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녀의도시-872화 (872/917)

#872

1.

흔히들 이런 말이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어른이 되어 또 다른 형태로 받지 못했던 사랑을 갈구하게 된다고.

낭설이 아니다.

실제로 영유아기의 경험이 성인의 애착유형을 결정짓곤 하는 것이다.

린네의 어린 시절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학대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계승이 된 이후로 짐승 같은 삶 속엔 상처를 핥을 여유도 없었으며,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엔 의도적으로 어두운 기억을 외면했다.

행복한 삶 따윈 바라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건 오직 강함을 향한 정진뿐.

낙인에 이어 스승의 사고방식마저 답습한 린네에게 과거의 상처나 결핍 따위는 나약함의 증표일 뿐이었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반드시 회귀하기 마련이다.

애정결핍 원액과 술주정 원액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블랜디드 린네가 이를 증명한다.

평상시 하지 못했던 언행, 속내 깊이 숨기도 본인조차 부정했던 욕구.

즉, 어리광과 애교를 잔뜩 부리며 쓰담쓰담을 받고 싶다는 충동이 이성을 앞지른 것이다.

그녀는 어느새 엘로아에게 찰싹 달라붙어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로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많이 취한 것 같네. 들어가서 쉬는 건 어떤가?”

엘로아는 진땀을 뻘뻘 빼며 처치 곤란의 린네를 바라보았다.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달라며 전력으로 부탁하기에 대강 해주었으나 설마하니 이렇게 찰싹 달라붙을 줄이야.

“하나도, 히꾹…! 안 취했다. 한 잔 더.”

혀가 꼬부라진 발음으로 딸꾹질까지 하며 엘로아에게 정수리를 들이미는 린네.

엘로아는 실로 커다란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취기는 사람을 다르게 만든다.

평소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샤론 양도 술에 취하면 애교가 많아지면서 뺨에 뽀뽀를 하는 등 굉장히 스킨십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샤론의 경우, 적어도 결이 같다.

타고나길 프랜들리한 성격이 더욱 친밀감을 표출하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린네는 어떠한가?

“우, 머리가 어지럽다…. 몸이 무거워…. 물먹은 솜 같다…. 하지만 기분이 둥실둥실하다….”

적어도 이런 말을 할 마녀는 절대로 아니었다.

침대에서 서로 못 볼 꼴을 보였다 한들 그건 앞에 시우가 있으니까 그랬던 거고, 린네는 언제나 차갑게 날이 선 일본도 같은 분위기였다.

목소리마저 의도적으로 톤을 낮춘 건지 제법 허스키하게 들렸었지.

“그게 취했다는 걸세. 좀 쉬게나.”

“흥! 싫다. 안 쉴 거다”

하지만 지금 린네의 목소리는 혀가 꼬여있을 뿐 아니라 콧소리가 많이 섞였다.

일본인 특유의 성우 같은 비성 말이다.

칭얼대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았다.

“조, 조금 떨어지게나. 남사스럽게 뭐하자는 건가?”

“왜 나와 떨어지려는 거지? 린네는 붙어있고 싶다.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다.”

엘로아가 짐짓 엄하게 말해도 꾸물꾸물 팔을 엘로아의 허리 뒤로 팔을 감는 린네.

그 와중에 1인칭이 ‘나’에서 ‘린네’로 바뀌었다.

“…쿠후….”

“린네. 이보게, 린네?”

갑자기 옆에서 봐도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더니 색색 숨을 뱉으며 잠이 든다.

엘로아의 옆구리는 여전히 단단히 붙잡고 있었지만 말이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드디어 일어나나 싶더니 아예 엘로아의 허벅지에 머리를 눕힌다.

“으…. 으음…. 린네는 이게 더 좋다.”

“후우….”

“머리, 머리 계속….”

“알겠네, 알겠으니 얌전히 있게나.”

