그럼 우리 린네 양? 어떤 상황인지 이해했어?”

“…….”

“대답.”

“…이해했다.”

“존댓말.”

“…….”

“흐음~ 존댓말은 못하시겠다?”

“이, 이해했어요.”

“조~금 더 귀엽게. 이 악물지 말고.”

“…….”

한편 우위를 확신한 도로시는 마음껏 옆에서 깝죽거렸다.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살벌한 린네를 가지고 놀아보겠는가?

린네는 흰자위에 벌겋게 핏줄을 세우고 노려보면서도 옴짤달싹 못했다.

“그렇게 반항적인 눈빛으로 보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데. 린네는 그런 거 모르지?”

“……!”

덥썩 엉덩이를 움켜쥔 도로시가 린네의 어깨에 턱을 기댄다.

“순순히 협상에 응했으면 바로 지워줄 생각이었는데~ 괘씸하게 발톱 세우는 걸 보니 마음이 변했지 뭐야~”

쭈물쭈물 움직이는 도로시의 손은 명백히 음탕했다.

린네는 이를 눈꺼풀을 떨며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어떻게 할 셈이지……요?”

“사실 예전부터 궁금했어. 무시무시한 검의 마녀가 과~연 침대에선 어떤 목소리로 울지 말야.”

정절의 위기.

린네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 우리는 낭군의 부인인데…요…. 가, 같은 낭군을 섬기는 처끼리 음란행각을 벌이는 건. 조, 좋지 못하다……요.”

“괜찮아~ 괜찮아~ 린네만 입 꾹 다물면 그 둔탱이가 눈치나 채겠어?”

“…….”

점점 벽으로 몰리던 린네는 결국 벽에 등을 부딪쳤다.

도로시의 강렬하나 벽치기와 함께 그림자가 린네를 캄캄히 가뒀다.

확정을 하듯 교활한 미소와 함께 빛나는 도로시의 하얀 이.

“음? 뭐 하고 있어? 내가 벗겨?”

“힉!”

도로시는 그 검의 마녀가 겁먹은 아이처럼 머리를 부둥켜안고 쭈그려 앉은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빈말이자 농담에 겁먹었다는 걸 깨닫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린네의 반전매력을 보게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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