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0
1.
린네는 수백 년간 ‘목줄’을 차고 있었다.
역대 ‘검의 마녀’가 낙인을 통해 물려받던 의도된 장애 결핍의 저주가 목줄의 이름이다.
이 목줄의 역할과 목적은 실로 단순하지만 극악무도했다.
‘강해지는 순간’을 제외한 모든 삶의 의미를 제거하니 말이다.
실제로 린네 이전의 무수한 검의 마녀가 100년의 수명을 채우지도 못한 채 괴로움 속에 죽어나가지 않았던가?
행복과 관련된 감각뿐 아니라 정신적 충족감마저도 제한하는 실로 ‘저주’라는 호칭에 걸맞은 족쇄였다.
하지만 운이 아주 좋게도 린네는 선대와는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낭군을 만나 족쇄를 제거하게 된 것이다.
그 점 하나만으로도 린네는 평생 낭군에게 몸과 마음을 바칠 의향이 있었다.
처음엔 낯설었다.
무려 수백 년이란 시간이다.
오랫동안 강제됐던 삶의 형태는 린네의 사고에도 행동양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조금만 가만히 있으려 해도 등 뒤에서 채찍을 휘둘러오던 저주는 사라졌지만, 막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되면 불안함과 조바심이 마음을 좀먹었다.
단체 여행을 끝내고 위치포인트의 홋카이도 지부에 돌아와서도 그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욕실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과 긴장감으로 입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그렇기에 여전히 잠은 자지 않았고, 밤에는 바닥에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명상에 돌입했다.
호문쿨루스를 사냥할 때나 겨우 잠시간의 안도를 찾을 수 있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한들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기에 어쩐지 붕 뜬 느낌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부유하듯 하루하루를 방황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 린네의 불안은 멋진 드레스를 선물로 들고 찾아온 낭군은 누구보다 빨리 눈치챘다.
“린네 님, 그건 너무 힘드실 것 같은데요.”
“나는 이게 편하다.”
새삼 더한 행복을 찾으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이미 과분할 정도로 린네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낭군이 옆에 있지 않은가?
이 이상 안락함과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걸치려 드는 행위로 느껴졌다.
“그러면 따로 식사도 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조금은 먹는다.”
“잠도 안 주무시고요?”
“잠은 불안하다.”
“여가 땐 뭐하시나요?”
“명상한다.”
“…….”
한참을 고민하던 시우.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염려와 걱정이 린네를 기쁘게 한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토록 진지하게 린네를 걱정해주는 것이니 말이다.
“낭군. 괜찮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가 계속 걱정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대로도 만족스러우니 너무 마음 쓸 것 없다는 말을 전하려던 차 그가 말을 가로채었다.
“안 되겠습니다. 숙제를 드려야겠어요.”
“…….”
“오늘부터 무조건 하루에 한 번씩은 즐거웠던 일을 하고 일기로 써서 다음에 만날 때 보여주세요.”
“낭군. 그건 일기가 아니다. 보고서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신경 쓰이는 걸요.”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다.
또한 린네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기도 했다.
예전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맡지 않았겠지만 부탁해 온 사람이 낭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아비로서의 명령인가?”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딱딱하게 하세요. 부탁입니다. 부탁. 대신 거짓말로 아무렇게만 적지는 말아주세요.”
“…알겠다.”
숙제를 떠맡은 린네는 그날부터 하나하나 ‘삶의 즐거움’을 기록하기 위한 숙제를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린네의 삶과 조그마한 접점도 없는 ‘여흥’을 하루마다 하나씩 숙제처럼 해나가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다루기 난감한 부탁이라도 이건 남편의 명령, 그것도 린네를 위해 해준 명령이다.
절대로 허투루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인가?”
따라서 린네는 오랜 숙적이자 영원한 라이벌이 될 여인을 찾았다.
“대화를 나누고 싶다. 티페레트.”
“그러지.”
엘로아 티페레트.
언젠가 린네가 목표이자 경쟁자로 삼았던 상대이며, 작금에 이르러선 한 낭군을 함께 모시게 된 사이.
처첩의 화목은 가정의 평안에도 보탬 된다는 걸 안다.
따라서 다른 연인과는 화합을 이루길 다짐한 린네다.
그러나 엘로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거리가 좁혀지질 않았다.
아마도 린네에게 남은 투사로서의 본능이 아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린네가 보기에 엘로아는 제법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여인이다.
요리도 제법이었고, 무엇보다 애주가다.
그게 뭐 별거냐 할 수도 있지만 ‘꼭 할 필요 없는 것’ 굳이 말하자면 ‘시간 낭비와 돈 낭비’야 말로 여흥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을 손에서 놓지 않는 티페레트, 그러니까 일상과 여흥을 조화롭게 향유하는 그녀야말로 조언을 구하기엔 최적의 상대일지 모른다.
고지식하다는 점, 평소 절제된 무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점 등에서 린네와 비슷한 구석도 있으니 금상첨화다.
“별일이군. 무슨 바람이 분 겐가?”
예상대로 업무 시간 외엔 따로 독대한 적 없던 린네가 구태여 찾아온 것에 놀란 듯한 엘로아.
이어 린네의 부탁을 받자 조금 더 놀란다.
“위스키를 추천해 달라고?”
“그렇다.”
함께 토벌에 참여하게 된 이후로는 조금 나아졌다지만 이제껏 두 사람은 묘한 경쟁 속에서 대립했던 처지다.