엘로아는 한숨을 푹 쉬면서도 부지런히 린네의 검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먹물보다 새까만 흑색장발이면서도 머릿결은 흐르는 비단 같다.

품위 넘치는 흑발은 제 머리칼이 요란하다 여기는 엘로아에게 부러운 구석이 있는 머리다.

“이제 됐는가?”

“흐음, 으으음….”

금방이라도 난동을 부릴 것처럼 거나한 술주정을 보이던 린네가 얌전해졌다.

가늘게 뜬 눈, 긴장 풀려 느슨해진 입매.

언제나 과잉 각성 상태로 주위를 경계하던 린네가 볕 좋은 곳에서 주인에게 귀염받는 고양이처럼 골골 소리를 낸다.

무척 편안해하는 듯하다.

엘로아는 모진 사람이 못되었다.

린네와 여러모로 대립하는 처지이긴 해도 시우로부터 린네의 과거사를 전해 들었다.

좀 전부터 린네가 엘로아에게 칭찬을 요구하던 것도, 지금 이렇게 찰싹 붙어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이해해 줄 수 있다.

린네는 지금 자신에게 결핍되었던 것을 찾아 헤매는 상태일 테니 말이다.

“엘로아.”

무겁게 늘어진 목소리가 나지막이 엘로아를 부른다.

“지금이니까… 히꾹! 말하는 거다. 듣고 잊어버려라.”

기어이 취중 진담이라는 최악의 수까지 입 밖으로 꺼내버린 린네.

“뭘 말인가?”

“나는 널 동경했다.”

“동경?”

“너는 검 한 자루로 최강의 마녀라는 반열에 올랐다. 질투도 느꼈고, 경쟁심도 느꼈다.”

“그런가?”

“그렇다.”

그래서 그토록 자주 엘로아의 앞에 나타났던 걸까?

갑자기 벌떡 상체를 일으킨 린네.

“네가 본 나의 검. 소감을 듣고 싶다.”

분위기가 일변한다.

상체가 오뚝이처럼 기우뚱 기우뚱거리고 있었으나 정제되지 않은 아집이 뾰족뾰족하게 피부를 찔렀다.

“훌륭했네.”

“…….”

아직 부족하다는 양 여전히 변하지 않는 린네의 진지한 표정.

엘로아는 솔직한 소감을 더 덧붙였다.

“나와는 방향성이 다르지만 검의 경지 자체를 놓고 보자면 우열을 가릴 수 없었네. 그대와 검을 맞대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

“…….”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듯한 날카로운 린네의 시선.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욱…. 우욱….”

“괜찮은가?”

엘로아는 크게 당황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린네가 길 잃은 병아리처럼 뚝뚝 눈물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그 말이 듣고 싶었는데….”

흐느낌과 함께 무너져내린 린네의 얼굴은 호되게 야단을 맞은 어린아이 같았다.

린네가 칭찬을 받고 싶었던 대상은 아마도 엘로아가 아닐 것이다.

시우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그녀의 스승에게 인정받고 싶었겠지.

수 백 년이 지나도 희석하지 못한 원망과 회한.

몇 번이고 기대를 배신당했음에도 내려놓을 수 없던 애증과 그리움이 방울방울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다.

별안간 일어난 린네의 주사를 처리 곤란한 무언가 정도로 인식했던 엘로아다.

경국지색의 마녀일지라도 술주정을 받아주는 게 고역인 건 진배없으니 말이다.

“린네….”

하지만 서럽게 울며 손등으로 눈물을 연신 훔치는 린네는 흡사 가면으로 표정을 가리고 있던 미아처럼 보였다.

분명 린네는 엘로아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사랑과 관심이 고픈 어린아이로 보였다.

그리고 지엄한 심판자로 경외를 사는 엘로아는 어린 마녀에 한해서는 한없는 아량과 자애를 베푸는 편이었다.

“이리 오게나.”

엘로아는 본능적으로 지금 린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팔을 벌려 린네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음소리를 감추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준다.

“윽, 우욱….”

“때로는 소리 내 울어도 좋다네. 속이 후련해질 걸세…. 끄윽!”

린네는 기다렸다는 듯 엘로아의 품에 파고들었다.

껴안는 힘이 어찌나 강한지 갈비뼈에 금이 갈 것 같았다.

지나치게 감정적, 서정적이 되려던 이성도 조금은 맨정신을 되찾았다.

허나 비교적 이성을 되찾은 엘로아와 달리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새끼 새처럼 자꾸만 자꾸만 더 밀착하려는 린네.

“괜찮네, 뿌리치지 않을 테니 그렇게 꽉 안을 필요 없어.”

“…….”

“이렇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되겠는가?”

바짝 힘이 들어갔던 린네의 어깨에 서서히 힘이 풀리더니 끄덕끄덕 고개를 흔든다.

엘로아의 압도적인 모정이 마치 삼투압 현상을 일으키듯 린네에게 스며들며 안정을 안겨주는 것이다.

“이거 어째 자장가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군.”

“자장가…. 들어보고 싶다….”

“자장가를? 내 자장가를?”

“듣고 싶다.”

엘로아로선 가볍게 농담을 던진 것이었으나 린네에겐 매력적인 제안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엘로아.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조금 더 상처 입은 린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로 했다.

세상에는 위스키만으로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이라는 게 존재하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불러본 건 라피가 어린 시절이니 100년도 훨씬 전.

하지만 엘로아는 금방 가사와 음정을 기억해 내었다.

“이 달콤한 노래를 너를 위해 불러주고프단다. 너의 피부는 숲 속 이끼만큼 부드러우니까.

궁지에 몰린 어린 사슴 숲속에는 늑대가 숨어있네 아우우우우~. 지나가던 용감한 기사가 사슴을 품에 안았다네 라라라라~ 네가 원한다면 어린 사슴은 바로 너란다. 늑대 걱정은 하지마렴. 우리는 둘이잖아?”

엘로아의 고운 음색으로 자장가를 부르자 린네의 몸에 서서히 힘이 빠진다.

“마마…. 마마….”

“그래, 여기 있네.”

이미 머리에 감돌던 취기는 조금 더 얼큰해지고.

지금은 모든 걸 내려놓은 채 마마의 품에 안겨 있고 싶었다.

졸음이 쏟아진다.

“우, 더워…. 린네 더워요.”

린네의 행동은 술 취한 사람답게 종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엘로아의 품을 벗어난 린네가 훌렁훌렁 옷을 벗더니 침실로 후다닥 달려가 침대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자장가 계속….”

그러더니 엘로아에게 손짓했다.

갑자기 스트립쇼를 하길래 깜짝 놀랐던 엘로아는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의자를 끌고 그녀의 머리맡에 앉았다.

“알겠네, 눈 감고 듣게나. 모든 어린이를 위한 달콤한 노래 엄마가 불러주던 달콤한 노래. 오~ 정말 예쁜 이야기 사슴이 그만 여인으로 변했어 라라라라~ 멋진 기사의 품에, 어여쁜 공주님은 영원히 안기게 된 거야. 엄마가 불러주던 달콤한 노래. 엄지손가락을 빨며 노래를 듣다 잠들곤 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린네는 새근새근 깊은 잠에 빠졌다.

느려지는 린네의 호흡에 따라 천천히 목소리를 낮추던 엘로아도 자장가를 멈추었다.

한바탕의 해프닝에 당황했지만 결국 하늘이 무너져도 꿈나라를 여행할 것 같은 린네의 평온한 얼굴을 보자 이런 술자리를 갖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겉보기만으로 판단하면 안 되는 법이다.

“좋은 꿈 꾸게나.”

내일 린네가 제정신을 차리면 만만찮은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은 이 평화를 지켜주고 싶었다.

엘로아는 헝클어진 린네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주고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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