서로 적대했던 나날이 그만큼 길었으니 말이다.
“좋네.”
가뜩이나 시우는 린네와 엘로아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바라던 차에 영원히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 노릇.
엘로아로서도 린네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향성이 애매하게 겉돌았던 것이다.
헌데 린네가 이렇게 선뜻 사적인 부탁을 해온다?
이건 린네 나름의 친교 사인이 아닌가?
린네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온 만큼 엘로아도 평소 사무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부드러운 얼굴로 그녀를 객실에 들였다.
“그런데 술은 갑자기 웬 말인가? 음주를 즐기는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늘.”
“이번에 시작하려 한다.”
“일단 알겠네. 따라오게나. 비지니스 룸 쪽일세.”
린네는 잠자코 뚜방뚜방 발걸음을 옮기는 엘로아의 뒤를 따랐다.
평소보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어쩐지 자랑하고 싶어 들뜬 발걸음이라고 해야 하나?
“어떤가?”
“…….”
린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엘로아와 린네가 제공 받은 객실은 최상층의 스위트룸.
라운지만 2개 침실만 5개인 객실인데 머릿수가 셋 밖에 안되다 보니 빈방이 생겼다.
그 중에서 사무를 볼 수 있는 사무실 중 하나는 엘로아가 차지하였기에 린네는 그 안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책장 쪽에 한가득 다양한 술병이 쌓여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 양이 범상치 않다.
엘로아의 개인 짐을 전부 챙겨도 이 반의반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내 소장품들일세.”
마치 아이를 보는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각양각색의 술병이 진열된 책꽂이를 보고, 다음엔 소중한 장난감을 소개한 뒤 리액션을 기대하는 반짝이는 시선이 린네를 향한다.
“…멋지다.”
“그렇지 않나?”
“자리에 앉게나. 하나씩 가르쳐주겠네.”
-쿵! 통! 탕!
그렇게 말한 엘로아는 술병 몇 개를 골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 옆에 글랜캐런 잔을 여러 개 나열했다.
밑이 넓고 위가 넓어 튤립 형태를 취하는 글렌캐런 잔은 위스키의 향을 모아 더욱 깊게 음미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술잔이었다.
“위스키를 마셔본 적은 있나?”
“없다.”
“잘됐군, 하나하나 가르쳐주겠네. 위스키는 보리나 여타 곡물에 효모를 넣어 발효한 뒤 증류한 40도 이상의 술이라네. 크게 나누자면 하나의 증류소에서 생산한 보리로 만든 싱글 몰트, 다양한 원액을 섞어낸 블랜디드, 미국에서 증류한 버번이 존재하지. 곡물이 아닌 사탕수수 부산물로 만드는 럼이나 포도주로 만든 꼬냑도 있다네.”
이처럼 본격적인 설명과 평소보다 풍부한 말수를 보면 알겠지만, 엘로아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마녀 중 애주가는 많지만 엘로아만큼이나 술을 좋아하는 마녀는 드물다.
더군다나 마녀 대부분이 와인이나 샴페인을 선호하기에 위스키는 다소 마이너한 취향에 속한다.
즉, 린네를 보는 엘로아의 마음은 망겜의 고인물이 가르침을 청하는 뉴비를 발견한 마음이랄까.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마음의 벽도 잠시 내려놓고 열성적인 가르침을 다짐한 것이다.
“위스키의 세계는 심원하다네. 이 세상 그 어떤 위스키도 같은 맛을 내지 않지. 그 섬세한 풍미에 맛을 들이게 된다면 그대 역시 다른 술에선 부족함을 느끼게 될 걸세.”
“그렇군. 몰랐던 사실이다.”
예빈에게 남녀 관계에 대해 배울 때도 그랬고, 즐라타에게 요리를 배울 때도 그랬듯 배움에 있어 린네의 태도는 이상적이었다.
자기 고집은 넣어두고 입을 다물고 조용히 경청하는 편이었다.
“처음이기도 하니 싱글 몰트부터 시작해보겠네.”
그 태도에 한층 흡족해진 엘로아는 본래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은 등급의 술을 꺼내놓았다.
얼마 전 김준법 의원이 선물이라며 들고 온 귀한 술이었다.
“ ‘맥캘란 30년 올드 셰리오크’. 이름 그대로 셰리 오크에서 30년간 숙성을 거친 나이 많은 친구일세. ”
“셰리 오크가 뭐지?”
“셰리 오크는 스페인 남부의 특산품 셰리 와인을 숙성할 때 사용하던 통이라네. 숙성 때 위스키를 담는 오크통 또한 향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지. 어떤 통, 어떤 지역에서 숙성시켰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니 말일세. 더 긴말 할 필요 없이 먼저 맛을 시음해 보게나.”
엘로아는 린네 앞에 놓인 잔에 위스키를 따라주었다.
1온즈, 약 30mL는 위스키의 한 잔이 되는 기준이다.
린네는 잔 밑바닥에 깔린 투명한 호박색 주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셔보시게. 급하게 마실 것 없네 아주 대화를 나누듯 천천히 시간을 즐기는 게 좋지. 아주 조금 머금고 혀에서 굴린 이후 편안하게 넘기게나. 그리고 이렇게 코로 향을 내뱉으면 가장 최고의 풍미를 느낄 수 있을 걸세.”
“좋다.”
린네는 엘로아가 시키는 대로 조금의 술을 머금었다.
1시간 뒤 찾아올 비극을 조금도 가늠하지 못한 채 말이다.